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행복해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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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게 만드는 상황도 상황이지만, 상황을 만들어가는 하나하나의 문장이 주는 재미는 성석제가 쓴 어느 책이든 한 권만 집어 들면 계속해서 다음 책을 찾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가 낸 책을 다 읽기 전에는 다른 작가의 책은 그야말로 ‘안 웃겨서’ 못 읽는 중독증상까지 보이게 만들었다. 『궁전의 새』에 부록처럼 실린 작가가 쓴 작가 연보는 성석제 소설의 번외편이어서 이 재미난 이야기들이 작가의 실제 삶과도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는 인간적 친근감까지 갖게 만들었었다.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에서부터였던가, 성석제 소설에 재미가 없어졌다. 2006년 작 『참말로 좋은날』은 급기야 한물 간 코미디언이나 쇠락해 가는 격투기 선수를 연상하게 했다. 노련함은 남아 있어, 무대 혹은 링에서 버텨 낼 운영 능력은 있으되, 기대했던 재미는 전혀 주지 못했다. 폭발적인 힘도, 보는 이를 감동하게 만드는 열정도, 하릴없이 세월 탓만 하게 했다. 입담과 문장이 건재하니 힘 안들이고도 몇 편의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으되, 문장만으로 마음이 흡족해질 수 있다면 광고카피 모음집도 좋은 소설책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성석제의 새 책 『지금 행복해』는 그가 쓰는 새로운 단편은 그 전에 출간된 단편집 어디에다 끼워 넣어도 이질감 없이 끼어들 거라는 재미없음에의 확신을 굳어지게 했다. 여행을 주제로 한 초반 세 편은 사실 웃기지도 않고, 웃음을 위해 몰고 가는 상황은 민망하기만 하다. 소재와 상황 설정이 비슷해 습작기의 실험 같기도 하고,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리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니 평론가들이 아직도 물고 늘어지는 입담이라는 특기도 크게 어필되지 않는다.

소설의 본질이 그런 것일지 모른다. 자투리 시간을 메우기 위해 일회성 재미만 줬으면 됐지 그 이상은 철학이나 종교 서적에서나 바라야 하는 건지 모른다. 근래 성석제 소설은 소설가 스스로 소설에 대한 한계 규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 대한 기대를 끝내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가 감각적인 형상화 이면에 삶의 내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역사와 미약한 개인이 대비되며 돈키호테 같은 인간이 역사에 뛰어들어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하면서도 끝내 역사의 일부가 되어 가는 『인간의 힘』은 성석제가 줄 수 있는 웃음과 문장의 재미, 게다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까지 안겨주었다. 재주 없는 이가 세월을 업고 대가라는 이름을 얻어 선문답이나 해가는 게 보통인 상황에서 대중적 재미와 깨달음을 동시에 줄 수 있는 사람의 선두는 단연 성석제이다.

하지만 여행 소재의 세 편을 지나면, 『인간의 힘』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른 면에서 성석제 소설 중독을 고수하게 만든다. 표제작 「지금 행복해」는 성석제라는 이름을 떼고 보면 신인 작가의 수작처럼 보일 만큼 그간 성석제의 감성, 문체와 거리가 있다. 전개가 빠른 거야 누누이 있어 왔던 일이고, 문장이 전처럼 물고 늘어지되 한결 간결한 느낌이다. 이런 간결함은 「톡」에서 크게 부각되는데, 이 소설은 인터넷 링크에 따라 맥락 없이 이동하는 이야기들이 끝내 어디선가 물고 물리며 하나의 하이퍼텍스트 소설을 만들어 낸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이 단편은 다른 단어를 클릭하면 전에 보던 화면과 단절된 이야기가 새로 시작되듯 난데없이 시작했다 끊기기를 반복하며, 이대로 계속해도 좋고 그만해도 좋은 모호한 감성을 전달한다.

「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은 내용상 반대되는 맥락에서 『인간의 힘』과 연결된다. 다들 바보로 여기는 인간이 자신만 아는 신념을 갖고 역사를 향해 돌진한 게 『인간의 힘』이었다면, 이 작품은 다들 천재로 아는 인간이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면서 예술 세계를 계속해 나가는 소설이다. 결국 두 작품 다 인간이 살아가는 힘이 무언가,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결코 작지 않은 단서라 할 수 있다.

