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슬럼버
나카무라 요시히로 감독, 사카이 마사토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이사카 고타로, 이소영, 골든 슬럼버, 웅진지식하우스

평화의 시대에는 누구나 정론을 뱉어낸다. 인권을 주장하고 정공법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폭풍이 일면 이성을 잃는다. 무엇이 옳은지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소동에 휩싸인다. 다 그런 법이리라. - p.105

“우리도 너무 익숙해. 너무 오래 있다 보니 함께 있는 게 평범해지고, 상대방의 대수롭지 않은 부분까지 눈에 거슬리게 되고.”
“잠깐만.”
“어쩐지 항상, 그냥 둘이 붙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잠깐만.” 아오야기는 손에 든 판 초콜릿을 흔들었다. “말이 엉망진창이야. 앞뒤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이대로는 권태기 부부 같아, 벌써부터.” 히구치가 웃는다. “괴로워졌어.” -p.176

“너, 꿈을 크게 가져.”
아오야기는 웃어야 하나, 고민했다.
“뭔가 쿵 하고 와 닿더라고. 나랑 아오야기 이야기인가 싶어서.”
“소박한 꿈이 어디가 어때서.”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한테서 도장 받았지, 왜? ‘참 잘했어요’ 같은 꽃 도장이나 ‘잘했어요’ 같은 도장.”
“받았지.”
“우리는 이대로 함께 있으면 늘 ‘잘했어요’에만 머물 것 같은 기분이 들어.” - p.178

히구치와 헤어지자, 뻥 뚫린 구멍만 남았다. 가슴과 머리에 보이지 않는 구멍이 났다. 그 구멍을 외면한 채 우편물을 확인하고, 쌓고, 들고, 달리고, 운반했다. 몸을 움직이는 직업이라 천만다행이라고 느끼면서도, 배달 중에 이를테면 거대한 그레이트 피레네에게 질질 끌려가던 부인이 단념한 채 더는 줄을 당기지 않고 마치 수상스키라도 타듯 몸을 맡긴다거나, 고층 빌딩의 창을 닦던 청소부가 커다란 유리를 사이에 두고 실내 여사원들과 눈이 맞으면 어색하게 인사하거나 하는 재미있는 광경을 보게 되면, 그런 이야기를 들려줄 히구치가 없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만 주저앉고 싶은 때가 많았다. -p.179

“결국 사람이란 가까이에서 함께 지내는 연장자의 영향을 받아요. 초등학생이라면 6학년이 가장 연장자죠. 그렇다 보니 6학년은 자신의 감각 그대로 행동하죠. 하지만 중학교에 입학하면 중학교 3학년이 최고 연장자예요. 그렇게 되면 중3들의 감각이 이 친구들을 자극하죠. 싫든 좋든. 한창 사춘기를 겪는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이 친구들의 본보기가 되는 거죠. 그래서 한 살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도 감각적으로는 세 살 차이가 나는 거예요.” -p.258

신경 쓰지 않으면 점점 더 아저씨가 된다니까. 언덕길을 굴러 떨어지듯이 금세 아저씨가 된다고요. - p.320

“여자 친구란 거, 사귈 때는 지겹도록 붙어 다니고 서로 모르는 게 없으면서, 헤어지고 나면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사이가 되나 봐요.” - p.329

“추억이란 건 대부분 비슷한 계기로 부활하는 거야. 내가 떠올리고 있으면 상대도 떠올리고 있지.” - p.356

소리가 위장까지 울려 퍼진다. 어두운 하늘에 순간 커다란 꽃이 핀다. 팔랑팔랑 아래로 떨어지는 꽃잎의 소리가 기분 좋다.
연거푸 솟아올라 불꽃이 몇 겹으로 포개진다. 산산이 흩어지는 불꽃의 외침이 아래쪽에 있는 아오야기 일당을 흔든다. 풍치를 즐긴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압도적인 힘이었고, 인공적인 별들이 산산이 흩어져 요란스럽게 파열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 p.357

불꽃놀이가 잠시 그친다. 하늘에 고인 폭죽 연기가 바람에 흘러가기를 기다리는 잠깐 동안의 휴식이다.
앞쪽에 있는 폭죽 기술자들이 모두 하나같이 눈을 반짝이며 말쑥한 초등학생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불꽃놀이의 원시적 상쾌함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황폐한 심신과 부질없는 집착을 우수수 씻어내려, 천진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티셔츠 한 장만 걸친 도도로키도 보였다. 그는 아오야기 일당을 힐끗 보더니 흡족한 듯 웃으며 눈 똑바로 뜨고 보라는 듯 손가락 두 개를 내밀었다. - p.358

