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하라가의 사람들 1 - 연애유전학강좌
카야타 스나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출판사 : 손안의책(사철나무)
종류 : 라이트 노벨
스포일러 수준 : 高
평가 : 스트레스 날리기에 딱 좋은(2%는 석연찮은) 글. 역시 카야타 스나코.



<델피니아 전기>를 쓴 작가라고 하면 라이트 노벨쪽에서 아는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그사람이 쓴 책이다. 학교 도서관에 <델피니아 전기> 전 권 옆에 나란히 꽂혀 있었다. 주저함이 없이 집었다.

다정다감한 할머니에 외국 출장이 잦은 아버지, 대범한 어머니, 나이차가 많이 나는 장녀와 장남, 그리고 세 쌍둥이 아들딸들.

초반에는 가족과 닮지 않은 외모 때문에 고민하는 큰곰 마사미(남)와 그를 지키듯 감싸는 미야코(남)&다케루(여)가 초점이 되기에, 소프트한 XXX물이라고 생각했다. 세 쌍둥이라면 확실히 이상하고, 덜컥 혈연이 없다거나 친척쯤 된다면 바로 그쪽으로 빠지기 딱 좋은 설정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권수를 넘어갈수록 뭔가 심상찮은 내용이 나온다.

쌍둥이에 한 명이 다른 배에서 나온 자식인 건 맞지만, 얼굴이 닮은 미야코와 다케루가 쌍둥이인게 아니라 다케루와 미사미가 쌍둥이다. 게다가 무려 그 쌍둥이는 장녀 마아코가 17살 때 낳은 자식이다. 왜 호적에 세 쌍둥이로 올려놓았는고 하니, 마아코의 약혼자가 남자와 썸씽이 생겨 마아코가 파혼을 놓았기 때문에 어머니 유타카가 아이를 낳는 시기와 겹치는 덕분에- 유타카의 호적으로 함꼐 올라간 것이다. 이 사이에 또하나의 사실이 밝혀지는데, 레이 또한 어머니 유타카의 아들이 아니다. 사실 아버지 후(유미였던가? 어쨋든 여자 이름)에게 동생이 있는데, 좋아하는 여자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가 14년 만에 레이를 남기고 교통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레이가 자연스레 이집의 장남으로서 통하게 된 것이다.

이런 콩가루 같은 가족은 동생가족이 교통사고로 죽어버리거나 할아버지가 집앞에서 차에 치어 즉사해버리거나 아버지가 체제중인 곳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거나 딸이 고등학교 1학년에 애가 생겼다거나 쌍둥이의 친아버지가 찾아오거나 폭군같은 레이의 외할아버지가 레이를 정략결혼 시키려 하거나- 하는 보통사람은 거의 겪지 않는 상황을 겪으며 더욱 온 가족이 똘똘 뭉쳐 대항한다. 뿔뿔이 흩어져 있어도 사건이 생기면 전 일본에서, 전 세계에서 모든 일을 내팽개친채 긴급 소집되어 앞날을 의논한다.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지나치지 않은가?

<카라하라 가의 사람들>은 전형적인 가족지상주의적 가치관을 배경으로 한다. 그 가족은 당연히 혈연을 기본으로 하지만, 그것은 또한 가치관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로 제한된다. 이런 면에서 '가족원의 행복'을 중시하는 키리하라가와 '가문의 권위'를 중시하는 산죠가(레이의 어머니 가문)는 뚜렷이 대비된다. 카라하라가의 사람들은 가족 개개인을 중요시하고, 보호하고, 그들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 때문에, 카라하라가의 사람들은 사회적 편견과 고정관념, 혹은 일반 상식과 부딪쳐야 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온다. 그래서 카라하라가의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세 갓난 아이를 돌보기에 슬퍼할 정신이 없을 정도로 감정의 전환이 빠르고, "딸의 혼사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유로 유럽 구석에서 하루만에 집으로 돌아오더라도 짤리지 않을 정도로 능력 있고 똑똑하고 미인(외면적 카리스마)이어야 하며, 아이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이라도 찌를 만한 "각오와 기백이 있어야 하고, 그외 개방적 사고, 약간은 개인주이적이다 싶을 정도의 냉정한 통찰력, 전화받침대를 내던지거나 결혼식을 보름만에 해결지어버리는 행동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가족 개개인은 "가장 행복한 상황"을 만드는데 있어서 사건 당사자가 그 상황에 있어서 가장 감정적으로 충실하고, 확고한 의지(고집)을 가지고 있으며, 그 행동에 따른 책임을 인지하고 수용할만한 식견과 능력이 있음이 전제된다. 만약 없다면- 당사자가 극구 반대하더라도 상황의 결정권은 "가족 구성원 전원"에게로 넘어간다. 마아코가 쌍둥이를 낳고 난 뒤 아이들을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음에도, 당시 가족의 실세였던 유타카의 "미혼모의 몸으로 아이들을 기르는 것은 마아코를 위해서나 아이들을 위해서나 무리다" 라는 생각에 따라 마아코의 의견은 기각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14년이 지난 뒤, 아이들은 납득하고 마아코도 나름대로 상황에 만족하고 있으므로- 윈윈 전략이었다고나 할까. 정말 이상적인 가족이 아닐 수 없다.

문제가 있다면, 가족의 가치관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그 가족의 구성원들이 좀체로 외부의-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배우자감을 찾을 수 없다는 것 정도일까. 다케루와 미야코는 '외부인'임에도 자신들과 거의 유사한 마사미를 사랑하고(그들은 어렸을 때 형제중에 쌍둥이가 아닌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는 그것이 외모가 다른 미사미라고 단정지어 버렸다), 장녀 마아코는 가족의 '장남'이긴 하지만 호적 상 형제는 아닌(정확히는 사촌인) 레이와 결혼한다. 이유는,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감정은 없지만 말이 통하니까, 랄까.

한가지 더 쓰자면, 캐릭터는 그놈이 그놈 같았다. 마아코를 제외하면, 다들 정말이지 사람같지 않다. 너무나 '이상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붕떠버린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감정이 너무나 잘 제어된다는게 현실성이 없었다. 그나마 마아코는 가장 감정에 충실한 사람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유일하게 희소성이 있었다.

* * *

분석은 이만하면 되었고. 일본과 비슷한 배경이면서, 가족 중심적인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은 것이 사실이다. S쪽으로 갈 거라는 고정관념을 실감나지 않는 설정이지만서도 잘 짜여진 구성으로 깨뜨리는 것부터 신선했고, 캐릭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심한 말-고정관념을 산산조각 내는 말들-을 하거나 거침없이 행동하는데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만화적인 과장 행동도 즐거웠다. 무엇보다, 이 작가는 상황을 재미있고 설득력있게 쓰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당연히 XXX물로 갈거라는 기대를 이런 평범한 소재로 산산조각내버렸다는게 분했다. 난 정말 기대했는데. "이럴 거면 도대체 왜 XXX소재를 집어넣은거야!" 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다. 일반독자에게는 반감이고, 이런쪽을 기대한 사람에게는 욕구충족이 안될텐데.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 p.s : (또 한번 분노하며) 도대체, 그 부제는 왜 단거야! <연애유전학강좌>, <연애심리학 입문>? 다 집어치우라고! (빈정빈정) 표지는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