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볼품없는 남자였다. 적어도 첫눈엔 그랬다. "저기." 그가 땟국에 전 엄지와 검지로 낡아빠진 빨간 야구 모자의 챙을잡아당기며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기가 여인숙으로 가는 길이 맞나요?" - P19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운명 같은 순간이었다. 그날 나는 그길로노스 로라를 향해 뒤돌아 집으로 가서 저녁 준비를 해도 됐다. 아빠와 오그 이모부에게 세스가 한 소리 듣든 말든 다 놀고 알아서집에 올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있었으니까. 아니면 최소한메인 스트리트에서 길이라도 건너가 이따금 다니는 자동차와 노랗게 물들어 가는 미루나무를 사이에 두고 걸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고, 그로써 세상의 모든 게 달라졌다. - P22
부모님이 내 앞에서 애정 표현을 하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은 적이 없었지만, 둘만의 고요한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었음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형언하기 어려운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그날 얼마 뒤에 집 안으로 들어와 우리 남매에게 어머니의사망 소식을 알리던 아빠의 사무적인 눈빛을 보면서 나는 또 한가지를 배웠다. 사랑은 오로지 두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 커지는감정이며, 두 사람 사이에서 애도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라는 걸. 부모님의 사랑은 감춰진 보물처럼, 은밀한 시처럼,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로지 두 사람의 것이었다. - P24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어도 우리 존재는 탐스럽게 잘 익은 복숭아를 조심스럽게 수확하듯 신중하게 형성되는 게아니다. 끝없이 발버둥 치다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거둘뿐이다. - P38
이 소녀도 다름 아닌 나였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끼며, 내가 평생 걸었던 이 길을, 전에는 생각도 못 했던 방식으로 우리는 함께 걸었다. - P39
특유의 아름다움과 창창한 미래를 빼앗아 짓밟았다는 면에서, 매시 아저씨의 매끈한 자동차를 망쳐놓은 기차 사고와 오그 이모부를 망쳐놓은 전쟁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1년 뒤, 우리가족에게서 캘 오빠, 비비언 이모, 우리 어머니를 앗아간 사고도그와 똑같은 짓을 했다. 나는 파멸의 집요함이 어떤 것인지 너무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다. - P53
기억을 돌이켜 보면, 본성이 선한 오빠는 옛날부터 제각기 흘렀던 우리 가족의 개울을 하나의 강으로 통합하는 합류점이었다. 오빠는 이따금 어머니를 웃게 만들었고, 기꺼이 아빠의 일을 도왔다. 일머리가 좋았던오빠의 일솜씨는 빼어난 품질의 복숭아를 제외하면 아빠의 유일한 자랑거리인 것 같았다. 오빠는 세스의 넘치는 에너지를 플라이낚시나 자동차 수리와 같은 유용한 일에 쏟아붓게 만드는 법을 알았고, 심지어 몇 마디 대화만으로 세스의 성질을 누그러뜨리기도했다. 그리고 내게는 까진 무릎에 호, 하고 입바람을 불어주는 유일한 사람, 친구가 필요할 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P61
그날 밤 잠에 따져드는 순간까지 내가 그토록 간절히 소원했던 건, 여자도 자기가선택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해줄 사람이었다. 물론 어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도 내 편을 들어줬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딸이 누릴 수 있는 이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실제로는어땠을지 모르지만 머릿속에서만큼은 어머니를 확고한 내 편으로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 P66
무슨 일이 됐든 캘 오빠가 그렇다고 하면 나도 그렇게 했다. 캘 오빠는 똑똑하고 착했으니까, 그리고 내가 뭔가 재밌는 말을 하거나 웃긴 행동을 할 때마다 캘 오빠의 두눈이 작은 초승달처럼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았다. 내게 캘오빠는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나침반 같은 존재였다. - P75
어제 그의 눈동자에서 내가 본 것은생각지도 못한 부류의 남자 한 명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새로운 내 모습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의 나를 포기하고 싶지않았다. - P100
