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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 가장 유용하고 공정하며 고귀한 사업의 역사
로데베이크 페트람 지음, 조진서 옮김 / 이콘 / 2016년 6월
평점 :
[16.08]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장 유용하고 공정하며 고귀한 사업의 역사)
- 로데베이크 페드람 지음. 조진서 옮김 -
신생 공화국 네덜란드의 운명을 지고 출범하여 황금의 17세기를 이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이 회사는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자카르타)에 거점을 잡고 인도, 중국, 대만, 일본 등 아시아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거대한 회사를 세우기 위해 일종의 '국민 모금운동'이 진행되었으며, 누구라도 지분투자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사실상 세계최초의 주식회사가 출범하게된 계기이다.
이전에도 모금으로 배를 출항시키고, 배가 돌아오면 이익을 나누는 프로젝트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단기성(3~5년)이었고, 입항 후에는 배 자체까지 팔아버리는 말 그대로 '청산'에 들어간 것에 비해, VOC는 그 연한이 정관에 의해 최소 21년으로 규정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으며 이것이 증권거래의 시발점이 되었다. 21년이라는 기간(실제로는 매 청산시점에 정관이 변경됨으로써 200년 가까이 존속했다)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영원에 가까운 기간이었으므로, 자연스레 그 수익을 배당받고 청산하기를 기다리기보다 중간중간 지분을 거래할 수요가 발생한 것이다.
이 책은 VOC 지분 거래의 역사에 관한 것임에도, 현재 금융시장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상당한 유사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얻어낸 생각들은,
1. 회사의 성장 초기에는 배당이 드물고 대부분 인프라, 가격경쟁 등 요소를 위해 회사에 재투자되며, 이 과정은 배당처럼 직접 현금이익을 투자자에게 주지는 않지만 실제로는 회사의 내재가치를 증가시키는 중요한 활동이다. 이 기간 회사의 주가는 상당기간 부진할 가능성이 있다(VOC의 경우에도 초기 10년이상 주가 변동의 크지 않았다.)
2. 회사의 성장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바타비아 거점 구축, 항로 곳곳에 요새를 세우고 일본, 중국 광동에 무역로를 개척하는 등...) 정상 궤도에 올라선 이후에 주가는 급등한다. 요즘 기업들의 성장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구글은 아직도 현금배당을 안하지만 엄청나게 성장했다. 언젠가 할까?)따라서, 성장할 회사를 사서 장기간 보유하고 있는 방법은 현재도 꽤 유효할 것 같다.
3. 그러나 이 경우에도 경영투명성이 개선되고 주주 친화적 정책(배당성향 상향, 이사진 선발 시스템 개선 등)이 시행되어야 주가상승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것 같다. 17세기 초반 암스테르담에서도 팜플렛 등 선전도구를 활용한 소액주주 운동이 있었다.
4. 주식 거래량이 증가하고 시장의 관심을 받게되면 소위 투기꾼(혹은 트레이더)들이 몰려들어 갖은 작전을 통해 주가를 조작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사업의 부진(선박이 나포되었다거나, 일본 막부와의 관계가 나빠졌다는 등의...) 루머를 퍼트리고 자기 자신은 선도계약을 체결해 차익을 챙긴다거나하는 일들이 이때에도 성행했다. '정보'를 통해 이익을 챙기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그러나 정작 '정보'가 너무 많아지면 종합적으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이 어려워지고 이익을 내기 어렵다.
5. 1672년과 1688년 두번의 대폭락을 경험한 후에도 주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 가격을 찾아갔다. 심지어 1672년은 네덜란드가 영국과 프랑스라는 강대국의 침공을 받아 공화국 존립 자체가 위험했던 시기이다. 물론 실제 네덜란드가 이때 멸망했다면 VOC의 운명도 처참해졌을 확률이 높지만... 저 정도 위기 상황과 비교할때 브렉시트 따위가 얼마나 미미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증권 거래는 4백년 넘게 이어져온 시장이고, 어떤 충격에도 대부분 수년 내에 회복했다.
6. 결국 작은 정보든 거시적 위협이든 일일이 대응하는 것보다는 바이 앤 홀드 전략이 장기적으로 더 우월한 것으로 생각된다(그리고 정보를 보고 내일 오를지 내릴지 고민하는 등의 쓸데없는 노력이 덜든다... 가성비). 200년이나 이어진 VOC의 주가 차트를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책에 나오는 많은 꾼들이 별로 좋지 못한 결말을 맞았으나 장기적 관점에서 그저 보유하기만 한 사람은 때마다 나오는 현금배당과 현물(메이스 등 향신료)을 통해 수익을 얻고 오르는 지분가치를 보며 즐기기만 했으면 됐을 것이다.
7. 코엔라드 반 헤닝엔은 VOC의 이사를 지내기도 했고 프랑스와 스웨덴을 담당한 유능한 외교관이자 암스테르담 시장을 6번이나 지낸 성공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인데, 은퇴 후 말년에 무슨생각인지 VOC의 지분 매입에 전재산을 몰빵했다. 빌렘 반 오라녜 3세가 영국침공을 실행한 시점이 반 헤닝엔의 선도 매입계약 시점과 맞물리며 그는 한 순간에 파산했다. 반대 포지션에 선도매매나 옵션 등을 걸어 리스크를 줄일 수도 있었을텐데 오르는 쪽으로 리스크를 키우기만 했다. 자신의 똑똑한 제안이 실행될 경우 VOC의 실적이 개선될 것을 확신했던 것인데, 너무 자신만만한 순간에도 언제라도 외부에서 망하게 할수 있는 리스크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방어적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