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리센코, 황우석 그리고 국가

'리센코'란 이름을 검색하면 한달쯤 전 칼럼들이 몇 개 뜬다. 지난 12월 중순, 그러니까 황우석 사태가 점입가경으로 치달을 무렵에 씌어진 칼럼들이다.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T. D. Lysenko; 1898-1976)는 스탈린시대 러시아의 농생물학자로서 멘델의 유전학설을 비판하고 소위 '리센코학설'(리센코주의)를 주창한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이 유전자라는 입자적인 것만으로 유전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환경조건을 변화시킴으로써 생물체 내의 물질대사형을 변화시키고 이것이 유전성을 변경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이해하기론 용불용설 같은 것이어서 환경조건에 따른 개체 변이가 유전된다는 식인 듯하다(이른바 획득형질 유전론). 문제는 그의 이 유사-과학이 멘델의 유전학 같은 '부르주아 과학'에 대항하여 스탈린시대에 '프롤레타리아 과학'으로 공인받았다는 것.

물론 이후에 그의 '정치적' 과학은 농업생산 분야에서의 부진으로 인하여 신뢰를 상실하게 되며 스탈린 사후에는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모스크바 유전학연구소장 직에서 완전히 사임하게 되는 것은 흐루시초프시대인 1965년). 하지만, 그의 유사-과학은 유전학 분야에서 러시아가 서구에 최소한 10여 년 이상 뒤처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게 20세기 과학사의 최대 스캔들의 하나인 소위 '리센코 어페어'이다.  

개인적으론 대학원 시절 언젠가 이를 풍자한 러시아 현대소설을 읽을 일이 있어서 리센코주의에 대한 자료들을 모으기도 해서(비록 거기에 대해 글을 쓰는 기획은 엎어졌었지만) '리센코'란 이름이 친숙한데, 그때 가장 읽고 싶었던 책은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사, 1996)의 저자이자 얼마전 <인간복제논쟁>(지식의풍경, 2005)이 번역/소개된 도미니크 르쿠르의 <리센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실제 역사>였다(이 책은 얼마전에 지인의 도움으로 영역본을 구했다). <인간복제논쟁>의 부제는 '인간 복제 이후의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이며 원제는 "Humain, Posthumain"(2003), 즉 '인간과 포스트인간'이다. 이미 '인간복제'의 기술적 가능성과 문제점에 관한 책들은 여러 권 출간돼 있으므로 이 책과 더불어 '테마 독서'를 해봄직하다.

 

 

 

 

흥미로운 건 르쿠르의 책 부록으로 '유나바머'론이 포함돼 있다는 것(*최근에 <산업사회와 그 미래>(박영률출판사, 2006)로 다시 출간됐다). 유나바머? 시사상식인데, 본명이 시어도르 카진스키인 그는 하버드대 출신의 수학 천재로 버클리대 교수를 지낸 인물이다. 극단적인 문명혐오주의자로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지난 1978년부터 1995년까지 16회에 걸쳐서 과학기술 관련인사들에게 우편물 폭탄테러를 감행해왔다. 초기에 주로 대학과 항공사를 공격해 대학(University), 항공사(Airline)와 폭파범(Boomber)의 Un+A+Bomber 를 조합, '유나바머'로 불렸다. 그는 95년 테러를 중단하는 조건으로 유력지에 과학문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과학기술문명비판논문(=유나바머 선언문) 게재를 요구함에 따라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지에 3만5000자의 논문이 실렸다. 동생의 제보에 따라 96년 4월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고 현재 복역중이다. 이른바 '유나바머 어페어'이다. 르쿠르가 인간복제문제와 유나바머 문제를 어떻게 접속시키고 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하에서 옮겨오는 칼럼들은 그런 궁금중과는 무관하며 (아마도 21세기 전반기 과학계 최대 스캔들로 기록될) '황우석 어페어'에 촉발되어 '리센코 어페어'를 상기시켜주고 있는 글들이다. 첫번째 칼럼은 한겨레신문(2005. 12. 13)에 실렸던 김환석 교수의 칼럼 "'영웅만들기'의 함정;이고, 두번째 칼럼은 동아일보(2005. 12. 12)에 실렸던 소설가 복거일의 칼럼 '과학윤리기준 과학자에 맡겨야'이다(복거일은 대표적인 보수주의 논객이다).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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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튼의 결별선언 이후 한 달 동안 전국을 폭풍처럼 혼란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던 황우석 스캔들은 이제 서울대의 조사위원회로 공이 넘어갔다. 따지고 보면 한 과학자의 연구논문에 대한 논란일 뿐인데, 이렇게 ‘핵폭풍’에 비유될 만큼 국가적 재앙의 위기에 몰려 정부와 온 국민이 하루하루 불안과 조바심에 떨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이게 정상적인 나라에서 일어날 법한 일인가?  

정상적인 나라라면 과학계 내부의 자정 메커니즘으로 쉽게 처리되었을 사건이 우리나라에서는 이 지경으로 사회적인 대혼란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은 황우석 교수가 단지 한 과학자가 아니라 이른바 ‘국민적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엠에프(IMF) 사태 이후 깊은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계층과 지역과 성별과 세대 그리고 지지정당의 차이를 뛰어넘어 미래 과학한국의 비전을 또렷이 보여주며 나라의 발전을 이끌고 갈 어떤 메시아와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그는 가난한 농촌 출신이지만 복제와 줄기세포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업적을 나타낸 과학영웅일 뿐 아니라,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조국이 있다”는 그의 발언이 표상하듯 진한 애국주의로 무장되어 있다. 더구나 여기에 전세계 난치병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라는 인류애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위인’이 아니고 무엇이랴?  

