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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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평, 서른의 반격, 은행나무

지하철은 굉음을 내며 속도를 높였다. 머리 위로는 지금쯤 어느 동네를 스쳐가고 있을까. 휘어지고 꺾이는 파동을 느끼고 있자니 문득 내가 도시의 피부 밑을 떠다니는 기생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상에서 자동차를 타거나 빠른 걸음으로 걷는 사람들 중 자신들의 발밑에 요란한 전동차가 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할 사람이 오늘 하루 몇이나 될까. 알면서도 모두들 알지 못한다. 혹은 잊고 산다. - p.24

아빠 세대와 우리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방식은 그런 건지도 모른다. 각자의 세대가 더 힘들다고 주장하고 그에 비해 상대의 세대를 쉽게 얘기하며 평행선을 달린다. 그런 걸 보면 삶을 관통하는 각박함과 고단함 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공통적인가 보다. - p.127

가족은 원래 그렇다. 같이 있을 땐 으르렁거리다가 헤어질 때쯤에서야 비로소 짠해진다. - p.128

지환이 대신 버려달라며 놓고 간 안경을 잘 닦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제 녀석은 세상을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으려나, 이삼 만 개쯤되는 픽셀 수준의 눈을 가진 잠자리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 너무도 다를 거다. 그렇잖아도 사리에 밝은 지환이 세상의 모공 속까지 들여다 볼 미래가 별로 반갑진 않았다. -p.128-129

인터넷을 통한 선동은 너무 흔한데다 너무 쉽게 꼬리가 잡혔고 너무 실패가 많았으며 너무 빨리 사그라졌다. 특별한 방식으로 티나지 않게 끈질기게 행동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 부당한 권위로 이용해 세상을 뻣뻣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대상들이었으며 그들을 곤란하게 하고 면박을 주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다. - p.129

어쩌면 정진 씨를 만날 때마다 바랐었는지도 모른다. 정진 씨 같은 건 없다고 말해 줄 사람이 있기를. 혼자 있지 말라고, 밥을 같이 먹자고 말해 줄 사람이 있기를. 혼자 있지 말고 함께 하자는 손길을 내밀어 줄 누군가가 있기를. - p.136

가진 게 없어도 모든 걸 그만둬야 할 때가 있다. 모든 것을 소거하고 오직 나 홀로인 시간으로 침잠할 시기가 청춘의 배부른 핑계라 험담하는 이도 있을 거다. 그런데 그랬다. 혼자 밥을 먹거나 영화를 보는 그런 혼자 말고, 진짜 혼자의 시간이 필요했다. 유일한 핑계는 누구나 한 번 쯤 그런 때가 온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그게 지금이었을 뿐이다. - p.219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지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 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 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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