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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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열었더니 김치와 양파와 계란 하나뿐이다. 근사한 만찬을 기대하고 연 냉장고는 아니지만 눈앞에 차려지고 있는 초라한 밥상은 눈을 감고 먹는 한이 있더라도 끝끝내 외면하고만 싶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삼십대 초반 하루키는 달리기를 시작한다. 위대한 소설가는 못 되더라도 좀더 재능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다분히 그의 기준으로) 부족한 재능이 소진되는 시점을 최대한 뒤로 미루기 위해 그는 달리기를 선택한 것이다. 긴 금발을 뒤로 묶고 늘씬한 다리로 자신을 추월해 가는 20대 여성처럼 뒷사람에게 발자국 대신 자부심을 남기고 가는 러너는 끝내 못 되었지만, 그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달리고 있다.

타고난 재능도 재능을 이끌어낼 능력도, 특별날 것 없는 재료들이 그나마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냉장고 속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 느낀다면 우리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남은 재료를 한데 섞어 부족한 대로 미지의 요리를 만들어 볼 것인가, 개중 가장 정붙일만한 재료에 집중할 것인가, 냉장고 문을 부술 듯 닫아 버리고 곡기를 끊을 것인가?

소설을 쓰기 위해 원고지를 처음 구입한 날부터 10여 권의 장편 소설을 낸 세계적 작가가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처음 운동화를 구입한 날로부터 스물여섯 번째 마라톤 풀코스 완주를 앞두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쓰기 위해 달리고 달린 것을 써내려갔다. 부족한 재료로 끼니를 연명해야 할 군상들에게 하루키의 문학여정이 전해주는 울림이 적지 않다.

무라카미 하루키, 임홍빈 역, 문학사상, 값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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