황우석 교수가 이렇게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물론 그 자신의 업적과 자질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정부와 언론이 손을 맞잡고 이끌어 온 ‘황우석 영웅 만들기’의 결과 때문이다. 그는 원래 생명공학에서는 주변적 분야에 속하는 동물복제의 전문가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초기에 그는 복제 소 ‘영롱이’의 성공으로 갑자기 생명공학의 스타로 떠올랐고, 심지어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 복제한 백두산 호랑이 새끼를 대통령이 북쪽에 선물할 계획(결국 실패하였지만)에 관여할 만큼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서는 박기영 보좌관과 정동영 장관 등 청와대와 정부 및 여당의 전폭적 지원 아래 배아줄기세포 분야로 그의 영역을 확장하여 마침내 한국의 생명공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세계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과학자를 국민영웅으로 만들려고 국가가 기획하고 개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불행한 결과만을 낳았다. 옛 소련의 스탈린 치하에서 기존의 유전학을 비판하고 획득형질 유전과 이를 이용한 농업증산을 주장하여 ‘사회주의 과학’의 영웅으로 떠받들던 리센코, 북한에서 1960년대 초 원자물리학적 방법으로 경락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주장하여 ‘주체과학’의 영웅으로 한때 칭송받았던 김봉한 등이 좋은 예이다. 이들은 모두 과학적 연구성과가 국가 개입에 의해 부당하게 부풀려져 과학계에서 제대로 검증받을 기회를 못가졌던 것이 치명적 문제였다. ‘영웅 만들기’의 폐해는 또한 특정한 과학자 내지 그의 분야에 국가의 연구자원이 집중되어 과학의 균형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큰 부작용을 초래한다.  

인위적인 ‘영웅 만들기’를 통해 과학을 키우겠다는 국가의 야심은 잘못된 것이다. 과학자 스스로도 과학계의 검증보다 국가의 지원을 통해 영웅이 되겠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과학에서는 위대한 발견 못지 않게 조작과 사기 논란도 종종 나타나는 것이 정상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처럼 온 나라를 뒤흔들지는 않는다. ‘영웅 만들기’는 과학과 국가의 잘못된 결합이고 결국 핵폭풍의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다.

김환석/국민대 교수·과학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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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의 모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종교와 과학의 충돌이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논란도 그런 충돌을 배경으로 삼아 나왔다. 종교와 과학은 진리에 이르는 방법에서 다르다. 종교는 믿음에 의지한다. 과학은 검증에 의존한다. 믿음이 종교가 의지하는 방법론이므로 경전에 계시된 진리를 반박하는 사실이 아무리 많이 쌓여도 그것들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검증에 의존하고 이론들 사이의 경쟁을 허용하므로 과학은 꾸준히 나아간다.

과학의 성취는 필연적으로 종교의 토대를 허물었다. 종교는 과학에 거세게 저항했지만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재판 이후 과학적 지식에 의해 자신의 신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불행하게도 과학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과학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차지하는 자리를 줄곧 줄였다. 과학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중심임을 보여 주었다. 이어 태양 또한 은하계의 뭇별 가운데 하나이고 다시 우리 은하 역시 수많은 은하계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밝혀냈다.

반면에 종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만큼 중요한 존재며 그들의 영혼은 영원히 살아남는다고 안심시킨다. 과학의 성과들을 누리면서도 사람들이 결정적 순간엔 종교에 의지하는 것은 그래서 이상하지 않다.

이번 줄기세포 논란에도 사람의 왜소화가 포함되었다. 진화생물학은 모든 생명체가 첫 생명체의 후손이고 외양에서의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전자를 많이 공유하며 그런 뜻에서 혈연을 지녔음을 이론의 여지없이 밝혀냈다. 이런 발견은 사람은 다른 종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우리의 통념과 어긋난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구호로 흔히 포장되는 이런 통념은 모든 종교의 가장 근본적 신조다. 여기서 다시 종교와 과학은 부딪친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이 과학적 연구를 인도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은 그것이 환상임을 지적하면서 현대의 윤리는 과학적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의 이런 주장은 과학적 연구를 인도할 윤리는 과학자들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필요한 지식들은 과학자들만이 지녔기 때문이다. 과학이 워낙 빠르게 발전하고 전문화가 가속되므로 윤리적 판단에 필요한 지식들을 일반 시민들이 지니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과학이 경쟁을 통해서 발전한다는 점이다. 검증을 통해서 이론들의 우열이 가려지므로 과학은 어느 분야보다도 경쟁이 치열하다. 자연히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내용이 허술한 연구나 이론은 이내 밀려난다. 반면에 종교는 경쟁을 거부한다. 배교나 이단을 허용하는 종교는 아직 나온 적이 없다. 10여 년 전 미국 생물학자들이 황 교수의 연구에 선행적인 배자분할 실험에 성공했을 때 교황청 기관지는 ‘광기의 터널로 들어서는’ 과학자들을 규제하라고 미국 정부에 요구했다.

