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6.10 민주항쟁에 대해 자신은 1987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으므로 정답은 다 대본에 있다고 말한 어느 88년생 배우의 인터뷰가 논란이 됐다. 언뜻 보기엔 무지몽매로 그칠 발언이 수많은 사람들의 질타와 비판으로 이어졌던 이유는 그가 말한 그 대본이 민주화운동 폄훼, 간첩 및 안기부 미화 등으로 국민청원에 오른 작이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이 소설이 더욱 더 반가웠다. 단순히 제주 4.3을 배경으로 한 글이라서가 아니다. 전작 『소년이 온다』를 비롯해 많은 작품을 통해 한강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결국에는 움직이게 하는 작가라는 것에 대한 강한 신뢰가, 나에게는 있었다.


 한강은 이번에도 치열했다. 자신이 상상한 이미지를 조금의 왜곡도 없이 깨끗하게 전달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 결과, 활자보다는 영상에 가깝게 글이 재생된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치밀하고 방대한 묘사들이 마치 눈 결정의 구조처럼 정교하고 아름다워 도리어 압도된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언제는 수천수만의 눈송이가 휘몰아치는 제주의 겨울 풍경으로, 또 언제는 막막한 어둠이 덧칠해진 눈밭 위에 홀로 떠밀린다. 살을 에는 극한의 추위를 느끼고, 모든 잔향과 소음이 눈송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경험을 한다. 그렇게 시각과 촉각에 몰입하는 사이, 어느새 소설은 아주 깊은 곳에 내밀히 숨겨져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이 언급되었던 탓인지 도입에서는 작가의 자전적 체험으로 보여 지나치게 현실감 있게 느껴지기도 했던 이 소설은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몽환성을 띠기 시작한다. 마치 새의 시야를 빌린 것처럼 두 개의 세계가 하나의 상으로 맺힌다. 저마다 생의 한계까지 내몰린 경하와 인선은 생명과 죽음의 경계, 그 어드메에서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 같은’ 상태 (p.114) 로 이 작품의 마지막 주인공, 정심에게로 독자를 데려다준다.


 중간중간 제주 방언으로 적힌 이탤릭체의 문단들이 미처 삼키지 못한 덩어리들처럼 턱턱 걸렸다. 낯설게만 보이는 외딸은 섬의 언어. 신중을 기해 그 뜻을 유추하는 과정에서 귀로 듣기보다는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작가가 말했듯 이 소설의 짝과도 같은 『소년이 온다』를 숙명처럼 떠올린다. 전라도 방언으로만 쓰였던 먹먹한 6장을. 나는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한강이 작가로서 꾸준하게 추구해왔던 관념의 집대성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검은 사슴』에서 보았던 눈 내린 연골의 적요한 밤,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보았던 정희와 인주의 유대,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에서 보았던 남겨진 이의 애도, 『소년이 온다』에서 보았던 어룽거리는 촛불과 새, 『흰』에서 보았던 수의가 되어버린 하얀 배내옷까지. 그녀가 이전부터 꾸준하게 해왔고, 또 해나갈 것들을 가득 담아 적은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책을 읽으며 그 어떤 불같은 고통이 있더라도 반드시 이 이야기를 전해야만 한다는 꿋꿋한 사명감이 아닌, 서로의 몸에서 훼손된 채 침수되어 있던 자리들을 발견하고 느릿느릿 쓸어 만져보다 천천하게 기워가는 지극하고 다정한 사랑을 느꼈다. 비록 그 과정에서 망설이고 고립되고 절망하고 포기하려고도 하지만, 결국에는 손을 잡을 것을 다짐하며 작품은 매듭지어진다. 작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잊지 않겠다는 애틋한 결의로 남긴 채로.


 물이 순환하는 것처럼 역사는 순환한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기에 모른다는 것은 방자한 태만이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기에 더욱 더 필사적이어야 한다. 생각해야 한다. 알아야 하고, 찾아내야 한다. 작별하지 않기 위해. 잊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그들을 애도하기 위해. 그것이 피 흘리는 역사에서 살아서 남겨진 우리들의 몫이다. 


 1월에는 국립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이 소설이 내 안에서 오래도록 흐를 것이라는 반가운 예감이 들었다.



 一粒

잊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부드러움을 잊지 않겠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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