그러나팔을 뻗어 향긋한 냄새를 들이마시고 보드랍게 잘 익은 복숭아를가지에서 하나씩 비틀어 딸 때마다 꼭 윌이 나를 지켜보는 것만같았다. 나중에야 알았다. 정말로 윌이 몰래 보고 있었다는 걸. 그날 한낮의 햇살이 황금빛 잎사귀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내 살갗에닿아 노랗게 빛났다고, 내가 큼직한 복숭아를 깨물었을 때 팔뚝을타고 과즙이 줄줄 흘렀고 팔꿈치에 맺혀 있다가 뚝뚝 떨어졌다고과즙이 묻어 반짝반짝 빛나는 내 입술이 마치 자신의 입술을 부르는 것 같았다고, 나중에 윌이 말해주었다. 그때였다고, 그때 자기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그랬다. 내가 복숭아를크게 한 입씩 베어 물 때마다, 자기가 숨어 있는 줄도 모르고 내가텁수룩한 나무 사이로 툭툭 눈길을 던질 때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고 윌은 말했다. - P110
루비앨리스는 미친 사람도 악마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산산이 부서지고 외로운 사람이었다. 월도 그랬다. 윌은 구릿빛 피부의 나그네일 뿐이었다. - P121
월과 사랑을 나누는 건, 아주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곳에 도달한 듯한 느낌이었다. 윌의 품에 안겨 있을 때만큼은 평생 꿈도보지 못한 모든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의 품에 안긴 나는 아름다운 여자, 매력적인 여자, 심지어 조금은 위험한 여자였다. 농가를•떠나 온 하룻밤 사이에 나는 그전까지의 순종적이고 소심한 소녀•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위험을 감수하는 여성이 되어 있었다. - P130
"세스 같은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보다 더 많아."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의사와 날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대답이었다. 그러나 안심은커녕 불안만 커지고 말았다. 그건 윌의 말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윌이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간다 한들 세스 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어디로 간들 세스처럼분노로 가득한 사람, 피부색이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히려는사람이 없겠는가? 윌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 P143
도무지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진실을 외면할 순 없었다. 무고한소년을 포용하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우리가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지 못할 만큼 이 세상이 잔인하다는 진실을. 블랙 캐니언이 윌의 깊고 끔찍한 무덤이 되어버린 것은 그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이 마을에 머물렀기 때문이라는진실을. - P151
그러고 보니 아빠는 기분이 좋을 때도 아무리 화가 날 때도 내 이름을 빅토리아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집을 나간이 여자애가, 빅토리아라는 이름의 이 젊은 여자가, 자기 딸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갈 힘이없는 건 토리다. 윌의 여자, 빅토리아는 얼마든지 전진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강인한 여성이다. - P167
열두 살의 내가 어머니 없는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였던 것처럼 이제는 어머니로서의 삶 속으로 한걸음 내디뎌야 했다. 나는 필요의 부름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몸을 일으켜야 했다. - P184
몸집이 가장 큰 곰부터 아주 작은 곤충까지, 또 씨앗이 싹을 틔우고꽃을 피우기까지, 탄생하고 견디고 시드는 만물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숲속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윌이 줄곧 내게 알려주고 싶어 했던 진리는 바로 이것이었다. 둥글게 솟아오른 배를 두팔로 감쌌다. 그러면서 내 아기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 형언할 수는 없지만 나 또한 그 일부라고 느낀 어떤 무한함을 나는 단단히 끌어안았다. - P187
세상에는 슬픔을 넘어서는 슬픔, 펄펄 끓는 시럽처럼 아주 미세한 틈으로도 스며들어 버리는 그런 슬픔이 있다. 그런 슬픔은 심장에서 시작되어 모든 세포로, 모든 혈관으로 스며들기 때문에 그런 슬픔이 한번 덮치고 가면 모든 게 달라진다. 땅도, 하늘도, 심지어 자기 손바닥마저도 이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야말로 세상을 바꿔버리는 슬픔이다. - P209
거실로 들어간 나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나를 바라보는 루비앨리스의 움푹 꺼진 한쪽 눈에는 연민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 옆에 불룩하고 거친눈은 무슨 일을 겪었든 이제는 다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 P221