역사를 살피면 우리는 권력이 잘못 작용하면 과학이 사악하게 쓰인다는 사실을 만난다.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의 생체실험이 대표적이다. 또 하나 교훈적인 사례는 공산주의 러시아에서 트로핌 리센코의 학설이 초래한 비극이다. 스탈린 시대의 농업생물학자인 리센코는 멘델의 법칙에 입각한 유전학설을 비판하며, 환경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생물학적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자연과학마저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바라보던 스탈린 시대의 광풍(狂風)에 힘입어 “채소를 교육시킬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이 공식 이론으로서 지위를 차지했지만 이로 인한 농업 실패로 수많은 농민이 굶어죽었다. 권력이 개입해 이론 사이의 경쟁을 배제하고 특정 이론에 독점적 지위를 부여하면 이런 폐해가 생겨난다.

소비자의 이익을 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은 자유로운 시장에서 나오는 경쟁이다. 이런 이치는 과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종교 등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정부가 나서서 인간 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윤리적 규정을 만든다면 걱정스럽다. 어떤 윤리나 법도 과학의 빠른 발전을 따라갈 수 없으므로 그런 규정들은 윤리를 지키기보다는 과학의 발목을 잡는다. 그저 경쟁하게 하라. 기업가들이든, 과학자들이든.

복거일/소설가

 

 

 

 

두 사람 모두 황우석 사건과 관련하여 국가 개입의 문제성을 지적하고 있지만, 초점은 약간 다르다. 김환석 교수가 "과학과 국가의 잘못된 결합"을 문제삼고 있다면, 복거일씨의 경우는 '국가권력의 개입' 자체에 잘못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유가 특이한데, 국가는 종교 등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라고(그런 연장선상에서라면 복거일의 본격적인 '종교비판론'을 기대해봄직하다! 더 나아가 지극히 종교 정향적인 미국식 정치 마인드에 대한 비판도!). 여하튼 나는 '인용'만 하며,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06. 01. 09.

P.S. '리센코 어페어'에 대한 참고자료로 '맑스 코뮤날레'에서 발표됐던 논문 "혁명기의 러시아 과학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를 옮겨놓는다(복거일과는 다른 결론을 내리고 있다. 비록 '노동자-농민'이 이런 문제에서도 '해결사'가 되어줄 거란 전망에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필자는 김해민(노동자의 힘 회원)님이다.

리센코 사건
1936년, 소련의 과학기술계에서는 특별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모스크바의 레닌 농학아카데미에서 발표된 "유전학에서의 두경향"이라는 논문에서 리센코(T. D. Lysenko)는 환경적 조작과 접목에 의해 유전이 변형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주류였던 멘델과 모건의 유전학을 반진화론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견해가 진정한 다윈주의에 기초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 발표는 과학기술계의 논쟁으로 끝나지 않았다. 1948년에 개최된 같은 회의 에서 우크라이나 농부의 아들인 리센코를 지지하는 과학자들은 멘델의 과학을 "반동적이면서 퇴폐적이다"고 규정하고 그들의 과학을 추종하는 자를 "소비에트 인민의 적이다"라고 공격하며 자신들의 학설을 사회주의 생물학 중 하나로 당이 공식적으로 채택해 줄 것을 요구했다. 당은 이를 승인함으로써 과학기술계의 논쟁은 일단락 되었지만 비극은 시작되었다. 이 여파로 유전학 과목은 폐강되고 관련 연구소는 폐쇄되었다. 과학기술자들 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당의 결정을 찬양하는 공개적인 '사상전향서(?)'를 쓰지 않은 사람은 내쫓기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당시 곡류의 기원에 관한 연구를 통해 현대 식물 육종학에 대한 기초를 세운 과학자 바빌로프도 이 과정에서 실각되고 볼가강 중류의 사하로프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그러나 스탈린 시대에 맹위를 떨치던 리센코주의도 분자생물학의 발전으로 인해 사라지는 운명에 처해 버렸다. 맑스주의 내에서도 리센코 학설은 '맑스주의와 정반대 되는 것' 혹은 '과학적 특성이 결코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아울러 소련의 사회주의 과학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급진과학운동은, 소련의 폐쇄적인 흐름과는 다르게 다양한 논의를 바탕으로 운동의 흐름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급진과학운동은 무려 10여 년 간의 소강상태에 빠져버렸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물론 단편적인 사건으로 혁명기 러시아의 과학기술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스탈린시기에 과학기술은 매우 큰 발전을 이룩한 것 또한 사실이다. 냉전이 살벌한 시기에도 미국의 과학기술자들은 소련의 과학기술 수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자본주의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인정해주는 사건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숙련노동자의 조직된 힘을 분쇄하기 위해 과학기술을 도입해 왔고, 기계에 의한 노동의 대체로 줄곧 노동자들을 소외시켜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혁명기 러시아에서 그것도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소련에서 무엇 때문에 이러한 웃지 못할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것도 20년이나 지속되었을까?

