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
일레인 페이절스 지음, 하연희 옮김 / 루비박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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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 관한 수많은 문서가 만들어지고, 저마다 정통성을 내세우며 논쟁하던 초기 기독교를 생각하면 하나의 경전, 하나의 신앙, 하나의 학문-신학만 외기둥처럼 홀로 남아 무너진 궁궐 터를 지키는 까마귀 마냥 저혼자 울어대는 지금의 기독교는 너무도 초라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 형태가 신에 의해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역사의 승자는 승리할 필연적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게 합리적 생각일 테고 마찬가지로 신학적으로 보자면 살아 남은 신이 가장 위대한 신인 까닭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회성과 고도의 정치성, 그것을 바치는 우연이 없었다면 현재의 기독교가 가능했을까? 지금과 모습을 달리했던 이 책이 소개하는 영지주의와 같은 기독교 행태는 사라지게 된 것이 과연 필연적인 이유일까?  

고도의 정치성과 사회성이란 건 당연히 조직의 형성을 하고 계율을 체계화 하고 계율을 사수하기 위한 처벌 제도를 마련하는 것 등을 포함할 것이다. 기독교는 공인되기 이전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에게 피를 요구했고, 공인되고 난 이후로는 그 계율에 어긋나는 신앙 행태를 고수하는 신앙인들의 피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 둘은 전혀 다른 성격의 피였지만 명목은 같았다. 주님을 위해, 기독교 전파를 위해. 목숨을 바쳐 형성한 교단이라서 그것을 유지하는 데도 그리 많은 목숨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반면 영지주의자로 불리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수행의 신앙을 원했고, 믿음보다는 깨달음을, 은총보다는 깨달음을 통한 하나님과의 합일을 갈구했다. 따라서 그들은 교단을 조직할 수도 없었고, 교단의 조직이란 자체가 그들의 신앙과 어긋나는 일이었다.  

인권의 기독교, 생태의 기독교, 생명의 기독교를 말하며 한기총 중심의 보수 교단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기독교 신앙 자체에 실망해 불교적 수행 방법을 차용하여 믿음을 유지해 가는 이들도 많다. 영지주의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마음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란 구절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이는 위대한 지혜와의 합일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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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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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 건너 온 동양판 <장미의 이름>. 노벨에 빛나시는 오르한 파묵의 <내이름은 빨강>은 살인 사건에 얽힌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각 장마다 자신의 입장에서 중심 사건을 진술하는 구조로 사건을 가되 도무지 사건의 전말을 쉽게 넘겨 짚을 수가 없다. 놀랍고, 무섭고, 신비롭다. 
 
스타일의 문제 - 모네 전을 보고 왔다. 전형적인 한국사람인 나는 인상파 말고는 그림을 모른다. 인상파라고 해서 아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인상파는 안다. 그거라도 안다고 말해야 하는 미술 교육 시스템에서 자나났기 때문이다. 모네는 모네의 그림을 그린다. 마네는 마네 식의 그림을 그렸겠지만 그들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서 유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다들 그런 식으로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림을 그리고 서명을 한다는 것은 진품을 가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내 그림'의 완성이라는 의미에서다. '이것은 내가 그린 그림 - 나의 스타일이다.'

반면 작품의 중심 인물 군을 이루는 터키 궁정의 세밀화가들은 서명을 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도 근본적으로 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세상을 인간의 눈으로 왜곡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서명은 불경죄다. 가장 훌륭한 화가는 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화폭에 옮기는 사람이다. 스타일이란 신의 세상을 곡해하는 해악이다. 

성상의 문제 - 이슬람 사원에는 성상이 없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는 십자가도 몇 있고 성화도 더러 있고 나무로 깎은 예수상도 있다. 성상은 성물이긴 하나 인간이 만든 것이다. 감히 신의 모습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건 그저 상징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인간은 점차 성상을 섬기게 된다. 불상의 손 위에다 담뱃재를 털어도 되는가?  

그림과 신성 모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과 살인, 살인자의 추적이 놀랍고, 무섭고,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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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전쟁 잔혹사 - 학벌과 밥줄을 건 한판 승부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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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입시에서 탈락한 학생들 중 수십 명이 자살을 시도했다. 대전에서는 입학시험에 낙제한 소년이 할복자살을 했고, 청진에서는 답안지에다 낙방을 하면 자살을 하겠다는 혈서를 쓴 학생이 결국 시험에 떨어지자 겁이 난 교장이 수시로 찾아가 학생을 위로했다.

일류 대학을 가기 위해 일류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국제중 시대의 이야기 같지만 놀랍게도 이것은 1930년대의 교육 풍경이다. 심각한 취업난에 조금 더 높은 학력과 조금 더 나은 학벌을 갖기 위한 제로섬게임의 역사는 참으로 유구했던 것이다.

