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임승수의 마르크스 자본론 강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시리즈
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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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 임승수 -

 30년전만 해도 이런 책을 이렇게 쉽게 읽을 수 있었을까 싶다. 이 책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아주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강사와 학생이 주고 받는 대화 형식으로, 14개의 챕터(강의)로 구성되어 있다. 자본론 원전을 읽어보지 않았으므로 그 내용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자본론이 주로 지적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점과 소위 '노동자에 대한 착취', '자본주의의 필연적 종말' 등에 대해 경제학적, 논리적 관점에서 접근한 근거를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이 책의 저자는 자본주의를 혐오한다고 볼 수 있다. 책속에 약간 포함된 진보정치에 대한 희망(노동자에게 권력을) 등의 정치적 서술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많은 젊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저자의 관점을 그대로 취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분배의 정의 등 사회적 관점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지극히 약한 개개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자본론에서는 상품의 가격을 '노동시간'으로 환산한다. 어떤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만들기 위해 투입한 노동자의 노동시간(표준시간)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 가정이야 말로 자본론의 핵심이다. 이를 통해 자본가가 어떻게 이윤을 남기고, 노동자는 어떻게 착취되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주류 경제학에서도 생산에 관한 함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는데, Y = F(L, K), 생산에는 노동과 자본이 투입된다는 말이다. 마르크스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로 표현했다. M-C(LP, MP)-P-C'-M' : M=투입자본, LP=노동력, MP=생산수단, P=생산, C'=산출물(상품), M'=판매대금(증가한 자본). 마르크스의 가정에 따르면 상품(C)의 가격은 모두 노동시간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결국 잉여가치(M'-M)은 모조리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다. 노동자는 자산이 투입한 노동시간에 비해 적은 대가(임금=LP)을 받고 일하며, 이 차이가 바로 자본가의 이윤에 해당한다.
 저자는 (감정적 표현은 상당히 자제하고 있지만) 이에 분개한다. 생산수단을 자본가가 독점하는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으로 착취당하는 몸뚱아리 밖는 노동자에게 분노할 것을 요구한다.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우선, 모든 상품의 가치를 노동시간으로 산정하는 가정까지 동의한다고 해도,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시간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것이다. 자본가가 제공한 생산수단과 결합하지 않은 노동력은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자본가는 잉여자본에 대한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다. 다만, 노동자와 어떻게 나눠야 하는 분배의 정의에 대한 논의만이 필요할 뿐이다.
① 저자는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끼리도 서로 생존 경쟁을 하므로, 잉여자본을 높이기 위해서 서로 노동자를 더 착취할 방법만 찾게 된다고 한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 혹은 20세기 초반에는 이에 따른 극단적 노동착취가 이루어졌었다. 현대에도 (특히 우리나라는) 이런 경향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자본의 유기적 구성(C:불변자본/V:가변자본)이 높아지며, 이에 따라 노동자 1인당 생산성이 높아지므로 노동자의 몫도 늘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산업의 고도화로 노동자 중심의 고용시장이 형성되면 노동자의 구입(LP) 또한 힘들어진다. 현대에서 이러한 경향은 더 강해진다. 우수한 생산성을 가진 노동자(aka 고급노예)는 자본가가 서로 데려가기 위해 경쟁한다. 물론 고임금을 받는 이러한 '인재'의 경우에도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저임금 노동자에 비해 더 착취받는 더 불쌍한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② 생산 기술의 혁신으로 노동생산성이 증가하면 노동자가 착취되는 비율이 더 커진다고 한다. 이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생산성이 증가하면 상품가격(=노동시간)이 떨어지므로,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한 노동자의 생활 수준 또한 자본주의 성숙도에 따라 지속적으로 높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③ 성과급 제도 또한 착취를 위한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생산성과 무관하게 동일 임금을 지급했을 때 보다, 생산성에 따라 노동자의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면 자본가의 잉여(노동착취)가 절대적으로 증가한다. 이 또한  사실이지만 동시에 생산성 향상과 그에 따른 성과급 지급으로 노동자의 잉여 또한 절대적으로 증가했다. 책에서는 심지어 자본/노동 분배율이 동일하다고 가정한 후에, "어쨌거나 자본가의 절대적 이익이 늘었으므로 나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동시에 노동자의 절대적 소득이 늘어난 것은 왜 무시하는지 모르겠다.
 결정적으로, 생산수단은 자본가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자본 역시 거래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자본시장에서는 생산수단(주식회사)에 대한 지분이 거래된다. 주식회사의 지분 일부를 소유함으로써 노동자 역시 생산수단을 보유할 수 있다. 물론 리얼 자본가인 대주주가 얻는 편익이나 생산수단 활용 결정 권한에 비해서는 얻을 수 있는 이익에 한계가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자가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의 이익을 편취한다. 노동력 자체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이는 당연하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자본가/노동자의 수익 배분이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고, 지금까지는 대체로 노동자의 수익과 생활 수준 또한 절대적으로는 증가 해 왔다(물론 비율적으로는 자본가의 이익이 더 늘어났을 것이다 : 부익대부 빈익소부...).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공평하게 나눠가지려 했는데 나눠가질것 자체가 아예 없어져버렸다. 즉, 아무리 나쁘게 보려 해도 이윤동기는 혁신의 동력임에 틀림없다. 자본주의 역시 영원하지 않다. 마르크스는 천재임에 틀림없다. 기술 혁신 등으로 생산성이 계속 향상되면 착취율(=이윤)이 계속 줄어들게 되므로,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는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걸 이미 19세기에 설명했다니. 그러나 그 종말이 사회주의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한계비용 제로 사회'에서 이와 비슷한 미래를 그려보기도 했다. 특히, 로봇 기술의 발달로 노동이 종말을 맞는다면, 자본가는 더 이상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때는 얼마나 착취하냐가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생산수단을 보유하지 못한 사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의미에 한정하면...) 노동을 사 줄 사람이 없으므로 살아갈 자격이 없게 된다. 어떻게 될까? 많은 나라에서 이에 대한 정책적 논의가 진행 중이다. 북유럽에서는 이미 '기본 소득'의 도입을 시험 해 보고 있다. 자본주의는 영원하지 않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그래서 어떤 체제가 우리 경제 생활을 지배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이라면, 사회를 뒤집어 엎어 사회주의를 만들려 노력하거나 자본주의 혐오 감정에 고립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나도 생산수단을 소유하여 노동 착취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먼저 해 보는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노동력을 어떻게 하면 자본가에게 좀 더 비싼 값에 팔아먹을까(고급 노예가 될까) 하는 고민 또한 도움이 될 것이다. 내 노동력을 비싸게 팔수록 생산수단을 소유할 기회는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말을 쓰고보니 자괴감이 들고 분노가 생기긴 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약한 한 개인이 ㅎㅎ


2017.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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