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랜덤하우스 히가시노 게이고 문학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을 여러 곳에서 들었다. 유명한 작가라고. 개중 "히가시노 게이고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있다면"이라는 말에 혹했다. 그만큼 잘 쓴다는 뜻인걸까. 일본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꼭 한 번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책방에서 이 책을 접했을 때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다. 제목과 뒷면에 적힌 글만 읽어보아서는 그에게 가지고 있던 이미지- 용의자 X의 헌신으로 알려진, 추리소설 작가라는 벨류네임-를 좀처럼 떠올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편지', '감옥', '죄지은  형과 사회의 동생'이라니. 딱 신파가 떠오르지 않는가.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읽은 책의 첫 페이지였지만, 의외로 술술 읽혔다. 시작은 형의 시점이다. 그는 막다른 곳에 몰려 있다. 공부 잘하는 동생을 위해 학비를 마련하고 싶지만 몸이 상해 더이상 일용직 노동을 할 수 없다. 형은 생각한다. 자신에게 호의적이기에 인상에 남았던, 한 부잣집 할머니에게서 좀 훔치자고.  잘해준 사람의 것을 훔쳐? 이것은 보통 사람의 사고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것은 범죄자의 시각이다. 내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신이 저지를  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할머니는 살해당했고, 츠요시는 강도살인으로 15년의 형을 받고 감옥에 간다. 그의 동생에게는 "살인자의 동생"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나는 '사고'를 낸 츠요시보다 원치않게 "가해자의 일부"가 된 동생 나오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츠요시는 교도소 안에서 사회와 분리된 채 살아가지만 나오키는 사회 속에서 낙인이 찍힌채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오키는 형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냉정하게 자각하고 있다. 나오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한다. 일을 찾고, 통신학부를 다니다 대학에 편입하며, 성실히 자신의 일을 해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번번히 좌절된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을 그만둬야 했고, 밴드보컬로서 데뷔할 기회를 빼앗겼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했다. 이유는 그 자신에게 있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태도도 "어쩔 수 없었다".


- 사실은 자네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 다들난처한 걸세. 사실은 얽히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노골적으로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거야.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며 대하게 되지. 역차별이라고 하는 말이 바로 그걸세.

- 오해해서는 곤란하네. 자네를 믿을 수 없다는게 아니야. 범죄자의 동생이니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나쁜 짓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그런 비과학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만약 자네를 믿지 않았다면 이 부서에도 두지 않았을 거야. 회사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인간성이 아니라 사회성일세. 지금 자네는 중요한 것을 잃은 상태야."

- 그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착실하게 사회성을 되찾는 거야. 다른 사람과의 끈을 하나씩 늘려갈 수 밖에 없어. 자네를 중심으로 거미줄같은 관계가 만들어지면 누구도 자네를 무시할 수 없을거야. 그 첫걸음을 뗄 곳이 바로 여길세.

나오키와 사회 속의 사람들이 갖는 갈등, 나오키 자신이 가진 불행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츠요시의 "사고"이다. 그는 살인할 의도도 없었고, 강도를 계획한 이유 또한 선했다. 그래서 "사고"라고 지칭할 수도 있다. ... 정말 그럴까? 의도와 동기가 어찌되었던 한 사람의 행위는 주위 사람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다. 츠요시는 행위의 무게를 간과했다. 

 츠요시는 <편지>속에서 일관되게 동생 나오키와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츠요시는 계속적으로 살해된 할머니의 유족에게 참회의 편지를 보낸다. 츠요시가 보내는 편지는 쌍방이 함께 하는 의사소통이 아닌 일방적인 감정의 표현이다. 나오키가, 할머니의 유족이 어떤 마음으로 그 편지를 읽을지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츠요시는 자신이, 또한 그와 함께 나오키가  "사회적 죽음"을  맞았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지켜야할 것이 생긴 나오키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츠요시와 절연하는 것이다. 그가 츠요시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또 하나의 피해자였던 나오키가 가해자인 츠요시에게 행한 최초의 적극적 행위다. 그 편지는 분노도 슬픔도 연민도 아니었다. 혈연으로 이어진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완전한 타인이 되는 것. 그 과정과 의미를 그는 담담하게 적었다.


사람은 행위자이다. 각자의 상황을 바탕으로 일정한 목적을 향해 불규칙한 그래프를 그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어느 목적을 향해 가건 간에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목적을 향한 방법이 어떤 결과를 미치는가를.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런 면에서 완고하다.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이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 <사명과 영혼의 경계>라는 책에서는 더욱 강하게, 사명이라는 이름의 "목적"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 결과가 부정적인 영향을 낳았다면 <사명과 영혼의 경계>에서는 개인이 사익을 위해 추구한 목적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힌다. 그런 이들에게 그는 냉정하다. 나오키가 내내 츠요시와 연락을 끊으려 하고, 조지가 신중에 신중을 가하여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하는 것처럼.

이해도 하고 공감도 가지만 과연 실제로, 그들을 나는 미워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 점은 히가시노 게이고도 마찬가지다. 그처럼 냉정하면서도 결국 딱잘라 끊지 않는다. <편지>에서 나오키가 츠요시를 보았을 때,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그 먹먹함은 "뭐 있어, 그놈의 정때문이지 뭘"이라고 말하는 우리네 정서와 상통한다. 그의 주인공에 이입하여 무척 쓸쓸하고 건조한 기분이 되었다가도 그의 다음 책을 집어들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이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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