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옛날이야기는 모두 그런 식이야.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은 거야. 하나같이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다니까. 그런 이야기를듣고 있자면, 지난 오륙십 년 동안 일본엔 대단한 사건 같은 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야. 2·26사건1936년 일본에서 일어난 군부 쿠데타 사건-옮긴이이든 태평양전쟁이든, 그러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는 식이야. 우습지? 후쿠시마에서 우에노로 돌아오는 동안 그런 이야기를 더듬더듬해주고는 마지막으로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어. ‘어딜 가든 마찬가지야, 미도리‘ 하고 그런 말을 들으면 난 어린 마음에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을 했어." - P281
"그럼, 오늘처럼 아침에 기숙사로 와, 다음주 일요일에 같이 여기로오자." "좀 더 긴 스커트를 입고?"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 P283
혼잡한 일요일의 거리는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나는 통근 전철처럼 혼잡한 기노쿠니야 서점에서 포크너의 《8월의 빛》을사들고, 가급적 소리가 클 듯싶은 재즈 카페로 들어가, 오넷 콜맨이라든가 버드 파웰의 레코드를 들으면서, 뜨겁고 진하기만 한 맛없는 커피를마시며 방금 산 책을 읽었다. 다섯 시 반에 나는 책을 덮고 밖으로 나가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요일을 도대체 몇십 번, 몇백 번이나 반복하게 될 것인가, 하고 문득 생각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고독한 일요일." 하고 나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일요일에나는 태엽을 감지 않는 것이다. - P287
"와타나베와 내가 닮은 점은, 타인이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라지 않는다는 거야."하고 나가사와 선배가 말했다. (중략) "나가사와, 넌 내게도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하고하쓰미 씨가 물었다. "넌 아무래도 내 말을 이해 못하는 것 같은데,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럴 만한 시기가 되었기 때문이지, 그 누군가가 상대에게 이해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야." - P301
마치 특수한 과즙을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쓴 듯한 선명한 붉은빛이었다. 그런 압도적인 석양 속에서 나는 문득 하쓰미 씨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그녀가 일으켰던 내 마음속의 소용돌이가 무엇이었던가를 이해했다. 그것은 채워질 수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채워질 수 없을 소년기의 동경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타오르는 듯한 순진무구한 동경을 벌써 까마득한 옛날에 어딘가에 잊어버리고 왔기에, 그런 것이 한때 내 안에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오랫동안 잊어버린 채 살아온 것이다. 하쓰미 씨가 흔들어놓은 것은 내 안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나자신의 일부‘ 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거의 울어버릴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 - P304
"그렇게 나가사와 선배가 좋아요?" "좋아." 하고 그녀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맙소사." 하고 나는 한숨을 쉬고 남아 있던 맥주를 마저 마셨다. "그만큼 확신을 가지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겠죠." - P311
"뭐라도 좋아. 내 기분이 좋아질 만한 것." "아주 사랑스러워." "미도리." 하고 그녀가 말했다. "이름을 붙여서 말해줘." "아주 사랑스러워, 미도리." 하고 나는 고쳐 말했다. "아주라니 얼마만큼?"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말라붙어버릴 만큼 사랑스러워" 미도리는 얼굴을 들고 나를 보았다. "자긴 표현 방법이 정말 독특해." "너한테서 그런 말을 들으니 흐뭇한데."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더 멋진 말을 해줘."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날의 곰만큼." "봄날의 곰?" 하고 미도리가 또 얼굴을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봄날의 곰이라니?"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처럼털이 부드럽고 눈이 또랑또랑한 귀여운 아기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놀이 안 할래요? 하고, 그래서 너와 아기 곰은 서로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어때, 멋지지?" - P331
기묘한 봄의 시작이었다. 나는 봄방학 동안 줄곧 편지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도 갈 수 없고, 고향에도 갈 수 없고, 아르바이트도 할 수없었다. 며칠쯤 만나러 와달라는 나오코의 편지가 언제 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낮에는 기치조지로 나가서 동시상영 영화를 보거나, 재즈 카페에 앉아 반나절이 넘도록 책을 읽곤 했다.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고,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나오코에게 편지를썼다. 나는 그 편지들에는 답장에 관해선 전혀 쓰지 않았다. 그녀를 재촉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나는 페인트 가게에서 하는 일에 대해 쓰고, ‘갈매기‘에 대한 이야기, 정원의 복숭아꽃에 대한 이야기, 친절한 두부집 할머니와 심술궂은 반찬 가게 아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내가매일 어떤 음식을 만들고 있는가에 대해서 썼다. 그래도 여전히 답장은오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레코드를 듣는 것에도 싫증이 나자, 나는 조금씩 정원을 손질했다. 주인한테서 큰 빗자루와 갈퀴 그리고 쓰레받기에다 정원수를 다듬는 가위까지 얻어 잡초를 뽑고, 웃자란 나무들을 적당하게 잘라 다듬었다. 조금 손질을 했을 뿐인데도 정원은 제법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그런 일을 하고 있자니, 주인이 나를 불러 차라도 한 잔 들고 하라고 했다. 나는 안채의 툇마루에 앉아 그와 둘이서 차를 마시고, 쌀과자를 먹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 P347
나는 방으로 들어가 창문의 커튼을 쳤지만 방 안에도 역시 그 봄의 향기가 가득 차 있었다. 봄의 향기가 온 땅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러나지금, 그것이 나에게 연상시키는 것은 오로지 썩은 냄새뿐이었다. 나는커튼을 모두 쳐버린 방안에서 봄을 격렬하게 증오했다. 나는 봄이 내게가져다준 것을 미워하고, 그것이 내 몸속 깊은 곳에서 일으키고 있는 어릿한 아픔까지도 미워했다. 태어나서 지금껏, 이토록 강렬하게 무엇인가를 미워한 적은 없었다. 그로부터 사흘 동안, 나는 깊은 바다의 밑바닥을걷고 있는 듯한 기묘한 나날을 보냈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와도잘 들리지 않았고,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해도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마치내몸 주위에 뭔가 빈틈없이 투명한 막이 둘러쳐져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막 때문에 나는 외부세계와 제대로 접촉할 수 없는 것이다. - P352
의식이 턱없이 이완되고, 음지식물의 뿌리처럼 축 늘어졌다.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나는 멍한머리로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순 없겠다, 어떻게든 해야겠다. 그리고 나는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마라."라고 하던 나가사와 선배의 말을 갑자기 떠올렸다. "자신을 동정하는 건 비열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그래요, 나가사와 선배. 당신은 훌륭해요,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 P352
"인생이란 비스킷 통이라고 생각하면 돼." (중략) "비스킷 통에 여러 가지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는데, 거기엔 좋아하는것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만 자꾸 먹어버리면, 나중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거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통이라고." - P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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