1917년 혁명 후 볼셰비키 혁명 정부 앞에 놓인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레닌은 자국의 정세와 제국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연합군을 탈퇴하였다. 하지만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연합국측의 간섭전쟁과 국내 반-볼셰비키세력들에 의한 격렬한 내전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내전은 혁명을 더욱 힘들게 했다. 산업 생산량은 극도로 하락하였고, 농촌은 황폐화되었다. 이 시기 볼셰비키 정부는 소련의 낙후된 생산력 복구가 무엇보다 절실했다. 레닌은 생산력의 복구를 위해 내전동안 전시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산업경영권을 중앙집권화하고 자주적 '노동자 관리'기구를 강제 폐지시켜 버렸다. 또한 자본주의사회에서 발전된 과학기술 중에서 선진적인 부분 채택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과학적 관리 기법이라는 테일러 시스템을 도입시켰다. "근로인민 자신들에 의해 적절히 통제되고 현명하게 적용된다면 테일러시스템은 전 근로인민의 필요노동일을 훨씬 절감시키는 믿음직한 수단이 될 것이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른바 이 '소비에트 테일러시스템'은 스탈린 시대까지 이어졌다. 1921년 3월 제10차 전당대회에서 전시공산주의 정책을 완전히 폐지하였으나 노동부에서 차등임금제와 식량배급량 차별제, 노동카드와 성과급제 및 반-볼셰비키 성향의 부르주아 지식인과 기술자들을 중용하였다. 이들이 당과 국가의 여러 정책들을 주도하는 핵심적인 위치로 상승하게 되었고 이들은 대개 산업행정, 고등기술교육, 연구 기관, 기획기관에서 최고의 기술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전문성과 영향력을 근거로 정책 결정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려 하였고, 이러한 면들이 기술관료주의적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924년 레닌이 죽은 후,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레닌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급격한 산업화를 주장하였다. 1929년에 스탈린은 집단농장화를 실시하고 대규모 산업화 정책에 착수하게 되었다. 스탈린 시대에는 과학을 생산력이라기보다는 상부구조인 이데올로기로 인식하였다. 모든 과학을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재편할 것을 요구하였고 과학과 철학 모두에 대한 당성의 우위를 강조하게 되었다. 부르주아 기술관료들은 공산주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붉은 전문가'로 교체되었다. 무엇보다도 스탈린은 급격한 산업화를 추진함과 동시에 형식상으로 남아 있던 산업의 집단적 관리 원칙과 노동자들의 복지를 위하는 노조의 마지막 권한을 모두 폐지해 버렸다. 혁명 이후 스탈린 시대까지 흘러온 이러한 사회적 관계들은 혁명기 러시아가 리센코주의를 받아들이게 한 것이었다. 레닌과 스탈린 모두 소련의 낙후된 생산력을 복원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박한 과제로 다가왔다. 레닌은 과학을 생산력으로 주요하게 파악했고, 부르주아의 선진 과학을 수용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입장으로 나아간 것이다. 레닌의 이러한 생각은 이후 과학기술에서 자본주의적 이용만 제거하면 순수한 기술만 남아 이를 사회주의적으로 이용하면 된다는 기술 중립론적 시각으로 비판받고 있다. 스탈린의 경우는 좀더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낙후된 경제의 복원과 반-볼셰비키 성향의 기술관료의 관료주의 폐지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고, 당시 거의 쿠데타적 권력 쟁탈과정은 스탈린으로 하여금 과학을 상부구조인 이데올로기로 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스탈린처럼 과학기술을 이데올로기로 보는 관점은 과학기술과 사회관계를 잘 설명해 주기는 하지만 과학기술의 내재적 발전 경향을 지나치게 무시할 수 있기 때문에 올바르지 않다. 그리고 과학기술은 단지 누가 이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아무리 생산수단이 사회적 소유로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과학기술혁명이 수준 높은 생산력으로 되어 인민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인간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과학기술 생산과정/이용과정(노동과정)속에서 주체와의 관계와 사회관계속에서 판단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즉 과학기술에 있어서도 소유관계의 문제와 아울러 과학기술 생산과정에서의 기술적 조직적 생산관계와 개발 생산단위들 간의 경제운영관계의 문제 그리고 사회관계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사고 해야한다. 결국, 당시 급박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공산당의 잘못된 과학기술에 대한 입장은 소유문제가 해결된 사회주의국가에서도 과학기술을 왜곡시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혁명기 러시아라면 무엇을 했어야 했는가? 어떻게 과학기술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을까? 맑스는 이러한 질문에 한가지 해답을 제시한 바 있다. 맑스에 따르면 진리를 파악하는 자는 관념적 몽상가들이나 학자가 아니라 가장 실천적인 계급, 즉 이론적인 수준에 한정되지 않고 실천을 통해서 실천적 수준에서 진실을 증명코자 하는 계급, 즉 대다수 노동자 계급과 그 노동자 전위세력으로 파악하였다. 맑스는 인식에 있어 실천의 중요성, 그리고 가장 실천적인 계급적 관점을 명확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한번 상상해 보자. 레닌이 자주적 노동자관리기구를 폐지시키지 않고, 노동자-농민의 자주성을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진행했다면, 그리고 스탈린이 그나마 남아있던 노동자들의 마지막 자주권을 박탈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노동자-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주장하고, 개선해 나갈 수 있는 민주적 의사 통로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많은 문제들이 있을 수 있지만 실천적 주체인 노동자들은 테일러 주의를 사회주의에 적용하면서 테일러 주의의 문제점을 실질적으로 인식하고 폐기시키지 않았을까? 그래서 새롭게 사회주의적 노동과정을 구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농민들은 리센코주의의 과학을 집단 농장에 적용하면서 리센코주의의 진실성을 적어도 20년보다는 빨리 확인할 수 있지 않았을까?(강조는 나의 것) 

