폴 스미스 스타일 - 가장 영국적인 디자인 폴 스미스 A to Z
폴 스미스, 올리비에 위케르 지음, 김이선 옮김 / 아트북스 / 2012년 12월
절판




태초에 실루엣과 색상이, 동세와 질감이, 직선과 비정형 움직임이 나타나기 이전에 어떠한 특징이 있었다. 샤넬만 입는 여자를 보면 강한 자존심이 느껴진다. 망가진 구두 코는 가난한 마음이었다. 피케 셔츠는 각고의 생각 혹은 무개성이었다. 샤넬은 한때 꽃핀 여성의 사회참여 정신의 계승인가, 천민자본주의 특성인가, 혹은 강한 자존심의 표출인가. 모두가 입고 있는 옷, 구두, 가방, 이런 것들은 어떤 의미일까? 패션과 생활의 창조자를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책은 '창조'의 관점에서 본 폴 스미스의 특징을 간략히 보여준다.




책의 느낌은 상당히 가볍다. 1946년 영국 태생 폴 스미스가 직접 찍은 사진과 알파벳 A부터 Z까지 떠오르는 단어에 관한 생각을 짤막하게 나열했다.

A
애비 로드
자크 앙크틸
건축
예술

에서 시작하여

Z
얼룩말까지.





평범한 검은색 반지갑이었는데 펼치는 순간 화려한 스트라이프 무늬를 배경으로 자동차가 나타나는 지갑이 있었다. 무난한 엷은 하늘색 셔츠에는 베이지색 단추들이 줄지어 있는데 아래에서 세 번째 단추만 색상이 진한 파랑이었다. 이런 그의 디자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상품을 선택함에 고려하는 많은 사항 중 하나는 바로 만든 이의 의도와 구입하는 이의 취향일 것이다. 그것은 재활용 아크릴 원단으로 만든 오천 원짜리 스카프일 수도, 라벨이 붙은 몇십만 원짜리 디자이너 슈즈일 수도 있다. 왜 그것을 돈을 내고 사서 몸에 걸칠까? 나는 왜 지금 이 옷을 입었나?




이 책은 가볍지만 아무렇게나 만든 것은 아니다. 스타일에 관한 키워드를 툭툭 던진다. 이 책을 읽어도 옷 잘 입는 법을, 혹은 폴 스미스 라벨 옷을 저렴하게 구할 방법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옷을, 주변 사물을, 나아가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의 생각하는 방식을 살짝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감히 이 책이 육천 원 가량의 광고 전단 묶음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생각의 갈래, 아이디어의 구현.




어느 오후, 당신은 길을 걷고 있다. 그곳은 혼잡한 광화문 대로일 수도, 빈의 슈테판슈트라세일 수도, 창원의 주택가일 수도 있다. 눈은 무언가를 바라보고 귀는 어떤 소리를 듣는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이러한 상황이었다. 왜 어떤 이는 길에 지나가는 개미를 보는데 어떤 이는 자동차의 반짝이는 유리창을 보게 될까? 무심히 지나치는 사물이 우리에게 남기는 흔적은 어떻게 되살아날까? '기껏해야 옷 쪼가리 주제에!' 와 '패션의 관심은 오직 미래'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모든 질문이 이 책에서는 버겁지 않다. 훑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에 따라 30분에서 한 시간. 사진이 대부분이고 글은 짧다. 폴 스미스는 짧고 간결하고 간단하다. 그러나 라일락색 셔츠에 진회색 바지에 에메랄드빛 구두를 신는 그의 스타일링이 나오기까지 그의 생각의 흐름은 예상외로 다채로웠다.




무엇보다도 그의 디자인에는 코드가 있다. 그 스스로 밝혔듯 그의 디자인은 영국적인 스타일의 극대화에 그 특징이 있었다. 수트는 전통적인 영국 스타일, 새빌 로 스타일을 따른다. 과장없이 자연스러운 윤곽선, 조화와 균형. 아르마니처럼 극단으로 치닫지도, 비비안 웨스트우드처럼 아나키스트의 전복성을 구현하지도 않는다. 폴 스미스의 검은색은 튀는 디테일과 과감한 라인 없이 입은 사람의 윤곽선을 부드럽게 드러낸다. '옷이 사람을 입고 다닌다'는 느낌을 없애고서도 디자이너의 터치를 잊지 않는다. 소재에 집중하여 그 특성을 살리고 윤곽선을 살리는, 기본에 충실한 그의 디자인은 모즈 룩, 여피 룩이 그의 손을 거치면 영국이 존중하는 장인정신, 수공예, 예로부터 이어진 기본과 현대적인 감성의 표현으로 드러난다. 물론 아내 폴린의 도움이 있었지만(지대했지만) 그는 정식 리테일링 수업을 받지도 않았다. 지금도 사이클에의 열정이 대단하며 17세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사이클러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그의 작업실에 있는 사이클은 그 열정의 증거인 동시에 그의 디자인 철학의 단면을 보여준다.




