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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ㅣ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1
구범진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평점 :
[16.06]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 구범진 -
키메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종(異種)복합의 생명체. 청나라, 중국의 마지막 제국.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1637년 삼전도 굴욕과 소설 '남한산성', 영화 '최종병기 활' 등을 통해 오랑캐의 제국으로 기억하고 있다. 저자는 청나라를 키메라라는 특이한 생명체에 비유함으로써 단순하게 '호란'이라는 대표적 이미지로 기억되는 중국의 마지막 제국을 보다 복잡한 체제를 가진 세계제국으로써 설명한다.
"미미한 시작과 창대한 결말", 누르하치로부터 시작된 청 제국의 팽창의 역사는 이 한마디로 압축되는 듯 하다. 우리의 삼국시대에는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에 예속되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윤관의 '여진 정벌'에 등장하는 만주 일대의 유목 민족이 어떻게 세계 최대의 제국을 경영하게 되었는지 저자는 다양한 방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흔히들 우리는 청, 그리고 만주족을 중국을 정복하였지만 오히려 '우월한' 중국 문화에 동화되어 사라지고만 불운한 민족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청 제국(다이칭 구룬)은 적어도 18세기 초 까지는 만주/몽고/한인의 복합체이였으며, 특히 대주주인 만주인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한인은 고위 관직 등에 아주 제한적 영향력만 인정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 중국의 판도는 사실상 20세기에 이르러서야 '한인'의 머리 속에 들어온 것이며, 19세기 말까지도 한인들의 '정통 중국 수복'의 개념에는 장성 이북의 몽고, 서장, 위구르, 티벳, 만주 등의 강역은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것이 가능 했던 것은 첫 째, 청 제국이 기존의 '전통적 중국'에 해당하는 18개 직성(명의 강역과 거의 일치)과, 외번에 해당하는 티벳, 몽고, 조선, 대만, 유구 등과, 제국의 원류인 만주를 별도로 구분하여 관리하는 등 지역에 따라 차등적 관리를 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청 제국은 강희-옹정 연간에 이미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캬흐타 조약을 통해 서방과 근대 조약을 맺은 바 있다. 기존의 동아시아 질서 하에서는 어떤 민족이든 중국(중원)을 정복한 국가가 주(主)가 되고, 이외의 국가는 주변이자 종(從)이 되는 이른 바 '조공 외교' 관계가 당연시 되어 왔다. 중국을 정복한 국가가 다른 국가와 평등한 개념에서 외교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상당히 낯선 개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이 러시아와 대등한 관계를 맺었던 이유는 바로 중국을 벗어난 '몽고문제'와 관련이 있다. 흑룡강 일대에서 고비사막 너머 준가르제국까지의 강역을 관할하는 청 제국의 관청은 '이번원'이라는 곳이었으며, 중국 내 18개 직성을 관할하는 기구와는 아예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되었다. 이번원에는 한인 관리의 진출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으며, 따라서 청과 러시아의 외교문서에서도 라틴어, 러시아어, 만주어만이 사용되는 등 장성 이남의 중국 영역을 벗어나는 영역은 중국이 아니라 청이라는 세계 제국의 별도 관할로 여겨졌다. 즉, 청 제국이 전통적 중국의 질서와는 맞지 않은 조약을 서방의 제국과 체결하였으나, 이 것은 중국의 관할을 벗어난 '이번원'의 영역에서 행해진 것이며, 전통 중국 내의 한인은 이러한 사실을 알기가 힘들었을 것이다.(그러나 이런 특별한 청-러시아의 관계 또한 청 제국이 준가르를 평정하여 준가르-러시아가 동맹할 위협이 사라지면서 다시 러시아에 대한 우월적 어조의 외교 정책으로 선회한다.)
둘 째, 19세기 중반 내우(태평천국 운동)와 외환(아편전쟁 등)으로 베이징 황실이 흔들리기 전까지 청 제국의 지배는 '팔기'의 견고한 체제 하에서 이루어졌다. 팔기는 군대이면서도 동시에 통치 기구에 해당하는 만주족의 독특한 조직이었다. 청 제국의 성립 과정에서도 8개의 기 중 몇개를 차지하느냐가 황실 계승의 변수가 되었으며 순치-강희제에 이르러서야 팔기를 대청 황제가 완벽히 장악함으로써 세계 제국으로써 도약할 기틀을 잡게 된 것이다. 또한 팔기에 속한 사람은 '기인'이라 부르며 일반인인 '민인'과 다른 신분으로 구분하였으며 심지어 도시 내 기인의 거주 구역도 일반인과는 완벽히 구분되어 있었다. 팔기군대는 청 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상징물이자 통치의 근간, 제국의 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팔기라고 해서 반드시 만주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팔기만주, 팔기몽고, 팔기한군으로 구분하여 몽고와 한인 등 이민족으로 구성된 팔기 또한 존재하였으며, 이 중에는 청 제국의 입관(산해관 돌파) 이후 일찌감치 투항 함으로써 만주족의 중국 장악에 기여한 한인 장군들까지 포함 함으로써 제국 초기 공동 경영의 안정을 추구하였다. 청 제국의 전성기이자 태평성대로 일컬어지는 강희-옹정-건륭 3대의 치세에, 제국은 이러한 팔기의 정치적, 군사적 든든한 기반 아래 만주와 중국 뿐 아니라 서역의 준가르까지 제압하며 17~18세기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발돋움 하였다.