 

 

 

 

P.S.2. 이너파벨님이 알려주셨는데, 하인리히 야곱의 <빵의 역사>(우물이있는집, 2005)에도 리센코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아마도 '러시아의 빵 - 1917년'이란 절에서인 모양이다. 재인용하자면, 가혹한 기후를 견뎌낼 수 있는 최상의 품종의 밀을 찾아내 육종을 통해 종자로 공급하려는 계획을 가진 바빌로프에게 리센코의 제자가 이렇게 말한다: 

"식물학은 시간이 남아돌지 모르지.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우리는 여기, 러시아에서 혁명 과업을 완수했다. 거만하게도 인종적 특성과 불변하는 성질을 내세우는 멘델의 과학 따위는 우리에게 필요치 않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다. 그렇지 않은가?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살아있는 생명체를 변화시키는데 몇 세대가 걸린다고 믿을 수 없다. 다윈과 마르크스에 의하면 생명체를 변화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환경이다. 새로운 조건에서는 새로운 품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이미 인간을 통해 관찰한 바 있다. 과연 식물이 인간보다 더 반동적인지 살펴보자." 그러자 바빌로프가 응수한다: "만일 환경만으로 생물학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면 아마 리센코는 아무 씨앗이나 집어들고 시베리아의 툰드라지대로 가지고가서 심은 뒤 씨앗이 얼지 않도록 평원 전체를 데워야 할 것이다."

그렇다, 분명 새로운 조건에서는 새로운 품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 새로운 물적 토대는 새로운 인간을 형성해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그 새로운 조건이며 그것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조건 없이 가능하지 않은) '새로운 인간'은 어디서 굴러떨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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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프로메테우스의 모험: 현대 과학기술의 철학적 의미

 

  월간 [사회운동] 3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혹시 공적으로 인용하거나 논의하시고 싶다면,

[사회운동] 3월호를 기준으로 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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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11월부터 3개월 가까이 나라 전체를 뒤흔든 황우석 스캔들은 이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진정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굴절시키고 증폭ㆍ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한 인터넷 여론이나 신문 방송이 더 이상 이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법적인 처리가 이 사건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사건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인식과 해결책의 모색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황우석 팀의 논문 조작과 언론 플레이,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천박한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엄정한 책임 추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1) 황우석 스캔들은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쟁점들을 품고 있다. 우리가 소개하려는 르쿠르의 책은 이 사건이 제기하는 문제들 전체를 정확히 해명하고 해결할 수 있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생명공학의 철학적ㆍ윤리적 함의들을 좀더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성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도미니크 르쿠르(Dominique Lecourt, 1944-)라는 이름은 알튀세르의 사상에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는 국내에 잘 알려진 에티엔 발리바르나 피에르 마슈레와 함께 알튀세르의 주요 제자이자 공동 연구자였던 사람이다. 발리바르가 역사유물론과 정치철학 분야를 담당하고 마슈레가 문예이론과 철학사 연구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면, 르쿠르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또는 현대 인식론 분야에서 많은 공헌을 했다.2)

 

  특히 그는 약관 20대에 바슐라르에서 시작하여 캉귈렘을 거쳐, 푸코와 알튀세르로 이어진 프랑스의 인식론 전통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3) 이 작업이 알튀세르의 초기 문제설정에 따라 역사유물론의 한 분과로서 인식론을 체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바로 뒤에 출간된 󰡔하나의 위기와 그 쟁점: 철학에서 레닌의 입장에 대한 시론󰡕4)이나 󰡔뤼센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실제 역사󰡕5) 같은 저작들은 “이론 안의 계급투쟁”이라는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따라 과학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쟁점을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국가박사학위논문인 󰡔질서와 유희L'ordre et les jeux󰡕6)에서는 논리실증주의와 칼 포퍼,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과잉유물론Surmatérialisme”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7) 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볼 수 있는 철학에 관한 이중의 테제, 곧 변증법(방법)에 대한 유물론(존재론)의 우위, 역사유물론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우위라는 테제 대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핵심을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에 근거를 둔) 철학의 새로운 실천에서 찾으려는 알튀세리엥들의 시도를 집약적으로 표현해주는 개념이다.8)  

 

  알튀세르가 공적인 이론 무대에서 퇴장한 1980년대 이후에도 르쿠르는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과학철학과 윤리학 분야에서 빼어난 저작들을 산출했다9). 90년대 이후 그는 주로 생명과학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이 제기하는 이론적ㆍ윤리적ㆍ정치적 쟁점들을 다루는 데 몰두하고 있다. 󰡔공포에 반대하여󰡕나 󰡔다윈과 성경 사이에 있는 미국󰡕 또는 󰡔생명윤리와 자유󰡕 등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책들이다. 이러한 저작들 이외에도 그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사전󰡕이나 󰡔의학사상사전󰡕 같은 집단 저작을 감수했는데10), 이 책들은 2000년대 프랑스 철학계가 배출한 주요한 성과 중 하나로 꼽을 만한 것들이다.11)

 