드라마도 아니고, 독자가 작가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가 더 잘 알다시피 중독된 사람은 더 큰 강도를 원한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길 바라며 오늘도 서점을 헤매는 성석제 중독자들에게 아찔한 글 한편 남겨 주길 바란다. 『지금 행복해』는 분명 이전 소설집보다 강한 중독성이 있었지만, 역시나 중독자의 바람은 끝이 없다. 더 강력한 중독성으로 무장한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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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라의 집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조남선 옮김 / 뿔(웅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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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히 노벨상을 수상하면 책도 많이 팔리겠거니 생각해 왔지만, 르 클레지오의 수상 소식을 접하며 올해는 예외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의 장편소설『조서』는 책 읽기의 쓴 맛을 톡톡히 보게 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난해한 기법이 난해한 채로 드러나기에 내가 지금 무얼 읽고 있는 건가 혼란스럽고 그의 지적 수준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경지였으며, 번역가가 문장을 충분히 이해했다면 이런 억지스런 문장은 나오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게 하는 소설이었다.

노벨상을 달고 다시 발매된 르 클레지오의 소설들 중에서 『오로라의 집』을 택한 것은 단연코 힘든 독서 과정 때문이었다. 이 책은 131쪽에 불과하고, 페이지 당 글자 수도 많지 않다. 단편소설 두 개를 단행본으로 엮은, 대 놓고 장삿속을 드러내지 않고서야 이토록 뻔뻔하게 만들기도 어려운 책이다. 그러나 책의 분량과 독서 시간은 비례하지 않는다. 르 클레지오의 소설은 출판사에서 흔전만전 시상하는 문학상 수상작 속의 시간과 같을 수 없다. 르 클레지오의 소설 속 시간은 너무도 천천히 흐르고 때로는 아예 멈춰 버린다.

“오늘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단번에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전부 지워버렸고, 예전의 느낌과 현재의 느낌이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어떤 공백, 훼손, 갈 곳 잃은 답답한 거북함과 고통스런 느낌만을 남겨 놓았다.”

이 문장은 개발로 인해 변해가는 옛 동네를 묘사한 문장이지만, 외부 세계에 대한 묘사가 없다. 수사도 없고 감성을 자극하는 단어도 없다. 하지만 이 문장은 분명 외부 세계를 적합하게 묘사하고 있고, 동시에 추억에 대한 감수성을 자극한다. 이런 문장들이 연결되며 책 전체를 끌어간다. 사건은 진행되지만 독서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독서가 행위가 아니라 상태가 되면 문장의 시각적인 깊이에 깜빡 정신을 놓기도 하지만, 어느 때부터는 책읽기가 힘겨워진다.

오로라의 집은 주인공 에스테브가 기억하는 첫 번째 집이자 처음으로 본 신비로운 집이다. 그 집은 놀이터이자 공포를 자극하는 장소이자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 다른 차원으로 데려다 줄 문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에스테브는 어느 순간 자신의 전부일 것만 같았던 그 집에 아무런 흥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한 순간의 각성이었다.

“내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두들 알 것이다. 평범한 대화의 주제, 텅 빈 공허한 주제”

자신이 성장했다고 느끼는 순간 에스테브는 자신 안에서 사라진 반쪽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사라진 것을 회복하고 싶은 마음에 오로라의 집으로 향하는 언덕을 오른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한 상실과 향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공간과 의식은 너무도 긴밀하게 맞닿아 있어서 ‘인간성 회복’ 유의 교훈적 가치로 마무리될 수 없다. 회복은 불가능하다. 현실의 겉모습이 바뀌는데 오로라의 집만 예전 그 모습일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이미 성장했고 반쪽을 잃었으며, 떠나간 반쪽은 기억도 함께 가져가 버렸다.

내게 있어 르 클레지오는 이 정도 두께가 적당하다는 것을 절감하며 책을 덮는다. 하지만  전해진 감성의 깊이는 몇 권의 책을 읽은 것 같다. 이래저래 한국과의 인연이 깊어 수상 소감에서도 한국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던데, 이 책을 인연으로 르 클레지오와의 인연이 깊어지는 독자들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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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남긴 한 마디 - 아지즈 네신의 삐뚜름한 세상 이야기 마음이 자라는 나무 19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이종균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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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바둑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를 지독히도 미워하는 아이들이 그도 모르는 그의 별명을 붙여놓았던 것이다. 아이들은 그와 함께 바둑판이란 녀석의 못난 점에 대한 우스갯소리를 떠벌이며 웃고는 했다. 그러면 바둑판도 함께 웃었다, 도대체 걔가 누구냐고 집요하게 물으면서.