2007년 수시전형에서 내신 1등급의 일반계 고등학교 학생은 탈락시키고 내신 8등급의 특목고 학생들을 합격시킴으로써 고려대가 사실상의 고교등급제를 시행한 사실이 알려졌다. 본고사 부활, 고교등급제 실시, 기여 입학 허가 등 지난 정권이 고수하던 3불이 흔들리자 아이러니하게도 강북의 학부모들이 먼저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나섰다. 이제 공교육이 정상화되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강남권과의 교육 격차를 줄일 수 있다. 국제적인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과연 그러한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만, 유사한 시대 상황도 아니고 유사한 경제 구조, 소득 수준도 아닌데, 끝을 알 수 없는 향학열은 대체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한국 사람은 정말 학구열 유전자라도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강준만 교수의 『입시전쟁 잔혹사』는 완고한 학벌 사회와 학력 인플레가 어디서 유래했는지, 그 구조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파헤쳐 들어간다. 매관매직이 횡행하던 조선의 파행적 과거 제도부터 전체 가계소비지출 중 교육비 비중이 최대치에 이른 2008년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육제도의 근저를 지탱해 왔던 구조적, 정신적 뿌리를 더듬어간다. 이 거스름의 과정은 물론 교육제도 개선, 학력 사회 완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학력 사회를 철폐하자는 식의 희망적인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강준만 교수 스스로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지경에 이렀다고 말한다.

교육이 입시에 맞춰짐으로써 학문적 발전과 상관없이 경쟁의 우위를 점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돼 버린 이유가 어디 있는지를 밝혀내지 않고서 대학 입시제도 개선과 같은 한시적인 교육 정책 변화는 쇼에 불과하며 이명박 정권에 이르러 급기야 퇴폐적인 미치광이 쇼가 돼 버린 교육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가.

이 책의 미덕은 시종일관 논설조의 말투로 이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능이 처음 실시되던 해, 8월이라 매미 소리도 한창이니 행여 듣기 평가에 지장이라도 줄세라, 매미를 잡으러 발 벗고 나선 교사들, 갑작스럽게 비행기가 뜨질 않아 당황스러웠다던 외국인의 술회, 집 나간 아들을 찾기 위해 ‘이제 과외 공부 안 시킬 테니 집으로 돌아오라’는 신문 광고를 낸 학부모. 일본 만화에서나 쓰일 법한 유머 장치들이 수십 년째 일사불란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 이 나라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무엇에 홀려 있고 거기서 깨어나기 위해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다.

강준만, 『입시전쟁 잔혹사』, 인물과 사상사, 값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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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보다 소중한 것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하연수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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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보다 소중한 것』

누가 더 쇠뭉치를 멀리 던지는지 지켜보며 어깨를 감싸 안던 감동의 동지들은 메달 집계가 다 뭐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갔다. 빨리 걷기, 노 젓기, 칼싸움에 전율하며 몽롱한 정신으로 보낸 2주일은 환상이었나? 기자 신분으로 시드니 올림픽에 참여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3주간의 시드니 체류기를 보내왔다. 42Km를 달려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이에게 보내는 찬사와, 해 질 무렵 운동장에 들어서 쓰러질듯 결승선을 지나는 꼴찌에 보내는 감동은 어떤 감성적 맥락으로 연결되어 있는 걸까.
무라카미 하루키, 하연수 역, 문학수첩, 값 9,800원.



『숲의 가족』

어둠의 신 네히가 동물들을 모두 데려간 뒤, 마을에는 개, 닭, 오리, 말, 소, 물고기, 심지어 모기 한 마리 남지 않았다. 어른들은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동물들이란 건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던 듯 살아간다. 동물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 마티와 마야는 어둠의 신 네히를 만나 마을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가 쓴 장편 값으로 살 수 있는 중편 소설.
아모스 오즈, 박미영 역, 창비, 값 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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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아름다움
심상정 지음 / 레디앙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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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소설이란 이름으로 픽션이 논픽션으로 둔갑해 팔리던 시절이 있었다. 소설의 시대에 실화란 다소 구질구질해 보였을 법도 하고 신뢰가 안 갔을 수도 있다. 당신은 그렇게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게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게 뭐냐, 당신의 성공담을 일면식도 없는 내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 그런데 재밌게도 이게 소설이 되면 묘하게 따뜻한 이야기가 되고, ‘이게 작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거래’라는 입소문이 붙어 ‘감동 실화소설’로 격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 소설이라는 이복동생일랑 제 놀던 물에서 맘껏 놀게 두고 온전한 자전들이 출판되고 있다. 납득될 만한 단서가 있어야만 하는 소설식 개연성과는 반대로 현실이란 건 사실 온갖 우연이 남발되는 장소가 아닌가. 드라마보다 드라마 같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우연은 삶의 오묘함에 감탄하게 만든다. 세상이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 너머 영적인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는 경외심마저 갖게 만든다.

소설이 주는 감동이 단순한 재미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시고기』 속의 아버지가, 전신마비 아들을 실은 휠체어를 밀고 보스톤 마라톤을 완주하는 호이트 부자에 관한 실화만큼 감동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실화를 읽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거기, 성공이든 실패든 나 역시 예외는 아닐 거라는 실감에 있을 것이다.

