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무척 밝아서, 나는 불을 끄고 소파에 누워 빌 에반스의 피아노연주를 들었다. 창으로 비쳐 들어오는 달빛이 온갖 사물의 그림자를 길게늘어뜨려, 마치 연한 먹물을 칠한 듯 그윽하게 벽을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배낭에서 브랜디를 담은 얇은 금속제 물통을 꺼내어, 한 모금 입에 넣고 천천히 삼켰다. 따뜻한 감촉이 목구멍으로부터 위장으로 서서히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따스함은 위에서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브랜디를 한 모금 다시 마시고 나서 물통 마개를 닫고 그것을배낭 속에 도로 넣었다. 달빛이 음악에 맞춰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 P162
그 후에도 레이코 씨는 보사노바를 몇 곡 더 연주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나오코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편지에도 스스로 쓴 것처럼 전보다 건강해진 것 같았고, 햇빛에 잘 그을려 있었으며, 운동과 야외 작업 덕택에몸매도 탄탄해 보였다. 호수처럼 깊고 맑은 눈동자와 수줍은 듯 흔들리는작은 입술만은 전과 다름없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녀의 아름다움은성숙한 여성의 그것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지난날 나오코의 아름다움의그늘에 보였다 사라졌다 하던 어떤 날카로움-상대방을 문득 서늘하게만들곤 하던 그 얇은 칼날과 같은 날카로움은 저 멀리 뒤로 물러서 있었고, 그 대신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한 독특한 차분함이 주위에 감돌고있었다. 그런 아름다움은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리고 불과 반년 사이에 한 여성이 이렇게도 많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오코의 새로운 아름다움은 이전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 이상으로 나를 매혹시켰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사라져버린 그무언가를 생각하면 아쉽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사춘기 소녀의 독특한, 그 자체를 주체 못할 자유분방한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그런 모습은 두번 다시 그녀에게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 P165
"화내지 마, 농담일 뿐이니까. 그런데 진짜 어때? 정말로 잘하는 게 뭐야?" "잘하는 건 없습니다. 좋아하는 건 있어도" "어떤 걸 좋아하는데?" "걸어서 여행하는 것, 수영하는 것, 책 읽는 것." "혼자서 하는 걸 좋아하는군." "그렇군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고 나는 말했다. "남들과 같이 하는 게임 같은 건 옛날부터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건 뭘 해도 제대로 열중할 수가 없어요. 잘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이라는 기분이들곤 하죠." - P172
"제일 중요한 것은 말이야, 초조해하지 않는 거야." 하고 레이코 씨는내게 말했다. "이게 내 또 하나의 충고야. 초조해하지 말 것. 어떻게 손을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일이 얽히고설켜 있어도, 절망에 빠지거나 조바심이 나서 무리하게 서두르면 안 돼. 시간을 두고 하나하나 서서히 풀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할 수 있겠어?"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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