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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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 4년은 아무 방해도 없이 한국 소설만 읽었다. 특히나 희곡을 읽는 재주는 셰익스피어를 지나고도 도무지 늘지가 않아, 책장에는 펼치지도 못한 체호프 희곡집만 세 권이 꽂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이 펼친 것이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다. 최근에 영화「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기도 했고, 또 한 번 흥미를 붙이면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탐구하고 싶어지는 기질 덕분이기도 했다. 


 워낙 번역 문제로 시끄럽기도 하고, 또 지난번 김세희의 『항구의 사랑』 논란 때 공식 계정에 올라온 말이 참 가관이라 민음사 책은 꺼리고 있으나, 이번에는 선택지가 크게 없어 민음사판으로 구매했다. 정가는 7,000원이며 인터넷 서점에서 10%를 할인받으면 6,300원이다. 아무리 얇은 책이라고는 하지만, 요즘은 어디에서도 이 가격에 책 한 권 사기가 참 어려워 다시 한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큰 경쟁력 중 하나는 가격임을 실감했다. 출판사에 대한 사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난 민음사가 택한 도전들을 좋아한다. 어느 출판사건 회사의 얼굴이 될 수 있는 세계문학전집만은 늘 가장 안전한 선택인 ‘책다운 책 만들기’에만 집중하는 듯한데, 민음사는 판형부터가 색다르다. 지금에야 현대문학 출판사의 핀 시리즈나 시간의흐름 출판사의 말들의 흐름 시리즈, 1984BOOKS 출판사의 크리스티앙 보뱅 시리즈 등 세로가 긴 책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지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첫 권이었던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가 1998년 발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과감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손이 커다란 여성’으로서 책 시장의 주 소비자인 ‘여성’ 그리고 ‘여성의 작은 손’을 메인 타깃으로 한 2000년대의 책 시장의 전략을 좋아하지 않지만, 여전히 소설책보다는 시집을 떠올리게 하는 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독특한 판형은 ‘고유하다’라는 말 이외에는 대체할 수식어가 없는 것 같다. 특히나 ‘한 손으로 잡고 읽기 쉬운 사이즈’라는 이점은 얇은 책인 『고도를 기다리며』와는 정말 최고의 시너지를 발휘해 단테의 『신곡』을 읽었을 때와는 달리 읽는 내내 편안했고 종종 감탄했다. 


 위의 판형에 대한 고집이 이번에는 약이 됐다면, 표지에 대한 고집은 독이 됐다. 사뮈엘 베케트의 생전 사진을 앞표지에 그대로 실었는데, 저화질의 사진을 억지로 늘려 사용한 탓인지 인쇄 품질이 지나치게 낮다. 특히나 베케트의 귀와 눈썹, 턱과 머리카락 부분은 모자이크처럼 자잘하게 깨진 픽셀들이 고스란히 보인다. (80쇄, 2021년 9월 발행 기준) 요즘에는 포토샵으로도 손쉽게 화질을 높이는 작업을 할 수 있기에 이런 디테일은 다소 아쉬웠다. 


 양장 제본 대신 무선 제본을, 무거운 하드커버 대신 휴대가 용이한 소프트 커버를, 가름끈 대신 넓은 날개를, 오로지 역자의 해설과 연보만을 남기고 모든 불필요한 디자인 요소를 없애는 대신 저렴한 가격으로. 개인적으로 세계문학전집을 출간하고 있는 출판사 중에 모든 밸런스를 가장 잘 캐치한 건 이번에도 문학동네라고 생각하지만, 이처럼 민음사는 민음사만의 고유한 특색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우연히 구한 53쇄 (2013년 1월 발행)와 비교해봤을 때 많은 점들이 바뀐 것 (표지의 네모 모형을 삭제, 쪽번호를 본문 하단으로 옮긴 것, 내지로 사용된 종이 재질의 변경 (한 손으로 잡고 읽었을 때도 잘 넘어가는 얇고 가벼운 종이), 대사를 말하는 인물들의 폰트 및 굵기, 간격 변경 (희곡이므로 무척 중요하다), 줄 간격 늘림 등) 을 보면 아직까지도 지속적으로 편집을 수정하며 독자들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작업에 힘쓰고 있는 것 같아, 책에 담긴 편집자들의 노력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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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냐는 질문에 작가가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답한 일화로도 유명한 이 작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화제는 순식간에 변하며 인물들은 순식간에 잊는다. 의미도 없는 대화를 끊임없이 주고받고, 마땅한 대사 한 줄 없이 노예로만 부려지던 캐릭터는 돌연 두 장에 걸쳐 장황한 생각을 늘어놓는다. 다음날이 되자 누구는 눈이 멀고 누구는 말을 잃는다. 분명 어제 본 것 같은 소년이 자신은 모른다 말한다. 신발을 가지고 씨름을 하다가 장난을 치다가 욕을 하다 춤을 추기도 하고 자살을 도모하기도 한다. 그 모든 정신없고 소란스러운 가운데에도 단 하나, 관객과 독자가 잊지 않는 유일한 생각은 바로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고도는 누구인가.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모두 한 번쯤 생각해봤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는 옮긴이의 해설에서 찾았다. 누군가에게는 구원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자유라고 했으며, 누군가는 빵이고 또 희망이라고 한 고도는 나에게 있어 기다림이라는 행위의 관념그 자체가 되었다. 다시 말해 나의 고도는 그저 어떤 한 점이 되어줄 뿐, 누군가의 안에서 무엇으로 표현되더라도 결단코 이상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고 느꼈으며, 오래 생각하고 집중했던 것은 그 기다림을 이행하고 있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가진 인식이었다.

