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시(詩) 경계에서...

시(詩)란 이름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것도 시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은지 오래이고, 심지어 시의 시대은 벌써 끝났다고 이야기하는 이 시대에 말이다. 요즘 사람들은 시를 잘 읽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환갑을 훌쩍 넘긴, 그것도 명사가 기억나지 않는 치매초기 증상의 할머니가 새롭게 시를 쓰자고 결심한다. 왜 하필 이런 인물이 지금에 와서 시(詩)쓰기에 집착하고 시(詩)란 영화의 중심에 있는 것일까.



영화는 어느 여중생의 자살로부터 시작된다. 시각적으로는 강물에 흘러내려오는 여중생의 하얀 등으로부터, 청각적으로는 그 강물의 흐름소리로부터 시작된다. 이상하게도 강물소리는 귀로 들린다기 보다 극장 좌석에 깊숙이 박혀있는 내 몸을 향해 흘러오는 착각에 빠진다.(이런 착각은 영화가 끝날 때 다시 찾아온다)


영화는 크게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여중생의 자살과 관련한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이야기와 뒤늦게 아름다움을 쫒아 시를 쓰고 싶어하는 할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두 이야기의 연결고리에 할머니가 있다.

할머니의 손자를 포함한 여섯 명의 학교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해온 여중생은 자살을 하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그 부모들과 학교측에서는 쉬쉬하며 피해자측과 빠른 합의를 통해 덮으려고 한다. 어떤 부모나 가해학생도 죽은 학생에 대한 연민이나 자식(혹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반성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할머니만이 연민과 반성과 손자에 대한 보호본능 사이에서 갈등한다. 세상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잘못되어 있었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단순논법이 아니더라도 잘못된 세상에서 치매노인은 문득 정상으로 보인다.


시(詩)란 할머니에게 남은 생의 마지막 목적이며, 위안이며, 자신의 화려한 의상처럼 끝끝내 붙잡고 싶은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시를 배워가면서는 정상이 아닌 세상속에서 유일하게 숭고하고 순수한 영역이다.

문화센터에 시 수업을 들으면서 할머니는 시선생의 가르침대로 착실히 자기가 바라보는 것들, 그리고 그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시적 메모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영역 이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세상속에서건 시속에서건 진실 혹은 아름다움이란 늘 이면 너머에 숨어있기 마련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죽은 여중생을 마음으로 보듬으면서(죽은 다리위에서 모자가 강물에 떨어지면서 그리고 강가에서 비에 흠뻑 젖으면서 할머니는 여중생과 심적으로 조우한다), 그리고 가해자들의 몰염치한 행위들을 지켜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의 진실에 접근하는 법을 터득해 간듯 싶다. 그리고 그것은 마지막에 할머니가 지은 시(詩)로 나타난다.


이 영화는 삶과 죽음의 경계, 정상(혹은 비정상)과 치매(혹은 정상)의 경계, 세상의 비루함과 시의 순수함의 경계, 어디쯤 있는 듯하다.



* 배우 윤정희의 영화는 처음이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듯한 비음 섞인 듯 하면서도 천진함을 감추지 못하는 배우의 목소리 톤은 이 영화에만은 딱 들어맞는 것 같다.

* 인상깊은 조연들도 눈에 들어온다. 반신불수로 동물적 본능만 남은 김희라, 서울서 부당하게 좌천되어 온 형사역, 문화센터 시선생으로 나온 어설픈듯 어울리는 김용택 시인, 그리고 그 수강생들 면면.

* 왠지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선입견과 달리 내내 지루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끝나고 나서야 2시간 20분이나 앉아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창동 감독이 노무현 대통령 서거 직후에 시나리오를 썼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사람의 인연을 볼 때 유서 자체가 하나의 시였음을 눈치챈 감독에 의해 시(詩)란 영화는 이미 시작된 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강의 마지막 날 시(詩) 한편을 제출하고 사라진다. 마치 누구처럼.



그곳은 얼마나 적막할까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좋아하는 음악 들려올까요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고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을까요

한 번도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을까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해야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이제 어둠이 오면

촛불이 켜지고 누군가 기도해줄까요


하지만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당신을 축복하리


마음 깊이 나는 소망합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하녀, 불편한 권력의오만

권력이 안하무인적인 무소불위를 표출할 때 나는 그 속에서 오만함을 느낀다. 영화 하녀는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그리고 영화 내내 불편함을 느꼈다.

