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견본집 K-포엣 시리즈 8
김정환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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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 시인의 [자수견본집]

 

최근 들어 가장 어려운 시를 만났다. 아픈 시를 만났다.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어 클래식 음악 해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시인, 영어 번역가로 그의 이름으로 검색하면 그의 저작보다 번역물이 더 많이 검색되어 나온다 유명한 그를, 나는 시집이 아니라 클래식은 내 친구로 먼저 만났다. 그 책이 처음 나온 때가 1997년경이었는데 그때 나는 클래식에 막 입문하고 있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과 21번에 푹 빠지면서 노란 데카 테이프가 닿도록 돌려 들으며 시간을 흐르게 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클래식은 내 친구라는 클래식 입문서를 1권과 2권 차례대로 내놓았고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며 음악의 초보 딱지를 떼어냈다.

 

그러나 그 후로 그와 나는 어떤 책으로든 만나지 못했는데, 거의 20년만에 이번 자수견본집이라는 한글과 영어가 동시 수록된 시집으로 만나게 됐다. 클래식 음악이 뭔지 모를 때 클래식을 들으면 시끄럽거나 잠오는 음악, 둘 중의 하나로 들린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여름방학 숙제가 클래식 라디오 채널에서 매일 클래식을 한 곡씩 듣고 음악감상문을 적어가야 하는 게 있었는데, 그때는 클래식이 잠오는 자장가와 같았다.

 

만약, 시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시를 안다고 해도, 지금까지 부드럽고, 언어의 연결이 일반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않은 시를 읽어왔다면, 내가 고2때 클래식을 이해했던 것처럼, 이번 김정환 시인의 자수견본집시집은 그렇게 읽힐 수 있다. 난해하거나 모호하거나, 시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시.

 

책 표지 뒤에는 박수연 문학평론가의 시 해설 중 일부가 발췌되어 있는데 독자들은 이제 김정환의 시를 하나하나의 구절로도 읽어보아야 한다는 뜻이다는 글에 밑줄을 그어야 할 것이다. 문학평론가의 지적은 매우 정확했는데, 이번 시집은 그의 시를 낱낱이 분해해서 읽어야 오히려 이해가 더 쉬울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번 시의 정체는 뭘까.

시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시를 읽으며 시를 이해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인이 그러길 바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는 반복적인 단어와 구절의 배치, 뒤섞임 등으로 혼란의 상황을 가중시키고 있는데, 그 목적은 바로 독자로 하여금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이고 엉망진창이다. 투명하지 못하고 흐리다.

 

그의 마지막 에필로그 시 손녀 장남감 인형 ON/OFF’를 보자.

 

꿈에서만 있는 미운 다섯 살

손녀를 꿈에 호되게 야단쳤다.

 

그리고 부를 노래를 다 부른 가수

인형을 장난감으로 주었다.

꿈에서만 있는 인형이다. 야단친 게

미안해서 준 건지 주기 위해 우선

야단을 친 건지 여부가 흐리고,

그게 중요할 것 없는 인형이다.

 

 

On/off가 있는 인형이다. 부를 노래를

다 부른 가수이니 On/off가 무슨, 무엇의

on/off인지 흐리고, 그게 중요할 것 없는

(이하 생략)

 

그는 꿈을 꾸었는데 손녀도 꿈에서만 있는 존재이고, 손녀를 울린 뒤 미안해서 준 인형도 꿈에서만 있는 인형이다. 그런데 그가 그 인형을 준 이유가 흐리고, 부를 노래를 이미 다 불러버린 가수 인형이다보니 on/off가 아무 소용없어 흐리다. 꿈이라는 설정 자체가 이미 선명하지 않은 비현실인데, 그 속에서도 모든 게 흐리다.

 

연작시 노인의 책역시 흐리기는 마찬가지다. 1번부터 13번까지 이어지는 긴 시인데 시작과 끝은 모두 흐리다.

 

1.

노년이 나를 씻어낸다. 아주 얇게지만 영혼도 씻어낸다. 흐린 노년이 나를 흐리게 씻어내고 내가 씻긴다 맑게. 죽음은 거울 겉면으로 남을 일. 그 객관으로 정지할 일.

 

 

13.

노년이 나를 씻어낸다. 아주 얇게지만 영혼도 씻어낸다. 흐린 노년이 나를 흐리게 씻어내고 내가 씻긴다 맑게. 죽음 없다. 객관의 정지가

 

연작시 김정환 시인은 황색예수의 민중시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젊은 시절과 젊은 시절 문학은 느닷없는 죽음이 성행했던 부조리의 시대였고 시인은 그 가슴앓이로 시를 뱉어냈다. 그가 스스로 밝히길 내 문학의 젊은 날 공적인 죽음이 숱했고, 거의 연일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연락 받고 10분 만에 추도사를 써 들고 갔다고 말한다. 그에게 느닷없이 사적인 공간으로 침투해 들어온 타자의 죽음은 생경하고 끔찍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 잊은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번 그의 시집이 더 어려운 것이다. 박수연 문학평론가는 매끈한 언어를 선호할 독자들을 고려한다면, 적지 않은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난해성과는 다른 복합성이라고 표현한 평론가의 지적은 정확하다. 그의 시는 난해하지는 않지만 어렵다. 언어가 파편처럼 나뉘어지고 뒤섞여 독자들에게 본질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박수연 문학평론가는 그의 이번 시집에 대해 사회주의의 몰락과 역사 발전에 대한 현실 모델의 파괴 이후 그의 시는 단절되고 파편화된 언어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시를 통해 만나는 것은 결국 언어를 풀어 쓴 시인이다. 우리는 이번 김정환의 파편화된 시집을 통해 그의 아픈, 아직도 젊은 시절 느닷없이 문득 쳐들어왔던 어이없는 죽음에서 한 걸음도 빠져나오지 못한 그를 만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지금 현재 역시, 그때와 달라진 것은 별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생경한 타인의 죽음이 우리를 아프게 하고, 여전히 황색 예수의 광야에서 눈물을 흘리며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프롤로그 시 페넬로페의 시에서 언급한 표제 자수견본집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았다. 시집 제목이기도 한 자수견본집은 그의 다른 시에서 한 번 더 언급된다. ‘자수는 패턴이나 무늬를 뜻하는 것인데, 그것의 견본집이라면 이미 틀에 따라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갈수록 가늘어지는 실이여.

얼마나 더 가야 올 것인가 오고야

말 것이?

내 생애의 선율 투명

자수견본집.

5천 년 뒤에도 내가

살아있을 것 같다.

 

자수견본집은 흐리지 않다. 정확하고 투명하다. 죽음을 노래하지만 그는 정작 5천 년 뒤에도 살아있을 것만 같아 걱정이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이율배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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