 

 작품 뒤에 실린 오증자 역자의 해설 중 168쪽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사뮈엘 베케트가 비점령 지역인 남프랑스 보클뤼즈 농가에 피신 생활을 하던 중, 당시의 경험이 고도를 기다리며의 밑그림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피신 생활 중 무엇을 보았을까. 어떤 이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며 매일 같이 수십만 명이 죽어나가는 소식을 들으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2022년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기다리는 누군가에 대해 생각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을 혼자서, 때로는 둘이서 계속해내 가는 누군가를. 강렬했던 처음의 감정은 점차로 희미해지고, 더는 목적이 아닌 습관처럼 기다림을 이어나가는 어느 나이 든 누군가를. 이 소설의 두 주인공처럼 이제는 기다림이 숨을 내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느껴져 언젠가는 내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조차 망각하고, 어느 때는 이 맹목적인 행위에 화가 나기도 했다가 결국에는 그를 포기하고 나면 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래도 기다려야지,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어느 사람을 생각했다. 오지 않는 그것이 원망스럽지만, 그것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며 자신들의 기다림에 가치와 정당성을 부여받고 다시 말해 위로를 얻고, 그렇게 매일의 불안함을 조금씩 녹이는 어느 사람들을. 그들이 있는 곳에 고도는 없지만, 한편으로는 오로지 고도만이 가득 존재하는 그곳의 풍경을. ‘기다려야 한다.’라는 인식은 있으나, 기다려야 하는 이유도, 그의 모습도, 모든 것들이 희부옇게 흐려진 정신을. 자살을 입에 올리는 것이 너무나도 가벼울 정도로 의미도 미련도 없는 생이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는 어느 삶의 형태를. 1939, 남프랑스의 피신처에서 그들이 그토록 하염없이 기다리던 건 무엇이었을까. 고도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랑하는 이의 생사를 알리는 소식, 종전 선언, 당장 먹을 내일의 식량, 그 무엇이든. 1957년 어느 교도소에서 고도는 사회이자 바깥세상이자 자유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20221, 당신의 고도는 무엇인가.

 나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영문도 모르는 채 누구인지도, 이유도 모르는 채 디디와 고고와 함께, 고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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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 1. 읽는 동안 불현듯, 내가 가장 사랑했던 2000년대의 황정은 작가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파씨의 입문에 담긴 단편들이. 그저 블라디미르의 애칭이 디디의 우산에 등장하는 디디와 같아서일지도, 말이 없던 럭키가 쏟아내는 생각들이 야행에서 책으로 시작되는 곰의 생각과 닮아서일지도 (구조 자체는 대머리 여가수와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목적은 흐려진 채 점점 자신을 잃어가면서도 이유도 모르고 무조건적인 기다림을 이어가는 그 애처로움이 대니 드비토의 유라를 떠올리게 해서일지도 모른다. 황정은은 한 번 한국 문학을 외면했던 나를 붙잡아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어준 작가이므로 따로 전집 리뷰를 준비하고 있지만, 그저 파씨의 입문에서 파도를 기다리던 파씨가 참 보고 싶어지는 책이었다.

 

 여담 2. 이 책의 늙은 두 부랑자들을 보며 우리나라의 부랑아들을 생각했다. 1975, 형제복지원 사건을 떠올리며 적어도 이 부랑아들은 거리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씁쓸하고 웃음이 샜다.

 

 여담 3. 이 책을 지금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십 대에 읽었던 데미안은 내 이십 대 후반에서야 제대로 닿을 수 있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며, 데미안을 읽은 누군가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무리 유명한 책이라고 해도 나와 제대로 마주하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여담 4. 작중에서 럭키는 벙어리가 되고 포조는 장님이 된다. 블라디미르는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지.’라고 말한다. 세 원숭이를 떠올렸다.


그럼 우리에겐 아무 권리도 없게 됐단 말이냐? - P28

그게 인생이죠. - P80

넌 네가 불행한지 아닌지도 모른단 말이냐? (…) 꼭 나 같구나. - P89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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