하녀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간 이유는 칸 영화제 등등 워낙 메스컴에서 난리를 친 것도 있지만 우선 과거 충무로 블루칩인 전도연과 현재의 블루칩으로 각광받고 있는 서우라는 배우의 캐스팅과 제목이나 배우들로 인해 본능적으로 기대하게 만드는 에로티즘 정도였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하녀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에게 대충 그 줄거리는 (자기 방식대로) 예상 가능할 것이다. 원작이 있기도 하거니와 이미 그 단어가 가지는 영화적 의미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춘향전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과 같은 이미지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류의 영화가 흥행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평소 한가하던 극장이 빈자리가 없게 들어찬 건 아마도 그 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에로틱이건, 서스펜스건) 기대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 각자가 느끼는 에로틱, 대저택의 화려한 비쥬얼과 그런 생활에 대한 동경, 하녀에 대한 측은함...등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관점에서 영화를 느낄 것이다. 하여, 나 또한 내가 느낀 권력의 오만함에 대해서만 간단히 메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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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경은 대저택의 웅장함이 아니더라도 영화속 장모의 표현에서 유추해보면 대한민국 최상류층의 최고권력자(대재벌쯤?)의 집안이다. 그리고 그 권력의 정점에는 아버지로부터 그대로 물려받은 이정재가 있다.


영화속에서 이정재(권력)의 오만함은 여러 번 나타난다.


몇 가지만 기억해보면, 하녀인 전도연의 임신을 낙태시킨 장모와 아내의 행위에 대해 이정재는 장모를 불러다가 반말까지 섞어가며 비상식적인 화를 낸다. 그런데 그 화를 내는 이유가 그래도 자기핏줄인 생명의 어이없는 죽음이나 몸을 섞은 여인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다. 한낱 자기의 권력이나 빨아먹으며 작은 권력이나 행세하는 장모가 절대권력인 자신을 무시하고, 도전하는 것에 대한 응징인 것이다.

고대로마의 절대권력이 검투사를 엄지손가락 하나로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듯이, 모든 결정권은 절대권력인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전도연이 자살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이정재가 전도연에게 하는 말이다. 정확히 대사를 기억하진 못하지만 아마 “내가 다 알아서 해결할게. 내가 누군지 알잖아” 같은 대사였다. 영화속에서는 약간 코미디같이 보이기도 했지만 이것 또한 권력의 오만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몸속에 체화된 권력의 오만함은 순간순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는 법이다.

이런 상황은 이정재 또는 서우를 통해서 영화 전반에 걸쳐서 보여진다.


이런 오만함은 섹스할 때도 드러난다. 몇 번의 오럴섹스에서 이정재는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도와 같은 포즈를 취한다. 관객들에게 이정재의 잘 다듬어진 몸을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그 아래쪽에서 머리를 박고 있는 전도연과 서우의 모습과 대비되는 권력의 오만한 향유로 다가온다.


그래서 영화는 보는 내내 불편했다. 감독이 표방했던 에로틱서스펜스에 대한 초반의 맹목적인 기대가 무너지면서(전혀 에로틱하지도 않았고, 서스펜스는 글쎄 뭘 가지고 서스펜스라고 하는지 느끼기 힘들었다)


그리고 슬펐다. 하녀인 전도연이 복수를 다짐하면서 “그래도 찍소리는 내보고 싶었다”고 했는데 그 찍소리라는 것이 절대권력 앞에서는 결국 그런식의 자살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현실이 우리의 일반적인 사회현상과 데자뷰되면서 슬펐다.


또한, 그렇게 (나름대로) 복수를 했건만, 엔딩신을 보면 결국 그 이후에도 그 권력은 그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전히 최고의 장소에서 생일파티를 하며 영어나 나불대고 노래나 흥얼대는 모습에, 결국 아까운 목숨만 버린 것 같아 슬펐다.

* 보태기 :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다큐멘터리같은 오프닝과 실제 사건, 그리고 마지막 엔딩장면... 뉴스에서 보니 감독은 오프닝은 타인의 삶과 죽음에 무관심한 현대사회의 모습을, 엔딩신은 한 여자가 자살하는 과정을 지켜본 어린 아이의 트라우마를 상징적으로 담았다. 고 하였다.

오프닝은 그럭저럭 그렇다고 쳐도 엔딩신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영화를 본 왠만한 사람이면 굳이 엔딩신이 아니더라도 전도연의 자살을 지켜보는(아버지에 의해 이끌려 나가면서 유리 너머에 비친 얼굴) 딸(나미)이 받을 트라우마는 충분히 예상할(상징될) 수 있는 일이다. 자살 장면은 표면적으로는 전도연이 주인공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딸이 주인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도연의 복수가 결국 착하고 순수한 딸에게 치유하지 못할 트라우마를 주고자 함이었나? 라는 착각을 들게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엔딩신은 생일을 맞은 딸의 표정과 시선으로 채워진다. 그것을 통해 치유되지 못하는 딸의 트라우마를 의도했겠지만, 사실 그런 장면이 없었더라도 치유되지 못할 것이란 것을 대부분의 관객들은 알았을 것이다. 오히려 비도덕적인 권력(이정재, 서우)과 순수한 영혼(딸)의 서로 다른 반응으로 보는 것이 나에게는 더 현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