나는 아이올라를 사랑했던 것처럼 코라 언니를 사랑했다. 그러나 비극과 슬픔은 아이올라에 대한 내 모든 믿음을 좀먹었다. 텅빈 노점에 마지막 판자를 못 박으면서 할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속삭였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굳이 사과하지 않았다. 코라 언니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아빠가 무덤 속에서 차분하고 편안하게 누워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코라 언니나 동네 사람들이 뭐라고하든 아빠라면 내가 모든 기억을 지우고 동네를 떠나 도망칠 기회를 틀림없이 지지해 줬을 것이다. 내가 과수원만 제대로 건사한다면, 그거면 될 터였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할 계획이었다. - P241
모슬린 베개와 자수액자 속 정교한 바느질 한 땀 한 땀에, 저 높이 달린 흰 선반 위 도자기 십자가에, 참나무 탁자 위 하얀 도일리 한가운데 놓인 어머니의 애장품 담청색 꽃병에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빠가 들여왔던 번쩍번쩍한 밤색 라디오에는 아빠가, 손수 만든 체커판에는 캘 오빠가, 비비언 이모가 가장 좋아했던 의자에는 이모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남자에게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을 거라고 호언했다. - P255
루비 앨리스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노파는 흔들리는 손을 내 쪽으로 뻗고서 비단 같은 손끝으로 내 손목을 어루만졌다. 우리의 작고 기이한 우정덕분에 자기도 외롭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 P257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아쉬움이, 평생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 곧 물속에 잠겨버릴 풍경에대한 아쉬움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마을이 가까워질수록 너무나 잔인한 무지의 동네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엔 외로운 노파를 악마라고, 아름다운 구릿빛 피부를 지닌 소년을 비열한 무법자라고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 P258
과수원땅에 생긴 거대한 구멍들이 마치 찢긴 상처 같았다. 나무가 뽑히고흙이 찢기고 바위와 뿌리가 떨어져 나가면서 과수원 땅이 무혈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되었다. 훗날 이곳에 물이차오르면 마지막 숨마저 고통스러워할 과수원 땅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내가 산에서 얻은 가르침이 있다면, 그건 땅은 지속된다는것, 필요한 때가 되면 인간의 어리석음을 없애고, 가능할 때 제모습을 되찾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었다. - P279
새로운 삶이 내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지난날의 선택을 끊임없이 돌아보며 의심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지금을 지나야만 그다음이 펼쳐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가 없고 초대장이 없더라도 눈앞에 펼쳐진 공간으로 걸어 나가야만 한다. 그건 윌이 가르쳐주고, 거니슨강이 가르쳐주고, 내가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마주했던 곳인 빅 블루가끊임없이 가르쳐준 진리였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내가 나아가야할 다음 단계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고, 나는 그걸 믿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 P281
사람들이 묘지를 나설 때 나는 참석해 준 모든 이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지난 일을 잊고 내 손을 잡아주었다. 만약 윌의 장례식을 열 기회가 있었더라면 이들 중 몇 사람이나 왔을지 궁금해졌다. 그래, 전부 다 오지는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대부분은 참석했을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내가 마을 사람들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던 것들, 잊고있었던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굵은 눈물방울이 되어 두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 P282
뿌리째 뽑힌 내 나무들이 새로운 곳에서 온갖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빌어먹을 온갖 불행이 닥치더라도 나 역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P284
예전에 윌이 여기나 저기나 똑같다고 했을 때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말은 그렇게하지만 월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이제는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나를 받아줄 곳이 아무 데도없으면, 모든 곳은 그저 아무 곳도 아닌게 된다. - P295
