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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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종의 기원, 은행나무

미사는 한량없이 느리게 진행됐다. 한여름 뙤약볕 속에서 8차선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새끼 두꺼비가 된 기분이었다. 가다 돌아보면 그 자리, 가다 돌아봐도 그 자리. 휘파람새 소리는 아득하게 멀어졌다가 귓가로 돌아오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어머니가 하염없는 두려움을 내 핏속에 쏟아넣는 사람이라면, 해진은 내 심장에 노을 같은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네 편이라고 말해주는 존재였다. 참담하고 추웠던 그날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나는 물을 틀어놓고 얼굴을 씻기 시작했다. 낯선 모습을 지우듯, 구석구석 꼼꼼하게 문질렀다.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통증이 일어났다. 내 삶이 잿더미가 됐다는 새삼스러운 자각이 따라왔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는 법과 더불어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먹는 법과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굶는 법을 동시에 터득하는 것이다. 오로지 인간만 굶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생물이었다. 오만 가지 것을 먹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먹으며, 매일 매 순간 먹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먹을 것을 향한 저 광기는 포식포르노와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이 지상의 생명체 중 자기 욕망에 대해 가장 참을성이 없는 종이었다.

감정을 없애면 선택의 무게는 신발을 사는 일만큼 가벼워진다. 목적과 비용의 상관관계만 따지면 될 테니까. 문제는 상대가 신발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빛이 지나고 나자 시야는 더욱 어두워졌다. 어둠이 너무 짙어서 손을 넣으면 검은 덩어리라도 푹 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안개는 더욱 짙어지고, 함박눈은 눈보라에 가까워지고, 시계 거리는 빠른 속도로 짧아졌다. 묵직하게 출렁이는 바다의 무게가 몸을 짓눌렀다. 나는 점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자주 물 밑으로 가라앉았고, 숨이 턱끝으로 차올랐다. 입을 벌리면 짜고 차가운 물이 가차 없이 들이쳤다. 사지는 뻣뻣해져서 헤엄을 치는 게 아니라 말뚝 네 개로 노를 젓는 기분이었다. 의식은 쇄빙선처럼 시간과 공간을 뚫고 과거로 돌진했다.

파도가 몸을 뒤집었다. 나는 사지를 풀어놓고 흔들리는 물결 위에 드러누웠다. 눈보라가 걷히고 하늘이 열렸다. 별들이 가까이 내려왔다. 빛이 이마에 닿는 순간 어떤 목소리가 은밀하게 속삭여왔다.
어머니가 옳았어.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754018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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