히구치는 거기서 또, 과거의 기억을, 아오야기의 부모님 댁을 딱 한 번 찾은 날을 떠올렸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떠올렸다기보다 기억의 수위가 멋대로 치솟아 거세게 밀어닥치는 계곡 물처럼 아오야기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 p.393

“정보를 조작하겠다고?”
“이미지.” 사사키는 짧게 말했다. “이미지란 게 그런 거 아닌가? 별다른 근거도 없이 사람은 이미지를 갖게 되지. 세상은 이미지로 움직여. 맛은 똑같은데 어느 날 갑자기 레스토랑이 번창하는 것은 이미지가 좋아졌기 때문이야. 서로 모시려고 아우성치던 배우의 일감이 떨어지는 건 이미지가 나빠졌기 때문이고. 총리를 암살한 남자인데도 큰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은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지.” - p.444

“깜짝 놀랄 만큼 하늘이 파랄 때면, 이 땅이 쭈욱 이어진 어딘가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든가, 사람이 죽고, 학대받고 있다는 사실이 다 거짓말 같아요.” 쓰루타 아미는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
“전에 오노 군이 그랬어요. 날씨가 좋으면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지만, 한편으론 어딘가에서 감당 못할 봉변을 당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고.” - p.520

애인과 친구는 어떻게 다른가 하면 말이야. 예전에 히라노가 주장한 일이 있었다. “애인은 있지, 헤어지면 기본적으로는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 없어” 하고 그녀는 잘라 말했다.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지 않나?”
“절대 무리야. 뭐,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헤어진 옛 남자 친구의 인생은 자신의 인생과 무관해지지. 어디서 뭘 하든 상관없어. 안 그러면, 그 순간 함께 있는 애인이나 배우자한테 실례잖아.”
배우자라는 딱딱한 표현이 재미있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그런데 참 신기하지. 사귈 때는 허구한 날 연락하던 사이인데, 헤어지고 몇 년 지나면 전혀 관계도 없이, 영원히 접점도 없이 살아가니까. 신기하지.” 히라노는 그런 말도 했다. - p.522

아오야기가 도도로키 연화에 다녔으니까 폭탄을 만들 줄 안다는 소리는, 그 공장의 공기를 마시기만 해도 폭탄 박사가 된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 p.530

수년 전, 불꽃축제를 하던 날 도도로키가 뱉었던 대사도 되살아났다. “불꽃놀이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이 보는 거잖아. 내가 보고 있는 지금, 어쩌면 다른 곳에서 옛 친구가 같은 것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유쾌하지 않아?”
옛 애인 아오야기가 센다이 시내 어딘가에서 이 광고를 보고 자신과 같은 기억을 되살리며 같은 감흥에 젖는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쑥스럽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가, 시시껄렁한 생각이라는 감정이 뒤섞인다. - p.534

덮여 있던 상자가 들려 올라갔다. 태양에 노출된 순간, 옷이 물에 흠뻑 젖는 기분이었다. 젖은 옷을 입고ㅣ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느낌이다. 수많은 사람의 감시 속에 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이 노출되는 공포가 스쳤다. - p.555

트럭 엔진이 움직인다. 아오야기는 짐칸 문에서 가장 먼 장소, 운전석 바로 뒤에 털썩 앉았다. 흔들리는 차체가 거대한 육식동물의 심박동 같다. 으르렁 소리를 감추고 숨죽인 채 조용히 호흡하며 체모를 살랑거리는 커다란 짐승이다.
내가 지금 그 짐승 몸 안에 있는가, 싶으니까 잡아먹혀 소화를 기다리는 먹이가 된 기분이다. - p.561

“아니 할 말로, 내가 왜 경찰에 협조해야 되는데.” 이와사키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나직이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할 건가요.”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지금 내편을 드는 건 아주 위험해요, 하며 진지하게 달래봤지만 한 번 결단을 내린 이와사키에게는 시끄러운 설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귀를 파면서 “말이 많네. 난 말이야, 이래 봬도 <쉰들러 리스트>를 보고 감동한 몸이라고” 하고 이를 보이며 웃는다. “박해를 당하는 자를 목숨 걸고 구해주는 파와 구해주지 않는 파로 나눈다면 난 구해주는 쪽이란 말이지.” - p.577

“말이 경찰이지 다들 회사원이나 마찬가지라 혼자 불쑥 총 쏘는 일도 없을 거고, 어차피 지시가 나와야 돼” - p.585

“그 녀석이 폭탄을 만들 줄 안다면, 나는 로켓도 만들겠다. 처음에 방송국 놈들이 왔을 때 물어봤지. 정말로 아오야기가 범인이냐고. 놈들, 대답도 못하고 말이야. 그래서 난, 그 녀석은 그런 짓을 할 놈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해줬지.”
“편집됐어요. 그건 텔레비전에 안 나왔더라고요.” 히구치도 웃음밖에 안 나왔다. 다수 의견이나 여론, 시청자의 흥미나 취향에 맞지 않는 정보는 내보내지 않는다, 아니 내보낼 수 없다는 것이 매스컴의 속성이다. 그래서 매스컴은 안 된다고 말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매스컴이란, 그리고 보도란 그런 것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내보내는 정보의 취사선택은 한다. “아오야기가 범인이라니 저도 믿을 수가 없어요.” - p.601