서서히 이곳에 정착해 가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차를 몰고 계곡을 따라 노스포크강이 거니슨강과 합류하는 로저스 메사로 갔다. 거기서 나는 세이지와 야생 꽃과 버드나무가 잔뜩 드리워진 오솔길을 걷다가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린 뒤 차가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두 강이 하나로 합쳐지는 정확한 지점에 서 있었다. 강물이 합류할 때 들리는 거친 물소리가 두 강의 오랜 대화를제외한 다른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나는 미끄러지지 않으려고돌멩이를 발가락으로 움켜쥐고 곧게 서서 물살에 맞서 균형을으며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맑은 물이 내게 뭐라고 했는지 내가 다 이해했다고 할 순 없다. 그러나 그 모든 말이 사실이었다는것만큼은 틀림없다. - P303
숲속에 가만히 앉아 얼룩덜룩한 햇빛을 받으며 케케묵은 이끼와 소나무 냄새를 맡았고, 여기저기서 윙윙거리고 재잘거리며 수다 떠는 소리를 귀담아들었다. 나는 하루하루 내가 선택한 삶을 만들어나가고 있었고 그건 좋은 삶이었다. 내게 없는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내 앞에 놓인 것들에 감사했다. - P309
세스의 지독한 성질과 그로 인한 슬픔이 내 기억을 잠식해 버린 나머지 어머니에게 사과의 선물로 줄 버드나무 십자가를 정성껏 만들있을 그 꼬마를, 나는 하마터면 떠올리지 못할 뻔했다. 어머니는그 십자가 두 개를 다 소중히 간직했다. - P266
우정이란 게 무엇인지 잘은 모르지만, 욕심 내지 않고 서로의 장점을 바라본다는 면에서 나는 우리가 좋은 친구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젤다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어려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했던 그날, 나는 정말 정말 가슴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비난 없이 담백하게 자신의 얘기를 하는 젤다가 너무나도부러웠다. - P337
"나한테 숨기는 게 무엇이든, 말하든 말든 그건 자기가 알아서할 일이에요. 그렇지만 두 가지만 얘기할게요. 하나, 빅토리아가강한 사람이라는 건 나도 잘 알아요. 나무도 구하고 농장도 운영하고 열심히 일하고 걷고... 뭐든 혼자서 척척 잘 해낸다는 거. 그래도 슬픔을 혼자 짊어지고 사는 건 강인한 게 아니에요, 빅토리아. 그건 누가 봐도 벌이야.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든 자신을 비난하는 것만큼은 멈췄으면 해요." - P340
"윌의 죽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거의 없을 때에도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렇지만 사건을 추적하지는 않았어요. 그때는 평등권도 없었고, 원주민들을 위한 법이랄 것도 없었고, 그들이 어떤 일을 참고 견뎌야 했는지 아무도신경 안썼어요. 지금도 달라진 게 별로 없고요. 잘 알잖아요" - P407
잘못한 것 없는 무고한 소년에게 세상은 어떻게 그토록 편협하고 끔찍했는지, 나는 여전히 공포를 떨쳐내지 못한 채 멍하니 수프를 저어댔다. - P408
개울을 따라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은 마치 이끼로 뒤덮인폭포 같았다. 폭포의 음악 소리와 안개 낀 바위를 쫓아 언덕을 내려오는 내 걸음은 사슴처럼 경쾌하고 단단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불현듯 궁금했다. 숲속 황야를 인간처럼 서투르게 걷지 않고 숲속생물들처럼 편안하게 걷는 법을 익힌 건. 숲이 바위투성이라서, 너무 미끄러워서, 너무 가팔라서 걷기 힘든 땅이 아니라 없어서는안 될 소중한 땅이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 P415
내게 닥친 일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마주하며 살아왔다고,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며 살아왔다고 말해줄 것이다. 어떤 존재가형성되기까지는 시간이라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해줄 것이다. 윌이 가르쳐주었듯이 흐르는 강물처럼 살려고노력했지만,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말해줄 것이다. 물론 걸림돌을 무릅쓰며 멈추지 않고 흘러왔다는게 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강물처럼 나 역시 나를 다른 존재들과 이어주는 작은 조각들을 모으면서 살아왔고,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손바닥에는 흙 두 줌이 쥐여져 있고, 심장은 여전히 삶을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나라는 존재를 형성한 건내 고향이었다. 떠나보낸 가족, 떠나보낸 사랑, 몇 없는 친구, 나를살아가게 해준 나무들과 내게 안식처를 제공해 준 모든 나무, 여기까지 오면서 마주한 모든 생명과 내 어깨에 내려앉은 모든 빗방•울과 눈송이와, 하늘을 가른 모든 바람, 내 발이 닿은 모든 굽잇길•과 내 손과 머리를 얹은 모든 곳과 지금 내 앞에 있는 것과 같은 모든 개울, 모든 생물과 조화롭게 주고받으며 산비탈에서 쏟아져 나 오고 중력을 얻고 소용돌이치며 다음 굽이로 밀고 나아가는 개울 이라는 고향. - P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