  20여권에 이르는 르쿠르의 저작 중에서 국내에 소개된 것은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와 󰡔유물론, 반영론, 리얼리즘󰡕(백의, 1996), 󰡔진보의 미래󰡕(동문선, 2001) 정도니까, 충분히 소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12) 이런 상황에서 르쿠르의 최근의 이론적 관심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인간복제논쟁󰡕은 독자들의 아쉬움을 얼마간 덜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인간복제논쟁󰡕은 2003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으로13), 국내에서는 매스컴에 널리 소개되지 못했지만 르쿠르의 이론적 역량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원서로는 불과 150쪽 정도이고, 여백이 여유 있게 편집된 번역본으로도 180쪽 남짓한 이 책은 분량으로 평가할 수 없는 중요한 통찰을 여럿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생명공학과 관련된 과학철학적ㆍ윤리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국역본 제목이 시사하듯이(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이 ‘인간 복제’라는 한정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체 복제”, “인간 복제”라는 과학적인 현상을 소재로 삼되, 이러한 현상이 함축하는 철학적ㆍ정치적ㆍ윤리적 쟁점들을 포괄적으로 검토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책에서 르쿠르가 제시하는 논점은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생명공학을 비롯한 현대의 첨단과학과 연루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르쿠르는 첨단과학에 대한 과도한 공포나 열광은 사실 기독교 신학의 오래된 두 극단의 표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술과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을 해명하는 일이다. 기술에 대한 도구적 관점과 규범의 절대적 기초로서 인간 본성이라는 관점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입장에 따라 형성된 관념들을 자명한 사실로, 또는 초역사적인 개념으로 오인하게 만듦으로써, 과학 및 기술의 역할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셋째, 현대 과학에 대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왜곡과 오용이 낳는 윤리적ㆍ정치적 폐해를 막기 위해 적절한 윤리적 관점을 제시하는 일이다. 르쿠르는 관개체론(貫個體論)에 입각하여 규범의 발명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1. 현대의 기술신학: 생명 파멸론과 기술 낙관론


  서론격인 「프롤로그」와 유나바머에 관한 부록 이외에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이중의 비판적인 목표, 이중의 투쟁 전선을 설정하고 있다.(하지만 이것들은 실제로는 하나의 동일한 대상이라는 점이 곧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생명 파멸론자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묵시록적인 관점에서 현대 생명공학은 결국 인간 본성을 파괴할 파멸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고발한다. 이들은 심지어 생명공학 연구에 대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생겨난 “반인륜적 범죄”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극단적인 비판을 제기하기까지 한다. 이들이 생명공학, 특히 인간 복제 연구를 두려워하고 그것에 분노하는 이유는 이러한 연구가 자연적인 생명의 질서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복제할 수 있는 사물의 수준으로 타락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인간 복제는 한 개인과 동일한 사본, 동일한 클론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의 정체성과 인격의 동일성 자체를 혼란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가톨릭 교회나 다양한 분파의 생태론자들,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보수적인 정치학자만이 아니라 심지어 하버마스 같은 비판 철학자들까지도 공유하고 있는 이러한 관점은 생명공학이 낳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파멸적인 결과들에 관한 공포의 담론을 조장하면서, 절대적인 윤리적 가치를 통해 이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쪽에는 “기술 낙관론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인공 지능 연구자들이나 로봇 공학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들은 생명 파멸론과는 정반대로 정보통신기술과 생명공학의 발전에서 인류 구원의 희망을 발견한다. 컴퓨터와 로봇 공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내재한 동물성과 우리 육신에서 비롯되는 죽음”(78쪽)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의 진정한 본질인 지능에 영생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수학적으로 정의된 가상적인 생명체가 등장할 수 있는 인공적 조건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인공 생명 연구자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자기 자신을 조직화하고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주위 환경에 다양하게 반응하는 “포스트 휴먼”으로서 로봇 종(種)을 만들어내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결국 2099년에 이르면 ‘인간의 사유는 인간이 만들어낸 지능을 가진 기계의 세계와 융합될 것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조차 심각하게 변화할 것이다.’”(82쪽)    

 

  이 두 가지 관점은 인간의 장래에 대해 정면으로 대립하는 전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전혀 상이한 뿌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르쿠르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관점은 실제로는 동일한 한 가지 경향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학 전통, 더욱이 천년 왕국설에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를 두고 있는 기술-신학적 운동이다. 생명 파멸론이 생명공학에서 신의 고유한 권능에 도전하는 인간의 무모하고 어리석은 “오만”(hybris)를 발견한다면14), 기술 낙관론은 오히려 신의 영광의 표현 및 원초적인 낙원으로 회귀하는 길을 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전통 종교와 무관해 보이는 첨단 과학들이 실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천년왕국설의 이데올로기와 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은 이 책이 제시해주는 중요한 통찰 중 하나다. 


