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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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동생이 토익 공부를 위해 책을 주문해달라고 해서 주문도 할 겸 사은품을 받기 위해서는 5만 원을 넘겨야 해서 살만한 책이 뭐가 있나 하고 인터넷 페이지를 넘기다가 요즘 깨나 회자되고 있는 '북유럽'에서 조여정 씨가 소개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를 구매하게 됐다.

 

아직 '북유럽'을 한 번도 보지 않았지만 여기에 소개가 됐다길래 '그래도 뭐 생각이 있으니 소개를 했겠지.'하고 평점 정도만 확인 하고 구매했다. 나의 책 구매에 몇 가지 원칙이 있다면, 별점 9점(혹은 5점 만점에서는 4.2) 미만으로는 구매를 거의 하지 않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서점에 직접 방문하여 책을 보고 구매하는 것이지만 경제성과 시간적인 문제, 그리고 동네 서점에는 없는 책도 많아 항상 인터넷 서점에서 주로 구매하게 된다.

조여정 씨가 이 책을 추천했다고 하는데 나는 윤여정 씨가 이 책을 추천했다고 생각하고 구매했다.

올 해도 타인의 성을 멋대로 착각해버리는건 여전하다. 

일부러 방송은 보지 않았다. 방송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서평을 먼저 읽게 된다면 그 서평에 사로 잡혀서 순수하게 내 생각만을 말하지 않고 타인의 감상평과 내 감상평을 적절히 섞어서 마치 나만의 감상인 것처럼 기록을 남길 것 같아서 걱정이 되어, 나는 특히나 이런 미디어에 크게 노출된 책일수록 더더욱 감상평을 찾아보지 않는 편이다.

 


 

책에 [Drei Geschichten und eine Betrachtung]라고 쓰여있는데, 이 독일어 문장을 번역하자면 [세 가지 이야기와 하나의 관점]이다. 이 [깊이에의 강요]는 [깊이에의 강요], [승부], [장인(匠人)뮈사르의 유언], [문학의 건망증] 이렇게 네 가지의 단편이 실린 책이다. 페이지 수도 83쪽 밖에 안 되는 책이라 후루룩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장인(匠人) 뮈사르의 유언]은 맨 처음에 작가가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돼서 곱씹으며 두 번을 읽어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깊이에의 강요]에 대해 얘기하기에 앞서 난 제목조차 잘 이해가 안 갔는데, 냉정히 말하면 어색한 번역이다. '-에의'? '깊이-에의'가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제목부터가 내겐 난해하여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에서 찾아봤다. 

https://www.korean.go.kr/front/onlineQna/onlineQnaView.do?mn_id=216&qna_seq=192866


질문

'일상에의 사유'

위 표현이 '일상에 대한 사유'를 의미적으로 줄여서 표현했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어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표현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안녕하십니까?

표준 국어 대사전에 따르면 '의'는 '앞 체언이 관형어 구실을 하게 하며, 앞 체언이 뒤에 연결되는 조사의 의미 특성을 가지고 뒤 체언을 꾸미는 기능을 가짐을 나타내는 격 조사'로 쓰일 수 있습니다. 이를 고려하면 제시하신 것처럼 쓰는 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견해에 따라 이와 같은 표현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보는 경우도 있으므로, 이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이 '-에의'표현이 너무 어색하고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로 튀고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에 대한'을 '-에의'로 줄인 거라면 비로소 제목에 대해 알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 [깊이에 대한 강요]라고 번역됐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갖었다.

 


 

서두가 정말 엄청나게 길었는데,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어디선가 이와 비슷한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났다. 아니면 같은 뉘앙스의 내용이 담긴 다른 매채를 본 것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이 글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예상하는 그대로 이야기가 진행됐고 젊은 작가는 예상된 죽음을 맞이했다.

삶에 있어서 자아는 얼마나 나약하고 여린 존재인가?

타인의 말에, 타인의 평가에, 타인의 눈빛에 끊임없이 휘둘리고 시험당하고 결국 이 젊은 작가처럼 심각하게 휘둘린 경우에는 자아를 잃어버리고 스스로를 져버리고 낙화하고 만다.

나는 자아가 단단한 사람이라고 믿고있지만, 과연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전혀 아닐까?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최근에 읽는 책중 [웹소설 작가 서바이벌 가이드]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글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처음에 무엇을 하고자 하였는지 그것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달리기만 하다 보면 사람은 자신을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치중해 왜 가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린다. 어느 순간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것, 기억나는 것이 없다면 그대로 무너지기 쉽다. 


당장의 성과와 대중의 요구라는 막막한 것 앞에 서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에는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처음에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 무엇이 나에게 기쁨을 주었는지 돌아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작가에게는 그것이 글의 형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쓴 글은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중략) 그렇다 하더라도 당신에게는 소중할 것이며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중략) 결과가 어떻든 누군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채 주고 같이 즐거워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진짜이다.


요즘 내가 마음에 깊이 되새기는 내용이라 저 내용과 이 책이 오버랩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일단 평론가가 자기딴에는 젊은 작가를 북돋아 줄 생각으로 이런 말(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을 했지만 과연 이 평론가가 뭐라고 젊은 작가에 대해 평가하고 다닐까?

우리는 끊임 없는 경쟁사회에서 타인을 평가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산다.

내가 그 사람을 온전히 알 수 없는데 자신이 무어라고 그런 부정적인 평가를 할까?

내가 항상 경계하려고 하지만 나조차 그게 쉽지 않은데 타인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물론 그 사람이 비판적인 평가를 듣고 싶었다면 모를까, 원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평가하는 상황을 말한다.) 그 사람에 대한 대단한 실례라고 생각한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항상 마음에 머릿속에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나는 장난이었어도 상대로 하여금 불쾌감을 일으키게 했다면 그건 대단한 실례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산다.

저 평론가 역시 마찬자기로 젊은 작가를 북돋아줄 생각으로 평가를 내뱉었지만 그 평가는 그대로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날아가 작가의 마음에 명중했고, 그의 평가라는 독이 그녀의 마음을 장식해 결국 그녀는 죽음에 내몰리게 됐다.

무난하게 생각하자면 이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크게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1. 타인의 생각에 깊게 몰두하여 자신을 잃지 말자.

2. 타인을 함부러 평가하지 말자.

첫 번째 항목에 대해서는 아직 큰 걱정을 안 하지만(추후에는 나도 많이 휩쓸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두 번째 항목에 대해서는 늘 경계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젊은 작가의 죽음을 이 비평가가 다시 다룸으로써 이미 죽은 그녀를 다시금 죽이며 이 처참한 이야기가 끝이 난다.

나의 시선이, 나의 평가가 자칫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으니 항상 조심 또 조심해야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가 하루종일 '삶'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마음이 너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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