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 도착해서 기숙사로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할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모든 걸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모든 것과 나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 그것뿐이었다. 나는 녹색 펠트가 깔린 당구대와 빨간 N360, 책상 위의 하얀 꽃 같은 것들을 아주 깨끗이 잊어버리기로 했다. 화장터의 높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나 경찰서 조사실에서 보았던 뭉텅하게 생긴 문진 같은 것들까지 모두. 처음에는 잘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잊으려 해도 내속에 희뿌연 공기와도 같은 덩어리가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흐름에 따라 덩어리는 점점 더 또렷하고 단순한 형태를 띠기시작했다. 나는 그 덩어리를 말로 바꾸어 낼 수 있었다. 바로이런 말이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 P47
나는 즐겨 책을 읽었지만 많이 읽는 타입은 아니고 마음에드는 책을 잡으면 몇 번씩 반복해서 읽는 편이었다. 그즈음 내가 좋아했던 작가는 트루먼 커포티, 존 업다이크,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챈들러 등이었는데, 학교에서나 기숙사에서나 그런 종류 소설을 좋아해서 읽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애들은 주로 다카하시 가즈미, 오에 겐자부로, 미시마 유키오, 또는 현대 프랑스 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 당연히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고, 나는 혼자서 묵묵히 책만 읽었다. 하나를 잡으면 몇 번이나 거듭 읽었고, 때로 눈을 감고 책의 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책향기를 맡고 페이지에 손을 대는것만으로 나는 행복할 수 있었다. - P57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냐. 나는 시간의세례를 받지 않은 것을 읽는 데 귀중한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않아. 인생은 짧으니까." "나가사와 선배는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데요?" 나는 물어보았다. "발자크, 단테, 조지프 콘래드, 디킨스."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별로 현대적인 작가는 아니네요." "그러니까 읽는 거지. 남들과 똑같은 것을 읽으면 남들과같은 생각밖에 할 수 없잖아. 그딴 건 촌놈이나 속물의 세계야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그런 부끄러운 짓은 안 해. 와타나베, 알겠어? 이 기숙사에서 조금이나마 제대로 된 인간은 나하고 너뿐이라고.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나 같다고 보면 돼." "어떻게 그런 걸 알 수 있어요?" 나는 어이가 없어 물어보았다. "난 알아. 마빡에 간판을 단 것처럼 난 알아, 보기만 해도. 게다가 우리 둘은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고." - P59
나가사와는 몇 가지 서로 상반되는 특성을 아주 극단적인형태로 소유한 사내였다. 그는 때로 나조차 감동해 버릴 만큼상냥하게 굴다가도 동시에 무서울 정도로 음침한 저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깜짝 놀랄 만큼 고귀한 정신과 구제할 길 없는속물근성이 동시에 있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을 거느리고 낙천적인 태도로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그 마음은 음울한 늪의 바닥에서 외롭게 몸부림쳤다. 나는 그의 모순된 내면을 처음부터 선명하게 느꼈고, 다른 사람들 눈에는 왜 그런내면이 보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사내도 나름의 지옥을 살아가는 것이다. - P61
반딧불이가 사라져 버린 다음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내 속에오래오래 머물렀다. 눈을 감으면, 그 작고 희미한 불빛은 짙은어둠 속을 갈 곳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고 떠돌았다. 거쳐나는 어둠 속으로 몇 번이나 손을 뻗어 보았다. 손가락에는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작은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 조금앞에 있었다. - P86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뿐이야. 그러다가는 결국 실망할 뿐이니까." - P96
"어떤 사람들한테 사랑이란 그렇게 아주 사소하고 쓸데없는 데서 시작되는 거야. 그런 게 없으면 시작되지가 않아. - P138
우리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그 뒤틀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 있다고. 사람마다 걷는 버릇이 다 다르듯이 느끼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 보는 방식이다른데 그것을 고치려 한들 쉽게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고치려다가는 다른 부분마저 이상해져 버린다고 말이야. 물론이건 아주 단순화한 설명이고, 그런 건 우리가 품은 문제의 한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난 어쩐지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알 것도 같았어. 우리는 분명 자신의 뒤틀린 부분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그래서 그 뒤틀림이 불러일으키는 현실적인 아픔이나 고뇌를 자기 내면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여기 들어온 거야. 여기 있는 한 우리는 남을 아프게 하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아픔을 당하지 않아도 돼. 왜냐하면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뒤틀림‘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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