무관한 듯한 사물이 디자이너의 머릿속에서 직조하는 창의력의 산물, 그것이 폴 스미스의 디자인이다. 역설적으로 영국적 스타일의 뛰어난 해설자는 미국인, 랄프 로렌이었다. 그에 대한 화답은 핀 스트라이프, 즈크 신, 비정형의 색상 배합을 담은 폴 스미스였다. 아르마니, 레이 가와쿠보, 랄프 로렌. 이들이 폴 스미스 런칭 당시 가볍게, 우아하게, 구조를 파괴하거나 혹은 클래식을 당시 상황에 맞추어 재현하던 이들이었다. 반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영국적인 감각-프린스 오브 웨일즈 스타라이프, 유니언잭, 이케아가 갖다 버리라고까지 한 꽃무늬까지!-에 기반을 둔 폴 스미스의 디자인은 어떠한가. 그는 전통을 존중하되 젊음을 잃지 않는다. 격식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비싸 보이는 제품이 아닌 비판감각과 균형감각을 지닌 제품은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인 멀티 스트라이프로 다시 태어났다. 한마디로 자신의 직관을 새로운 형상으로 살려낸 그의 아이디어 창조와 구현의 과정이 이 책에서 스치듯 펼쳐진다. 읽는 이가 품은 의문에 다라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천만 갈래의 과정을 안내해 줄 수도 있는 지도.




이 책에서 드러내는 것은 이러한 디자이너의 감수성과 지향점이다. 그는 컬렉터임을 부정하며 난독증을 그대로 활용한다. 준비된 종이 한 장 없이 애플에 강의하러 가고 언제나 머릿속에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펼쳐 보이게 해주는 것이 그의 난독증이었다. 데이빗 보위, 패티 스미스, 카오스 같은 사무실, 아이디어를 그대로 써두는 쌓여있는 너덜너덜한 포스트잇. 그는 가장 보스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인물인 가운데 타고난 협상가이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닌 서로의 의견의 균형점을 찾아간다고 밝힌 대목에서는 위트있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구현해나가는 동시에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담은 제품을 판매하는 능력이 보인다.




무언가를 관찰하여 깨닫고 그것을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손끝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디자인은 관찰력, 깨달음, 상상력, 창조력, 비판정신, 직관, 기억력, 호소력을 바탕으로 나타난다. 아무리 훌륭한 생각도 구현되지 않으면 상상에 그칠 뿐이며 자신의 그 어느 줄무늬 하나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홀로 나타나지 않은 것임을, 충분한 고민과 수정, 비판과 절제를 거쳐 나온 것임을 폴 스미스는 분명하고 간결하게 보여준다. 이 책에서 만난 그는 친절하고 조용한 안내자였다. 칼 라거펠트가 '패션의 관심은 오직 미래'라고 하였듯 폴 스미스도 '패션은 어제에 관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얼룩말은 꼭 파자마를 입은 말 같다'고 말하는 그를 보노라면 사람들이 입은 옷과 구두, 자동차와 생수병, 바지 끝단과 도시의 윤곽선이 조금은 다르게 눈에 들어온다. 눈에 담기는 풍광, 그것을 어느 순간에는 다시 꺼내어 차를 한 모금 삼키듯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분명 무언가를 머릿속에 담아두었다가 자기 생각대로 다시 창조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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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3-11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이 책 정말 궁금했는데 쥬드님의 리뷰로 정말 깔끔하고 쉬크하게^^;; 정리가 되네요. 눈호사 하고 갑니다.

Jeanne_Hebuterne 2013-03-18 17:57   좋아요 0 | URL
폴 스미스는 디테일에 퍼스널리티의 엣지를 살려 옴므 룩에도 브리티쉬의 스트라이프를 가미하기로 유명한 디자이너지요. 그의 센서티브한 감성이 포토그래퍼의 열정으로 되살아난, 크리에이티브란 무엇인가를 이번 스프링을 맞아 슬쩍 엿보기에 좋은 책입니다.
아, 보그체 따라하기 정말 힘들군요. 전 포기하렵니다. 가볍게 보려면 가볍게, 뭔가를 좀 더 보려면 비밀의 문이 열리는 신기한 책이어요. 블랑카님께서 읽으시면 꽤 흥미로운 리뷰가 나올 듯 합니다.

dreamout 2013-03-11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패션으로는 모르겠지만, 책으로는 폴 스미스의 이 책이 크리스틴 녹스의 '알렉산더 매퀸 : 이 시대의 천재' 보다는 나아 보이네요. ㅋ

Jeanne_Hebuterne 2013-03-18 12:32   좋아요 0 | URL
이 시대의 천재라니 알렉산더 매퀸이 궁금해지는 제목임에는 분명하군요!

다크아이즈 2013-03-18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뷔테른님하고 무척 어울리는 리뷰네요.^^*
저얼대로 이런 섬세한 코드와는 먼 저 같은 사람은 그저 신기할 뿐인 걸요.
폴 스미스를 소개한 님 글의 궤적을 찬찬히 훑는 중입니다. 님 글 읽으니 디자인은 과학이자 예술이군요. 머리 회전력도 좋고 창의력도 있어야 하네요.
새로운 한 주 잘 지내시어요. 에뷔테른님...~~~

Jeanne_Hebuterne 2013-03-20 23:25   좋아요 0 | URL
팜므느와르님, 폴 스미스의 정신없는 사무실과 제가 좀 잘 어울리기는 합니다 ^^*
화보집처럼 한번 쓰윽 훑고 덮어두었는데 다시 한번 보니 폴 스미스가 어떻게 작업하는지, 아이디어를 어떻게 활용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적용하는지가 보였어요. 어쩌면 이건 그의 디자인을 좋아해서 억지로 끼워맞춘 것일 수도 있겠으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폴 스미스는 분명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옷이나 잡화를(이렇게 말하니 참..하지만 맞지요! 구두, 지갑, 가방, 잡화. 1층 코너)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이 보였어요.

제가 뒤늦게 댓글의 댓글을 다는 지금은 이제 거의 주말을 향하고 있어요. 한 주 무사히 즐겁게 보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팜므 느와르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