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치를 대가는 그보다 더 큰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것 중 가장 큰 것을, 바로 야생의 자연 자체를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는데, 우리는 생명과 너무 심하게 단절된 탓에 그에 대해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심지어 그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확신도 없다. 매년 플로리다 면적의 절반에 달하는 우림이 파괴되고 있다고? 아하함, 하품이 나네. 종들이 멸종하는 속도가 인류가 끼어들기 전에 비해 100배 내지 1000배나 빨라졌다고? 하암, 하아암. 우리는 도무지 그런 일에 신경을 쓸 정도로 각성하지 못하며, 생명의 세계는 우리와 너무 멀어졌고 너무나 무관해 보인다. 우리는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왔을까? 그리고 이 지경에 와 있음을 깨달은 지금, 어떻게 여기서 탈출해야 할까?
하지만 다윈은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알았다. 후에 그는 이렇게 썼다. "여러 박물학자가 ‘종’이라는 말을 쓸 때, 그들의 머릿속에 각자 들어 있는 개념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를 보면 정말 우습다. 나는 그게 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정의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진화분류학, 다음에는 수리분류학, 마지막으로 분자분류학이 등장했는데, 세 학파 모두 과학적 생명 분류가 부상하고 최종적으로 움벨트를 버리게 되는 과정에서 각자 나름의 역할을 했다. 그런 다음에야 마침내 물고기를 죽일 분기학자들이 등장할 터였다. 그것은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윈의 마차 에피파니에 힘입어 이루어진 진화에 대한 깨달음은 과학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에 세웠고, 그 길은 우리 모두가 그토록 오래 공유했던 자연의 질서로부터 과학을 점점 더 멀리 이끌어갈 터였다.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이건 대단히 장엄한 일이다. 그토록 분명하고 명백하고 그토록 사랑받는 어떤 것(자연 질서 안에서 분명히 구별되는 수많은 생명 형태들과 그것들이 거주하는 움벨트)을 골라내 거기에 손을 대는, 아니면 적어도 그 근처에 손가락 끝을 갖다 대는 일 말이다. 그런데 정확히 그것이 이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정신, 우리 뇌의 어두운 모퉁이들을 탐험하는 그 남자들과 여자들이 해낸 일로 보인다. 그보다 더 경이로운 일은 이 연구자들이 움벨트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을 연구함으로써 정말로 움벨트가 지닌 가장 심층적이고도 심오한 중요성이 무엇인지 밝혀냈다는 점이다. 그들은 무작위적 현실로부터 질서 정연한 움벨트를 뽑아낼 수 있도록 생물을 분류하고 명명하는 뇌 영역을 지닌 채 태어난다는 것이 분류학자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낸 것이다.
일본의 닌텐도가 만들어낸 유사생물인 포켓몬의 이름은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볼 안에서 살 수 있는 작은 존재들인 "포켓몬스터"라는 뜻이다. 영화, 피규어, 인형, 카드 등 세상에 나와 있는 포켓몬 상품들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그 상품들 대부분의 진짜 목적이 아이들이 한눈에 포켓몬들을 알아보고 분류하고 이름을 익히도록 돕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포켓몬 트레이딩 카드는 본질적으로 포켓몬들과 그 특징을 공부하기 위한 암기용 카드다. TV 애니메이션에서는 포켓몬의 실루엣을 보여주고 "저 포켓몬은 누구지?" 하고 물어보는 식으로 식별 기술을 갈고닦는 것을 목적으로 한 퀴즈가 사이사이 등장한다. 포켓몬 분류도가 들어간 포스터도 살 수 있고(우리도 샀다), 아이들은 그걸 보고 포켓몬의 범주와 유형을 익힐 수 있다. 아이들은 포켓몬 분류를 암기하고 자랑스러워하는데, 이때 아이들이 뿌듯해하는 건 포켓몬을 사용해 게임을 하는 능력이 아니라 포켓몬들의 정체를 식별할 줄 아는 능력, 그러니까 그들이 어느 그룹에 속하며, 무엇과 가장 비슷하고, 이름이 무엇인지를 아는 능력이다. 포켓몬 상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분류학에 대한 아이들의 갈망을 어찌나 영리하게 활용했는지, 실제로 이 상품들은 (그만큼 훌륭한 마케팅팀을 갖지 못한) 진짜 생물의 세계를 매력으로 훨씬 앞질러버렸다.
나는 물고기를 좋아한다. 그건 어쩌면 나의 어머니가 일본계여서 우리가 생선을, 어떤 날은 아침, 점심, 저녁까지, 회로, 튀김으로, 구이로 먹고, 설탕을 넣고 조려서 먹고, 훈제하거나 절여서 먹고, 국을 끓여 먹고, 덴푸라tempura로 튀겨 먹고, 어쨌든 거의 모든 생선을, 아무 생선이나 다 먹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물고기가 원래 억누를 수 없이 정이 가는 존재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내가 키웠던 모든 물고기를 애정 어린 (그리고 이제는 오래전에 땅밑으로 들어갔으니 슬픔도 어린) 마음으로 기억한다. 금붕어, 네온테트라, 앤젤피시도 있었고, 수줍은 클라운로치도 있었다. 아마도 내가 물고기를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그것들이 그냥 너무나 견고하게 물고기로서 존재하기 때문인 것 같다. 물고기라는 개념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공기를 좋아하지 않거나 하늘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당최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래서 물고기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는 일, 아니 사실 내가 여리고 젊은 대학원생 시절부터 강의실에서, 세미나실에서, 연구실에서, 과학 학회에서, 조용한 복도에서 계속 반복해서 목격했듯이 물고기들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일은 내게 각별히 고통스러웠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타당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그건 내게 언제나 얼마간 아픔을 안겼다. 지금 나는 그것이 바로 내 움벨트에서 느껴지는 아픔이었다는 걸 안다.
우리는 선들을 그어야만 하고, 일정한 인간적 방식들에 따라 선을 그을 테지만, 우리끼리도 과학자들과도 항상 정확히 똑같은 선을 그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생명에서 읽어내는 세계는 매혹적인 관점들이 가득한 세계이며, 그 관점에는 과학도 포함된다. 이 모든 관점 하나하나와 모든 생물을 다 유지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단 하나의 해법은 없다. 미로에서 빠져나오는 단 하나의 방법은 없다. 분류는 옳거나 그렇지 않으면 틀린 것이라고 단순하게 볼 것이 아니다. 어쩌면 오히려 각각의 분류는 있는 그대로, 그러니까 그 사람의 비전, 인간의 움벨트가 표현된 것으로, 보편적인 주제에 대한 하나의 변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