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 - 젊은 세대를 위한 마르크스 입문서
강유원 지음, 정훈이 그림 / 뿌리와이파리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몇 달째 창문을 닫고 있다. 올해 초부터 조금씩 그 냄새가 풍기는 듯싶더니 4월쯤 들어서 부턴 지독한 악취가 창문 밖을 서성인다. 밖을 나설 때도 이 지독스런 악취가 코를 찔러 대니 도로 들어오기 일쑤이다. 그렇다. 대한민국에 썩어가는 냄새가 풍긴다. 자본주의가 썩어가는 냄새가. 지독하게. 어느 틈엔가 나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집어 들고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백년도 더 전에 탄생한 불온한 제목의 책을 다시 집어든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집게 만들었을까.

생소하기만 하던 비정규직이란 단어가 이제는 익숙해졌기 때문이야. 장밋빛 환상만을 심어주던 증권사들의 거짓놀음에 속아 자살을 결심한 어느 한 아주머니의 슬픈 사연을 들어서야. 그리고 모든 국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쇠고기파동을 일으킨 정부가 미워 서지. 그래. 아마도 그런 까닭이겠지. 자본주의의 폐해가 심각해질수록 백 년 전에 죽은 마르크스가 다시 나와 우리에게 외친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이 선동적인 문구를 읽고 있노라면 가슴속의 어느 한 부분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끓어오른다. 비단 나만이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그 자본이란 것을 손에 쥐지 못한 자들은 모두 낙오자요 프롤레타리아니 말이다.

특정한 소수의 인원을 제외한 우리 모두는 노동자 계급인 프롤레타리아다. 과장이든 부장이든 혹은 영세한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는 사장이든 직종 따위는 상관없다. 막대한 부를 움켜쥐고 있는 소수의 부르주아지들로부터 자신의 삶이 좌우된다면 그들은 모두 프롤레타리아인 셈이다. 결국 봉건제도 이후 또 다른 신분계층의 탄생이다. 비정규직일지라도. 갑자기 해고당할지라도. 설령 무임금일지라도 그들의 비위를 맞춰야만 하는 이것은 현대판 노예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자본이라는 숨통을 움켜쥐고 우릴 좌우로 흔들어대는 꼴이란. 자본주의는 곪기 시작했다.

그 증거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밤낮으로 일해도 받는 건 언제나 생각보다 턱없이 부족한 월급들. 이것을 두고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고용주들은 노동자가 가까스로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월급을 준다고. 그래야 지속적으로 일을 할 테니 말이다. 이마저도 산업화의 발달로 인해 직장을 잃게 되니 자본의 속성은 냉정하다. 사람과 사람간의 인정과 약속 따위는 관계없다. 오로지 좀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함일 뿐이다.

최근 우리사회는 급격한 분노를 경험했다. 잉여가치를 높이기 위해 국민이 반대하는 FTA를 졸속으로 밀어붙인 것과 한술 더 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FTA 당근 격으로 내어놓은 정부의 자본주의적 발상은 국민을 경악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GDP를 끌어올리고 경상수지적자를 탈피하기 위해선 메카닉적인 사고방식이 동원될 수밖에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크나큰 결점이란 것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결국 사람위에 자본 있는 셈이다. 이것을 두고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부란, 부르주아지의 행정기관이라고. 마르크스의 말이 백년을 관통해 지금까지도 울려 퍼지고 있다.

소련이 붕괴되자 많은 지식인들은 마르크스는 죽었다고 기고했다. 중국이 공산주의를 탈피하는 모습을 두고 마르크스는 틀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도 거듭 거듭 죽었다고 선언하고 또 선언한다. 하지만 그의 이론이 지금도 들어맞는 것을 보며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계속 그렇게 죽었다는 것을 선언할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자본주의가 죽어가는 것을.

이 불온해 보이는 공산당 선언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공산당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단 공산당 선언은 소련의 그것과 중국의 그것과는 전혀 틀린, 프롤레타리아트의 유토피아를 말한다.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계급의 혁명이 일어나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를 몰아내고 계급의 불평등 없는 모든 노동자가 국가를 이끌어가는 시스템이다. 1인 독재 하에 운영되던 소련과 중국은 그렇기에 마르크스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고 총살하는 그것도 마르크스가 주창하던 공산주의와는 다르다. 자본주의 산업을 도구로 삼아 모든 사람들이 소유하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소유할 수 있는 선한사람의 사회가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 사회인 것이다. 소련과 중국은 마르크스주의를 국민 착취의 도구로 삼아 악용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마르크스의 사상은 낡은 것이라고 치부되는 것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 못한 사람들의 하찮은 주장일 뿐이오, 일말의 대꾸조차 할 가치 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그렇기에 오늘날에도 마르크스의 이름은 사람들 속에 회자되는 것이다.

그는 부르주아를 무조건적인 비판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산당 선언을 자세히 읽어보면 자본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낳은 부르주아도 전 세계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이 있고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봉건주의 타파. 천년의 역사를 이어오던 촘촘히 나열된 신분제의 온상. 그 봉건주의의 아성을 무너뜨린 부르주아들의 혁명은 가히 칭찬할 만하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에도 귀족이 있고 양반이 있으며 평민이 있고 노예가 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부르주아들도 자신들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위해서 자본주의를 더욱 심화시키며 자본가진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이분법 화시켜 또 하나의 계급 제를 양산화 시킨 것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세계의 경제가 서브프라임이라는 악령을 만나 시름시름 앓고 있는 것이 신호탄일까. 세계화 세계화만 부르짖다가 결국 돌고 돌던 자본이 어느 한축에서 끊겨 전 세계가 끊긴 줄만 붙잡고 아우성이다. 자본주의의 폐단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자본가들은 살아남고 노동자계급만 죽어난다는 거다. 애초에 시작부터가 불평등한 관계였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신기하게도 이런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말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고. 봉건주의가 자본주의를 낳았듯이,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를 필연적으로 낳을 수밖에 없다고 그가 말한다. 지금은 뭉쳐지지 않는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일지 몰라도 종국에 가서는 그들이 하나로 집결해 결국 공산주의를 만들어 낸다는 데에 나또한 이견이 없다. 다만 그 시기가 문제일 뿐.

사회에 만연해 있는 썩은 냄새들로 거리가 시끄럽다. 코를 틀어막고 길을 나서본다. 낮인데도 한창 일할 나이의 젊은이가 벤치에 쭈그려 잠자고 있다. 의료보험 적용이 안 돼 이빨이 다 썩어버린 공원 귀퉁이 시름 찬 늙은 노인의 얼굴이 안쓰럽다. 새벽내 아들 학원비 벌기위해 도우미 하고 돌아오는 고단한 아줌마의 발걸음도 무겁다. 바닥에 널브러진 신문을 펼쳐든다. 경제대국 11위,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 돌입. 이 돈은 다 어디 있지? 이로써 이득을 보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불과 3%도 안 되는 인구가 전체소득의 80% 자산을 주무른다는 소름끼치는 기사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과학기술로 인한 뛰어난 문명인 이곳에서 우리의 누울 자리는 어디인가.

금세 악취가 코를 뚫고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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