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불사른 곳에서는 결국 사람도 태워 죽일 것이라는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예언은 그가 나고 자란 땅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라디오, 영화, 설교, 수업을 검열하기 시작한 나치 독일은 미국의 스윙, 재즈 음악과 러시아의 포크 음악을 금지시키더니 급기야 비독일적이라 간주된 책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한다. 1933년 대학생들과 나치돌격대들은 독일 전역에서 금서더미를 쌓아 놓고 불을 지피게 되고, 그로부터 8년 뒤 히틀러는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장애인 20만 명을 학살한다. 이 학살 수업의 경험은 이후 유태인 대학살에 유용하게 쓰이게 된다.
“젊은이가 위대한 이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나라의 국민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라는 히틀러의 물음이 어떤 답안을 두고 있었는지는 오직 히틀러만이 알고 있었다. 700만이 넘는 독일 10대 아이들에게 베르사유 체제의 독일은 무능하고 부끄러운 부모 세대의 유산이었다. 아이들은 희망을 원했고, 히틀러는 이 아이들에게 위대한 이상을 제시했다. 세계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선택받은 아리안 혈통이여, 전면적으로 총화 단결하여 세계를 지배하라! 히틀러의 양자들이 배양되는 캠프의 입구에는 “독일을 위해 목숨을 바치러 태어났다”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히틀러의 아이들』은 나치로 되어간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줌을써, 파괴적인 역사가 젊은 사람들에게 강요했던 역할과 그로 인해 그들이 어떻게 변해갔고 평생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었는지 말해주고 있다. 부모를 밀고하고 친구를 죽인 아이들은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했을까? 그 책임은 과연 어디에서 물어야 하는 것일까?
테라스만 보고도 아파트 평수와 가격대를 헤아리면서도 학교 등급과 등수 없이는 사람의 가치를 헤아릴 줄 모르는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황석영의 책을 알리기 위해 대중 가수의 이름을 빌려야 하는 시대의 아이들에게 과연 문화적 가치란 게 어떤 의미로 들릴지, 그 대답은 누구에게 들어야 할까?
세계 전쟁, 홀로코스트는 답안으로 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히틀러가 가진 협소한 세계관으로 예측하기에 세상은 너무도 불확실했던 것이다. 1941년 나치 보고서 “범죄의 위험에 빠진 젊은이들”은 “미국 스윙 음악을 듣고 스윙 댄스를 추며 하일 히틀러 대신 스윙 하일을 외치는” 젊은이들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나치식 범죄 용어로 말하자면 이들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연합군의 압도적인 공세로 전장이 위태로워지는 것과 똑같은 속도로 완고하던 히틀러식 국가중심주의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균열이 깊어 가고 있었다.
지금도 역시 거리에는 스윙의 자식들이 넘쳐나고 있다. 앳된 소녀들이 이명박은 물러가라는 무지막지한 소리를 질러대며 광화문 거리를 질주했고, 몇몇의 아이들은 일제고사를 돈성건희, 소망명박의 팬클럽인 뉴타운스의 브루마불 게임쯤으로 여기고 현장학습을 떠났다. 저항의 권리를 발산하는 ‘범죄에 빠진 아이들’이 아니라도 지금의 기업 정부는 내부적 모순으로 무너질 것이다. 그들이 작성한 불온서적 리스트는 그 자체가 상업자본의 마케팅 수단이 되었고, 그들이 잡아들일 허위사실 유포자들의 거짓말들은 또 그 자체로 하나의 사실이 되어 회자될 것이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아이들』이 품고 있는 무한한 풍자와 상징성을 알아보고 기꺼이 이 책을 금서로 채택해 줄 의인이 정부 안에 하나라도 있다면 이 땅을 소돔으로 만들지는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 없었지만, 군대든 어디든 제발 그래만 준다면 출판사 재정 확보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인 즉, 금서 목록으로 책장 하나가 가득 찰 그날까지, 이땅에 살고 있는 히틀러의 후예들이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