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시
아주라 다고스티노 지음, 에스테파니아 브라보 그림, 정원정 외 옮김 / 오후의소묘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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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6 퇴근길 날씨와 아주 잘 어울리는 시화집이다.

수요일 오후부터 하늘에서 눈이 내리며 퇴근길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토해진 나는 까맣게 변한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으려는 구름의 속셈을 깨달았지만 무기력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구름이 지우려고 하는 이 검은 세상에서 빨리 벗어나 따끈하고 말랑한 나의 고양이들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나의 안식처에 빠르게 도달하기 위해 자전거를 끌었다.

 

아직 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내 발자국이 닿은 자리에 뽀득 뽀드득 눈의 비명이 울렸다.

 

눈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지워준다는데 다시 한 번 눈이 내려준다면 그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가시나무 같이 앉을 곳 없고 기댈 수 없는 뾰족하게 돋아난 내 마음도 지워달라고.

내 마음의 결함과 균열들을 가리고 덮어달라고.

 

왜 내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말랑말랑 부풀어 오르지 않고 점점 수분을 잃고 굳어갈까?

내 마음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발효 시켜줄 효모가 무엇일까?

어디에 있을까?

나는 왜 지금 발효 하지 못 하고 딱딱하게 굳어있는 것일까?

무엇이 나를 굳게 했나?

무엇이 나를 이토록 매마르게 만들어 내 마음에 균열을 만들어내고 내 밑바닥을 확인하게끔 하지?

나는 왜 뜻하지 않게 이 미로 속에서 방황하며 출구를 찾지 못 하고 있지?



이 시화집에서 말하듯,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선명해졌다.

평상시에는 내가 볼 수 없는 것들이 눈의 세상에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새의 발자국, 울렁울렁 곡선을 그린 내가 탄 자전거의 발자취.

 


 

내 기억에 의존한다면 몇년간 보기 힘들었던 함박눈이 가져다주는 정취에 취할 법도 한데, 사회생활에 10년 가까이 찌들어버린 나는 이 눈이 반갑기보다는 자꾸 눈이 바람을 타고 내 눈을 때려와서 퍽 난감하기만 했다.

눈에게서 내 눈을 보호하기 위해 눈의 면적을 좁게 만들어도 봤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내 눈을 공격해왔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나는 눈을 휘감고 우리 고양이들이 있는 곳에 도착하니 다들 밖에 눈이 그렇게 많이 내리냐며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엄마와 동생은 신난 강생이처럼 눈을 온 몸으로 반기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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