2. 두 가지 쟁점: 기술과 인간 본성


  이 두 가지 관점이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 과학을 적합하게 인식하고 활용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기술신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그리 만만한 과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이는 이 두 가지 관점의 이데올로기적인 지주를 이루는 두 가지 통념, 곧 기술과 인간 본성이라는 통념에 대한 근본적인 쇄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 도구로서의 기술 대 구성적 조건으로서의 기술


  르쿠르는 이러한 기술 신학은 기술에 대한 특정한 관점, 곧 도구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의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19세기의 실증주의 이래 오늘날 과학-기술에 대한 지배적인 관점을 형성하고 있는 이러한 입장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외재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기술은 인간이 지닌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거나 과학적인 지식을 응용하기 위한 도구로 파악된다. 수단 내지 도구로서의 기술은 온전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않지만, 생명공학(및 정보공학과 로봇공학)의 발전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 자신의 본성을 변형하고 파괴할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만들었다.15)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기술의 반란, 도구의 반역을 저지하기 위한 반테크놀로지 혁명을 수행하는 길이다. “유나바머”로 더 잘 알려진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실행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부록」) 르쿠르는 유나바머 사건은 증상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이는 두 가지 극단적인 기술 신학의 충돌이 어떤 결과를 빚을 수 있는지 잘 웅변해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독교 종말론에 근거를 둔 이러한 기술 신학이 또다른 종교적 극단, 예컨대 이슬람 근본주의와 충돌한다면, 그것은 훨씬 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이는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르쿠르는 도구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맞서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 곧 기술은 인간과 외재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인간이 인간으로 성립하기 위한 조건 자체를 구성한다고 보는 관점을 옹호하고 있다(3장). 사실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은 앙드레 르루아-구랑(André Leroi-Gourhan)이나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같은 기술철학의 대가들이 제창한 이래 장 클로드 본(Jean-Claude Beaune)이나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 등과 같은 기술철학자들이 발전시켜온 프랑스 철학의 독특한(그리고 강력한) 전통 중 하나다.16)

 

  르쿠르가 본론에서 자세히 논의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관점은 인류의 발생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및 인간과 기술의 공진화 과정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인간의 개체화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에 의해 뒷받침된다. 르루아-구랑이 체계화한 고고학적 논의에 따르면 호미니드(hominid)가 유인원에서 분화하고 다시 호미니드에서 현생인류(homo sapiens)가 분화되는 과정에서 기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는 이후 인류의 문화가 진화하는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17) 다른 한편으로 질베르 시몽동은 개체화 이론을 통해 인간과 기술의 구성적 관계를 보여준다. 곧 인간은 주변 환경과 무관하게 미리 형성된 존재론적 단위가 아니라 다른 생물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환경과의 끊임없는 교섭 작용에 의해 분화되고 개체화된다. 이러한 교섭에서 기술은 인간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데 본질적인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그러한 환경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기술적인 대상 역시 인간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독자적인 개체화 양식을 지니게 된다.18) 요컨대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이미 기술적 환경 속에서 실존해왔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기술과 더불어 공진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이 인간과 기술의 외재성을 상정하는 도구적 관점만이 아니라 그것에 함축되어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관점 역시 거부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 인간 본성론인가 관개체론인가


  또한 기술 신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특정한 관점 또는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의 자명성을 전제하고 있다. 생명 파멸론이든 기술 낙관론이든 간에, 기술신학은 기술의 발전을 인간 본성의 문제와 결부시킨다. 전자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그대로 방치될 경우에는) 인간 본성을 파괴할 것이라고 믿는 반면, 후자는 인간 본성의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이 다를 뿐, 양자는 과학기술을 평가하기 위한 본질적인 척도로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

 

  사실 인간 복제 기술에 대한 비판가들, 특히 생명 파멸론자들의 역설은 극단적인 유전자 결정론에 입각하여 생명공학 및 인간 복제 연구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생명공학 및 인간 복제에 대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러한 기술적 발전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한 개인과 동일한 복제 인간을 만들어냄으로써, 결국 인간의 동일성을 치명적으로 파괴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복제 기술로 생겨난 사본이 원래의 인간과 정말로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유전적인 정보로 식별되는 한 개인의 유전적인 동일성이 그의 인간적인 동일성 전체를 규정한다는 점(또는 양자가 동일하다는 점)을 전제한다. 돌리의 탄생 이후 미디어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아인슈타인을 복제한다거나 죽은 가족의 성원을 그대로 복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역시 이러한 환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19)

 

  기술 낙관론자들 역시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 따라서 인간에 대한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념을 가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과 하등 다를 바가 없으며 동물과 마찬가지로 유전자의 작용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흔히 이야기되듯이 “침팬지의 유전자와 인간의 유전자는 99%가 똑같다”. 좀더 세련된 형태의 환원론은 사유를 컴퓨터의 모델에 따라 이해하기도 한다. 이는 두뇌의 모든 기능을 수학적 모델에 따라 원하는 정도의 과학적 정확성으로 설명하고, 이를 인공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인공 지능 이론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과 침팬지가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유전적으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과 침팬지는 그토록 다른 것인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극단적인 두 가지 방식으로 해소시켜 버린다는 점에서 생명공학 및 첨단과학이 제기하는 쟁점들을 정확히 다루는 데 장애를 이룰 뿐이다. 다시 말해 이 개념에 의거할 경우 한편으로 인간 본성을 인간 종에게 부여된 선험적 자질로 간주하든가 아니면 이를 유전적 동일성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르쿠르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인간 본성이란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며 초역사적인 보편성을 지닌 자명한 개념도 아니다. 오히려 이 개념은 전형적인 근대적 개념으로서, 중세의 신학적 기초를 대신하여 인간 행위의 규범적 기준을 제공해준다. 문제는 이 개념이 인간의 특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20) 가치나 규범에 대한 절대주의적 태도를 조장한다는 데 있다. 르쿠르는 생명윤리에 관한 담론들이 부정적이고 규제적인 방향 일변도로 진행되는 근본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찾고 있다.21) 

 

  이러한 관점에 맞서 르쿠르는 인간에 대한 관개체론적 관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22) 사실 기술에 대한 구성적 관점은 개인 또는 개체 일반에 관한 관개체론적 관점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관개체론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개체는 개체화 과정 이전에 독립적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항상 개체화 과정의 (잠정적인) 결과로서 실존할 뿐이다. 따라서 선험적인 인간 본성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적인 본성을 인공적인 또다른 본성으로 대체하는 것이 문제일 수도 없다.