“우리 같은 대중이란 잘난 놈들이 정한 대로 끌려갈 뿐이야. 우리가 코앞에 닥친 일이나 연애에만 매달린 사이 멋대로 일을 진행하고, 그러다가는 문제가 되는 짐짝만 덜컥 떠맡긴다니까. 그래가지고, 잘난 놈들은 저런 감시카메라 너머에서 놀라 쩔쩔매는 우리를 비웃고 있지.” 모리타는 막대 솔에 묻은 세제에 취하기라도 했는지 허튼소리를 해댔다.
히구치도 모리타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가 “잘난 놈들이 만든 거대한 부조리에 쫓기게 되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도망치는 것뿐이지”라고 진지한 얼굴로 한 이야기는 인상에 남았다. “거대한 부조리의 사냥감이 되면 어딘가 몸을 숨긴 채 달아나는 수밖에 없어.” - p.660

“생각해보면 우리는 말이에요, 멍하게 있는 동안에 법률은 만들어지고, 세금이나 의료 제도는 바뀌고, 그러다 또 어디서 전쟁이 나도 그런 흐름에 반항할 수 없도록 되어 있잖아요. 좀 그런 구조라고요. 나 같은 놈이 멍하게 있는 사이에 자기들 마음대로 다 밀어붙이죠. 전에 책에서 읽었는데, 국가란 국민의 생활을 지키기 위한 기관이 아니래요. 듣고 보니 그렇더라고요.” - p.698

“세금까지 쏟아 부어 대대적으로 도입한 그, 훌륭한 설비란 게 고작 그 정도로 허술해?”
“세금을 쏟아 부어 대대적으로 도입한 훌륭한 설비들은 대부분 다 그래요.” 마치 면목 없다는 듯 그가 말했다. - p.718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가즈의 말을 듣자 쏟아져 나온다. 열쇠를 꽂으면 문이 열리고 안의 내용물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 p.760

“이름도 못 밝히는 너희 정의의 사도들, 정말로 마사하루가 범인이라고 믿는다면 걸어봐. 돈이 아니야, 뭐든 자신의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걸라고. 너희는 지금 그만한 짓을 하고 있으니까. 우리 인생을 기세만으로 뭉개버릴 작정 아니야? 잘 들어, 이게 네놈들 일이란 건 인정하지. 일이란 그런 거니까. 하지만 자신의 일이 남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면 그만한 각오는 있어야지. 버스기사도, 빌딩 건축가도, 요리사도 말이야. 다들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가며 한다고. 왜냐하면 남의 인생이 걸려 있으니까. 각오를 하란 말이다.” - p.788

가슴께에서 목구멍으로 무거운 공기 덩어리가 울컥 솟아올랐다. 그대로 긴장을 늦춘다면 다음 장면은 뻔했다. 목구멍으로 치고 올라온 감정이 눈꺼풀을 흔들고 눈물이 솟는다. 한 번 솟은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자신은 목메어 울 것이 분명하다. 아오야기는 어금니를 물었다. 우는 순간, 분노와 투쟁 의지가 약해질 것임도 알고 있었다. 울면 끝장이다. 울면, 지금 자신을 움직이게 만드는, 그것을 큰 의미에서 연료라고 부른다면, 그 연료가 확연히 줄어든다. - p.790

아오야기는 웃음을 참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자고 마음만 먹으면 웃을 수도 있다. 인간의 최대 무기는, 습관과 신뢰라고 했던 모리타의 말을 떠올린다.
야, 모리타, 그게 아니라 인간의 최대 무기는, 오히려 웃을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그렇게 대꾸해주고 싶었다. 제 아무리 곤경에 빠지고 비참한 상황에 놓여도, 그래도 만약 웃을 수 있다면, 분명 결코 웃을 수 없겠지만, 웃을 수만 있다면 무언가가 충전된다. 그것도 사실이다. - p.799

거대한 존재와 적으로 겨룰 때는 남이야 뭐라고 하건 자신의 정체까지 버려가면서라도 도망쳐야 한다. 홍수를 만났을 때는 짐이고 옷이고 다 내버리고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 잃는 것이 너무도 크지만, 인생을 완전히 잃는 것은 아니다. - p.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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