『개가 남긴 한마디』는 터키 풍자 문학의 거장 아지즈 네신의 콩트 열다섯 편을 엮은 책이다. 그리고 사진작가 이지누의 『뭐라, 내한테서 찔레꽃 냄새가 난다꼬』는 산골 마을에서 일 백년 세월 동안 농사만 짓고 살아온 노인의 이야기로 풍자와는 전혀 관계없는 책이다.

『개가 남긴 한마디』는 보편적인 사회 구조와 사람의 성향을 풍자하고 있는 까닭에 구체적인 풍자 대상을 지목하기는 쉽지 않지만 특정 계층, 집단, 특징적인 성격, 등 우리 주변의 인물들과 쉽게 대비해 볼 수 있다. 거기에서 두 번째 풍자가 생겨난다. 하지만 그때의 풍자는 더 이상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다.

한 스파이가 왕을 비웃는 농담을 접수한다. 그는 왕에게 가서 그 우스갯소리를 들려준다. 눈물까지 흘려대며 박장대소하던 임금은 그건 아마도 총리 이야기 같으니 그가 듣지 않게 조심하라고 주의시킨다. 스파이는 총리에게 농담을 들려준다. 총리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아마 그것은 내무부 장관의 이야기 같다고 말한다. 내무부 장관은 외무부 장관의 이야기라 하고 외무부 장관은 자신의 차관 이야기라고 한다.

자신의 별명을 알아버린 ‘바둑판’의 처지라도 된 듯 이제껏 다른 사람을 떠올리며 웃던 웃음소리는 내 마음의 ‘불편한 진실’이 되어 돌아온다. 칼집에서 칼을 빼어 들고 적을 향해 돌진하듯 쉴 새 없이 책장을 넘기다 보면 문득 대체 누구를 베려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누굴 향해 겨눈 칼이었던가, ‘개가 남긴 한마디’는 내가 내 심장을 향해 빼어든 칼이었다.

『뭐라, 내한테서 찔레꽃 냄새가 난다꼬』는 사진가 이지누가 일평생 농사만 지어 온 한 노인의 말년을 글과 사진으로 옮긴 책이다. 성주시에 사는 문상의 옹은 담배를 끊은 지 75년, 농사지은 지 80년이 넘은 노인이다. 경성에 모던 보이 열풍이 불던 1930년대, 노인은 청년 시절을 보냈다. 동란이 났을 때 노인은 이미 장년이 되어 있었으며, 전쟁의 바람도 소소하게 불던 산간 마을에 새마을 열풍이 불었을 때는 이미 노년이었다. 일백년을 살아온 사람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살까.

작가는 생각날 때마다 뜬금없이 밤을 달려 노인을 찾아 간다. 동틀 녘 노인의 집 앞마당에 들어서면 노인은 벌써 일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니가 우얀 일이고, 밤에 왔디나, 집은 다 핀나 우야노?” 집안 안부까지 묻고 나면 노인은 담장 밖 일터로 나선다. 논을 살피고 약나무를 하고, 오며 가며 먼저 간 아내의 무덤을 어루만진다. 괭이, 삽, 낫만으로 하루치 농사일을 마치면 소와 함께 기나긴 저녁 산책을 나선다. 노인에겐 시계도 없고 시간도 없다. 10분이면 갈 길을 30분도 넘게 걸어가는 노인의 뒤를 말없이 따르며 작가는 노인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그가 맡았다던 노인의 찔레꽃 체취가 그의 문장마다 사진마다 서려 있는 듯하다. 볏단 냄새, 흙냄새, 주린 배를 움켜쥐고 끓이는 한밤의 라면 냄새까지 맡아진다.

속도와 소비에 떠밀려 살아가는 일상 틈틈이 펴 본 노인의 삶은 아주 먼 신화 속 이야기 같아 보인다. 초침을 세어가며 재게 걸어봤자 돌아보면 제자리인 도시 노동자의 일상이 노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이 두 삶이 하나의 영상에서 비춰진다면, 내 삶 역시 신랄한 풍자의 한 토막이 되지 않을까.


아지즈 네신, 이난아 역, 『개가 남긴 한마디』, 푸른숲, 값 8,900원.