그러나 이 중 마지막 건륭제의 치세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는 다르게 재정의 낭비와 관료의 부패 등으로 속으로는 무너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건륭제 사후 19세기 청 제국의 급격한 몰락을 불러왔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 난징을 수복한 것은 팔기군대가 아니라 증국번, 이홍장 등 한인 장군이었으며, 이 시기에 이르러 청 황실은 한인에게 봉작을 내리는 등 중국을 벗어난 외번(몽고, 티벳 등)에도 한인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후반 동치제 이후 서태후의 50년 섭정 하에 팔기 체제와 만주 황실은 급격히 무력화 되었으며, 결국 마지막황제 푸이에 이르러 위안스카이에 의해 청 제국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앞서 청 제국의 시작을 만몽한의 공동경영에서 시작하여 만주인의 절대적 지배 주주로써의 영향력 행사로 귀결된 것이라 본다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한인 세력의 부흥은, 다이칭(大淸) 구룬이라는 다국적 기업이 부실로 부도의 위기에 처하자 대주주인 만주인이 자신의 주식을 소각하고 한인에 신주를 발행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 상황에 비유할 수 있다. 즉, 기존에 stakeholder 수준에서 중국(18개 직성)의 행정 등에 제한적으로 참여했던 한인이 이제 shareholder로써 그 영역을 확장하고 주요 의사결정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의 '중국'을 수복하겠다는 생각 속에 장성 이북의 만주, 몽고, 티벳, 서장 등은 적어도 19세기 말까지는 배제되어 있었다. 청 제국의 세계 경영은 본-속체제 하에 이루어졌고, 한인은 중국(18개 직성)밖의 세계에 대해서 거의 전적으로 배제되어, 대제국을 경영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인구에서 압도적이던 한인이 점차적으로 중국을 벗어나 외번으로 이주하며 경험을 쌓고 영향력을 향상 해 가며 결국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청 제국 전체 판도를 계승하겠다는 의식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오늘 날 중국은 이 정신을 좀 더 확대/강화하였다. 이른바 동북 공정 등을 통해 역사 해석을 달리 하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그 전까지의 '중국'과 현대의 '중국'이 다른 개념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청 제국을 계승하고자 결심 함으로써 중국인은 기존 수 천년간 이어온 황하와 장강 일대를 주축으로 하는 '중국'의 개념을 넘어서서, 50개가 넘는 소수민족까지 모두 '중국'이며, 청 제국의 강역에 속하였던 지역의 지난 역사까지도 모조리 중국의 역사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청 제국이 단순한 '중국'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된다. 다이칭 구룬은 중국(18개 직성)을 속주로 둔 세계 제국이었다. 또한 다이칭 구룬의 지배자는 중국 내에서는 이전 중국의 황제들을 계승한 '수명 천자'였으나 티벳불교 세계에서는 '전륜성왕'이자 '불법의 수호자'였으며, 초원의 몽고 세계에서는 여전히 '대칸'으로 불리었다. 또한 누르하치의 유훈 아래 제국의 황제들은 '만주어'와 '간소한 생활' 등 만주족 본연의 생활 풍습과 정신을 잃지 않고자 노력하였으며, 이런 창업정신의 계승이 청제국을 '중국 왕조'이면서도 '세계 제국'인 키메라로써 성장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세계의 지배자이면서도 상대적으로 검소하였던(실제로 강희제는 조선에 보내는 칙사에게 가마를 타지 말고 만주인의 기상에 맞게 말을 타고 갈 것을 명령하였다.) 강희, 옹정 시대의 전통을 버리고 중국 풍의 화려한 과시와 사치를 시작한 건륭 후반기부터 청 제국의 와해가 시작된 역사를 통해, 조직의 영속성에 있어 governance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팔기'라는 머리와 '18개 직성(중국)'이라는 몸통을 가졌고, 만주, 몽고, 티벳, 서장 등 서로 다른 유전자를 팔과 다리로 가졌던 세계 제국, 다이칭 구룬을 다시 이해 함으로써 오늘 날 중국이라는 국민국가의 탄생 이념과 티벳, 서장에서의 갈등 상황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과연 중국이 도입된지 사실상 100여년 밖에 안된 '새로운 중국(청 계승)'의 이념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을지, 그런 상황에서 타민족에 국가적 통합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옳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 또는 전 지구적 제국화 과정에서 민족의 소멸과 통합이 결국 필연적인 일인지 등 다양한 의문점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