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뭔가를 나쁘게 바꾸는 건 아주 쉽다. 물에 검은 잉크를 한방울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쉽고 빠르다. 어려운건 뭔가를 좋게 바꾸는 거다. 이미 나빠져버린 인생을 바꾸는 건 결국 세상 잔체를 바꾸는 것만큼이나 대단하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 P8
삶도 그랬다. 인생에는 더러 반짝이는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삶은 어둡고 차갑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 같았다. - P12
어떤 의미에서 김성곤은 확인한 셈이었다. 그의 존재와 무관하게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 P33
이게 나라고? 김성곤은 충격에 휩싸여 반문했다. 내게 이런 시절이 존재했다고? - P56
그땐 그저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고 생각했었다. 완벽한 순간은 평범한 일상 속에 녹아 있다는 걸 몰랐으니까. - P58
오늘 본 란희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커다란 체에 좋은 것들, 그러니까 즐거움, 애정, 행복같은 걸 탁탁 거르고 다시 한번 분노와 슬픔을 툭툭 걸러낸다. 마지막으로 온갖 앙금과 미련과 애증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모든 감정을 시간의 태양 아래에 말린다. 그러고 나서 남은 흔적 같은 게 아까 자신을 바라본 란희의 얼굴에서 본 표정이었다. - P133
- 세상이 왜 지금 끝나지 않는 거지. 젊은 성곤이 물었다. - 이것보다 더 아름다우니까. 란희가 대답했다. - 아름다움은 사라져. 변하고 퇴색되지. 성곤의 말에 란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름다움은 남아. - P166
-있잖아. 당신 눈빛이 너무 뜨겁지 않아서 다행이야. 전엔 활화산 같아서 불안했는데 지금은 촛불 같아서 편안해. - P217
삶의 가장 큰 딜레마는 그것이 진행한다는 것이다. 삶은 방향도 목적도 없이 흐른다. 인과와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종종 헛된 이유는 그래서이다. - P237
-그거 알아? 정말 어려운 건 힘든 상황에서도 어떤태도를 지켜내는 거야. - P252
- 근데 정말 엉망이기만 합니까? - 예? - 정말로 엉망이기만 하냐고. 박실영이 성곤에게 얼굴을 쏙 들이밀었다. - 잘 살펴봐요, 지나온 삶을 엉망이기만 한 삶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해. 박실영은 다시 몸을 뒤로 젖히고 성곤을 지그시 바라봤다. - 그리고 내 보기에 당신은 잘 살아온 것 같아요. 계속 삶에 대해 알아내려고 애쓰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잘했어요. 아주 잘했습니다.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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