이지누, 『뭐라, 내한테서 찔레꽃 냄새가 난다꼬』, 호미, 값 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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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죽었다
셔먼 영 지음, 이정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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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2007년 기준, 한국 성인의 25%가 일 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 출판계의 불황이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라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질 거라 기약할 수나 있겠는가. 책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며 책 관련 전문가들은 일제히 새로운 매체의 탄생을 예고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책의 시대는 끝난 것인가?

인터넷이 종이 매체를 대신할 거라 했지만, 인터넷 홈페이지나 블로그는 책의 시장성을 검증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대형 서점으로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는 신간 서적들은 눈에 띄는 서가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자리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싸움에 새로이 뛰어든 신생 출판사들의 이름도 부쩍 자주 눈에 띈다.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열정적인 책 애호가임를 자처하는 미디어 전공 교수가 책의 죽음을 알리는 책을 출간했다. 작가는 책을 진정한 책과 안티 책, 책이 아닌 것으로 구분한다. 새 책이 쏟아져 나오는 자체가 책이 죽었다는 증거다. 안티책들의 서점 공략은 숨이 끊어진 책에다 쏘아대는 마지막 확인 사살이다. 책의 형태를 지닌 새로운 미디어가 전통적 책의 개념을 전복하며 책의 자리에 들어섰다.

안티책과 진정한 책은 무엇이 다른가? 작가는 진정한 책의 요건들을 나열하면서 책의 역할을 재확인한다. 지금의 출판 시장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사상’과 ‘진실’로서의 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 거듭나야 하는지 내다본다. 물론 새로운 형태는 기술적 형식을 말한다. 책만은 기술에 관한 예외적 범주로 남겨두고 싶은 사람은 이 부분에 가서 저자의 생각과 부딪치기 시작한다. 이거 출판계의 뉴타운 아니야? 이 순간이 이 책의 진가가 발휘되는 시점이다. 책이란 무엇인가, 책은 사상을 담아야만 하는가, 책의 형태는 진보해야 하는가? 이 뿐만 아니다. 누가 저자가 되는가, 책의 가격은 적당한가, 서점의 대형화와 책의 내용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영화를 비롯한 타 장르나 산업에 비할 때, 책 자체가 가지고 있는 권위에 기대어 비판의 소리에 귀를 닫아 왔던 출판계에 독자의 입장에서 던질 수 있는 가능한 질문들이 모두 이 책 안에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책을 내겠다고 결정한 출판사 사장이 어떤 사람인지, 이 책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셔먼 영, 이정아 역, 눈과마음, 값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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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발터 부르케르트 지음, 남경태 옮김 / 사계절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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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이 되는 기본 요소들과 그 구조를 상정하여 그들 철학의 재료로 삼지만, 그 원소, 혹은 요소들은 어디에서 온 것이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존재했던 것, 주어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소여 상태는 그리스 철학의 대 전제가 되며, 고유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서양 철학사 입문의 필수 코스 격인 코플스톤 신부나 사하키안 저서들 역시 그리스 철학 이전의 철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스 철학은 서양 철학사에서 ‘이미 주어져 있어서 더 이상 거슬러 올라 갈 수 없는 상태’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태동하던 당시의 주변 정세 속에서 그리스 철학과 문화의 형성 과정을 다룬다. 수메르에서 시작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국들이 그리스 문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동방의 대국이 벌인 정복 전쟁 속에서 그리스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아는 것이 그리스 문화의 정체성을 밝히는 첫 걸음인 셈이다. 또한 전쟁에서 패한 나라에서 유입되어 들어온 사람들이 그리스의 과학과 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도 말해 준다.

알파벳 문자의 유래, 호메로스의 작품에 들어 있는 동양 정서, 오르페우스교의 전파 등 각 장에서 설명하는 내용들은 그리스 문화가 서양 문화의 원천이긴 하되 막다른 골목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정석 수학의 집합 부분 같이 철학사의 선두에 서서 기어이 철학사 책을 서가 깊숙한 곳으로 밀어내게 만드는 힘을 지녔던 그리스 철학을 이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이 책을 안 사고 못 배기게 만드는 이유는 내용이 너무 길지 않다는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인문 서적 한 권을 읽었다는 뿌듯함까지 느낄 수 있다.


발터 부르케르트, 남경태 역, 사계절, 값 1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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