책 속의 인물이 이건희가 아니라 심상정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그 삶의 뒤에는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을 거라는 기대가 들 수밖에 없다. 자서전이나 평전도 근본적으로 책인 까닭에, 이렇게 살았더니 돈이 제 발로 찾아오더라는 따분한 자기자랑, 사실은 애비 유산 자랑 따위와는 본질적으로 기대치가 다를 수밖에 없다.

『당당한 아름다움』은 심상정이 쓴 심상정 이야기다. 따라서 평전은 아니다. 그러면 자서전인가? 의당 그래야만 하는데, 이 책은 자서전도 아니다. 이 책은 의정활동보고서 혹은 전직 국회의원의 낙선사례다. 지난 4년간 국회의원 심상정은 이렇게나 노력했고 그 결과 이처럼 대단한 실적을 쌓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선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유권자여 이 보고서를 읽고 4년 후에 올바른 판단하시길. 심상정이라는 아이템으로 이 정도의 책밖에 되지 못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출판 기획자의 역량과 감각 탓이다. 인간 심상정을 볼 수 있었던 큰 기회였는데 아쉽게 됐다.

자서전의 형식을 빌린 평전인데다, 구성 방식 또한 심상정이란 인물보다는 박정희에게나 어울릴 신화화 일변도다. 평전 속 간디는 지독한 싸움꾼이고 그의 갈등은 인도의 역사와 인류의 정신사를 뒤바꿀 갈림길이지만, 자서전 속 간디는 지독히 무능한 인간이고 그의 갈등은 책을 접어 던져 버리고 싶을 만큼 읽는 이를 짜증나게 만든다. 그런데 이 인물이 마하트마-위대한 영혼이란 칭송을 받게 되고 실제로도 위대해져 가되, 위대한 동시에 바보스럽다. 평전 속 밥 딜런은 시대의 대변자고 뒤틀린 시대를 또 한 번 비트는 재주 있는 시인이지만, 자서전 속 밥 딜런은 시대의 대변자이고 싶지도 않고 대변한 적도 없으며 신문을 보다가 이상한 사건이 있으면 가사를 쓰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면 그들은 정말로 사람들의 평과는 무관한 사람이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심상정의 자전에 대한 기대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정책을 입안하고 현 시대의 문제를 나열하고 다음 선거를 대비하는 내용을 원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대단해요, 하는 사회 각계 인사의 칭송을 바란 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 종잇장들이 이재오의 의정활동보고서라든가 정동영의 낙선사례라면 예사롭게 지나치거나 예사롭지 않게 집어 던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사롭지 않다. 단지 심상정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렇다. 그녀는 권위가 있기는커녕 세상의 온갖 권위와 맞서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대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권위를 주고 자신을 그 권위를 지키는 파수꾼이라 자처하게 만든다.

대선 참패 후 민주노동당은 대선 패배의 책임 추궁과 당 혁신을 위해 비상대책위를 구성하고 그녀를 위원장으로 추대한다. 선거가 목전인 때에, 지금쯤이면 지역구로 내려가 유권자를 만나야 할 때에 그녀에게 달가운 일일 수 없다. 그녀는 먼저 당을 수습하기로 한다. 그러나 끝내 분당. 아무런 성과 없이 지역구로 내려 온 그녀에게 다시 아버지의 부고라는 시련이 다가온다. 당선하는 거 보실 때까지 살아 주십사 약속했었다. 당선하고 찾아오라 말씀하시던 아버지였다. 심상정이라는 이름에 기대를 걸고 찾아 든 자원봉사자들이 그녀의 빈자리를 메운다. 점차 줄어드는 격차, 필요한 건 시간이다.

선호도, 이미지, 그런 건 애시 당초 상대가 안 됐다. ‘빨갱이 데모꾼’들이 모인 당이라 하더라도 심상정이란 이름만은 믿을 수 있지 않나. 하지만 그녀의 당선에 가장 큰 걸림돌은 애석하게도 유권자다. 그들이 원하는 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안정된 잠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공전의 아파트값 폭등으로 몇 해 전 이웃 마을 사람들이 한 몫 챙겨 갈 때 생겨난 복통을 치료하는 일이다. 그녀의 공약엔 애석하게도 뉴타운이 빠져 있다.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은 뉴타운 세 글자다.

그녀는 졌다. 루쉰이 입을 빌려 그녀는 다음을 기약한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녀의 확성기가 되는 날을 기다리며 그녀는 지금 지역공동체로 내려가 있다.

이 얼마나 눈시울 찍어 내려야 하는 이야기인가. 그렇더라도 이 책은 지루한 부분이 많다. 안 읽어도 그만인 서론, 비슷한 본론, 판박이 결론으로 이어지는 ‘내가 아는 심상정’과 같은 콘텐츠는 이 책을 이도저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모두가 지지해 주신 국민 여러분의 성원’ 투의 문장이 난립하면서 당원 홍보지를 읽고 있었나 착각하게도 만든다. 하지만 읽어야 한다. 스포츠채널에서 두고두고 방영하는 ‘감동의 그 순간’이 〈우생순〉의 감동을 능가하듯, 심상정에게 걸어볼 수 있는 희망은 이 책을 능가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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