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판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바둑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를 지독히도 미워하는 아이들이 그도 모르는 그의 별명을 붙여놓았던 것이다. 아이들은 그와 함께 바둑판이란 녀석의 못난 점에 대한 우스갯소리를 떠벌이며 웃고는 했다. 그러면 바둑판도 함께 웃었다, 도대체 걔가 누구냐고 집요하게 물으면서.
『개가 남긴 한마디』는 터키 풍자 문학의 거장 아지즈 네신의 콩트 열다섯 편을 엮은 책이다. 그리고 사진작가 이지누의 『뭐라, 내한테서 찔레꽃 냄새가 난다꼬』는 산골 마을에서 일 백년 세월 동안 농사만 짓고 살아온 노인의 이야기로 풍자와는 전혀 관계없는 책이다.
『개가 남긴 한마디』는 보편적인 사회 구조와 사람의 성향을 풍자하고 있는 까닭에 구체적인 풍자 대상을 지목하기는 쉽지 않지만 특정 계층, 집단, 특징적인 성격, 등 우리 주변의 인물들과 쉽게 대비해 볼 수 있다. 거기에서 두 번째 풍자가 생겨난다. 하지만 그때의 풍자는 더 이상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다.
한 스파이가 왕을 비웃는 농담을 접수한다. 그는 왕에게 가서 그 우스갯소리를 들려준다. 눈물까지 흘려대며 박장대소하던 임금은 그건 아마도 총리 이야기 같으니 그가 듣지 않게 조심하라고 주의시킨다. 스파이는 총리에게 농담을 들려준다. 총리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아마 그것은 내무부 장관의 이야기 같다고 말한다. 내무부 장관은 외무부 장관의 이야기라 하고 외무부 장관은 자신의 차관 이야기라고 한다.
자신의 별명을 알아버린 ‘바둑판’의 처지라도 된 듯 이제껏 다른 사람을 떠올리며 웃던 웃음소리는 내 마음의 ‘불편한 진실’이 되어 돌아온다. 칼집에서 칼을 빼어 들고 적을 향해 돌진하듯 쉴 새 없이 책장을 넘기다 보면 문득 대체 누구를 베려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누굴 향해 겨눈 칼이었던가, ‘개가 남긴 한마디’는 내가 내 심장을 향해 빼어든 칼이었다.
『뭐라, 내한테서 찔레꽃 냄새가 난다꼬』는 사진가 이지누가 일평생 농사만 지어 온 한 노인의 말년을 글과 사진으로 옮긴 책이다. 성주시에 사는 문상의 옹은 담배를 끊은 지 75년, 농사지은 지 80년이 넘은 노인이다. 경성에 모던 보이 열풍이 불던 1930년대, 노인은 청년 시절을 보냈다. 동란이 났을 때 노인은 이미 장년이 되어 있었으며, 전쟁의 바람도 소소하게 불던 산간 마을에 새마을 열풍이 불었을 때는 이미 노년이었다. 일백년을 살아온 사람은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살까.
작가는 생각날 때마다 뜬금없이 밤을 달려 노인을 찾아 간다. 동틀 녘 노인의 집 앞마당에 들어서면 노인은 벌써 일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니가 우얀 일이고, 밤에 왔디나, 집은 다 핀나 우야노?” 집안 안부까지 묻고 나면 노인은 담장 밖 일터로 나선다. 논을 살피고 약나무를 하고, 오며 가며 먼저 간 아내의 무덤을 어루만진다. 괭이, 삽, 낫만으로 하루치 농사일을 마치면 소와 함께 기나긴 저녁 산책을 나선다. 노인에겐 시계도 없고 시간도 없다. 10분이면 갈 길을 30분도 넘게 걸어가는 노인의 뒤를 말없이 따르며 작가는 노인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그가 맡았다던 노인의 찔레꽃 체취가 그의 문장마다 사진마다 서려 있는 듯하다. 볏단 냄새, 흙냄새, 주린 배를 움켜쥐고 끓이는 한밤의 라면 냄새까지 맡아진다.
속도와 소비에 떠밀려 살아가는 일상 틈틈이 펴 본 노인의 삶은 아주 먼 신화 속 이야기 같아 보인다. 초침을 세어가며 재게 걸어봤자 돌아보면 제자리인 도시 노동자의 일상이 노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이 두 삶이 하나의 영상에서 비춰진다면, 내 삶 역시 신랄한 풍자의 한 토막이 되지 않을까.
아지즈 네신, 이난아 역, 『개가 남긴 한마디』, 푸른숲, 값 8,900원.
이지누, 『뭐라, 내한테서 찔레꽃 냄새가 난다꼬』, 호미, 값 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