 

  (2) 개체는 그의 환경을 이루는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동일성을 갖춘 개체로 성립하며, 바로 이 때문에 타자들을 자신의 동일성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지니고 있다. 이러한 타자들은 반드시 인간 타자들로 국한되지 않으며, 자연적인 타자들이나 심지어 인공적인 타자들, 곧 기술적인 존재자들도 포함된다.

 

  (3) 가치 규범들은 환경과 교섭하는 인간의 생물학적 규준/규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물학적 규준은 선험적이거나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교섭 과정에 따라 변화하며, 따라서 절대적인 가치 규범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관개체론적 이해는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진 인간의 가변성과 역동성을 인간에 대한 정의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불변적인 인간 본성을 가정하고 있는 기술 신학적인 관점보다 더 정확하게 인간의 위치를 개념화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선험적이거나 절대적인 가치 규범(예컨대 선의지라든가 타인에 대한 존중 같은)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첨단 과학이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 적절한 규범적 대응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도 관개체론적인 관점의 강점 중 하나다.


3. 생명공학 시대의 윤리


  관개체론에서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때의 욕망은 선험적인 인간 본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고발하듯이 탐욕이나 이기주의적인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실존하고 진화해가는 인간의 특성을 가리킨다. 르쿠르는 드니 디드로 대학(파리 7대학) 교수답게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디드로(Denis Diderot)의 사상에서 이러한 형태의 인간관을 발견하지만, 사실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에도 완벽하게 부합하는 관점이다.

 

  스피노자가 모든 자연 실재의 본질을 “코나투스”(conatus)로, 그리고 특히 인간의 본질은 “욕망”(cupiditas)로 정의한 것은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 등이 주장하듯이 일종의 소유적 개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또한 이는 들뢰즈/가타리가 1970년대에 제안한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 모델이나 네그리의 스피노자 해석의 영향 아래 일부 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이 지닌 능동적 역량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안된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욕망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환경과 분리하여, 개인이 다른 개인들과 맺고 있는 구성적인 관계와 분리하여 사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곧 이기주의적인 탐욕으로 간주되든 능동적인 역량의 표현으로 해석되든 간에 두 가지 관점에서 욕망은 정의상 개인의 욕망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를 비롯한 최근의 스피노자 연구가 잘 보여주듯이23), 스피노자의 욕망에 대한 정의는 그의 철학의 관계론적 관점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이 욕망으로 정의된다면, 이는 우선 본질 개념에 대한, 그리고 개체의 개념에 대한 본질주의적 이해에서 탈피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 경우 욕망은 인간이 환경과 주고받는 영향의 인간학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의 어휘로 말한다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실재,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변용되며affici”(영향받고), 또한 이러한 변용되기를 바탕으로 환경을 “변용한다afficere”(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인간의 욕망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변용되기/변용하기의 관계망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용(affectio)의 관계는 욕망과 기쁨, 슬픔, 사랑과 증오, 희망과 공포 등과 같은 정서들(affectus)로 변이되며, 이를 통해 각각의 개인은 자신의 동일성, 자신의 개성을 얻게 된다.

 

  따라서 모든 개인은 존재론적 개체로 성립하는 과정에서 타자와의 변용 관계를 필연적으로 함축한다는 점에서 관계론적 또는 관개체적인 본성을 지니게 되며, 더 나아가 항상 이미 타인들과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정서적 관계망(누구도 혼자서 기뻐하고 혼자서 슬퍼할 수 없으며, 더욱이 혼자서 사랑하고 증오하고 희망하거나 공포를 느낄 수는 없다)을 통해 자신의 동일성 내지 개성을 얻는다는 점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내면적인 모습에서도 타인의 흔적을 포함하게 된다. 그렇다면 불변적이고 자연적인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에 의거하여 생명 공학의 발전에 공포와 불안을 느끼거나 그것이 기존의 본성을 전혀 새로운 인공적 본성으로 대체시켜 줄 것이라고 환호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르쿠르는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기존의 생명윤리 대신 관개체론에 입각하여 “규범의 발명”이라는 새로운 윤리적 관점을 제안한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 곧 “자신이 고유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재발견하는 능력”(64쪽)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물론 그가 제안하는 규범의 발명이라는 주장은 자의적으로 이런저런 윤리적 규범들을 만들어내자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이는 윤리적, 사회적 규범들이란 어떤 초월적이거나 절대적인 기초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로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물학적 규준에 의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규준의 변화에 맞춰 변화될 수밖에 없고 또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점이 생명 공학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기초를 둔 일방적인 윤리적 승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개체론적인 관점에 따를 경우 인간 개인은 항상 이미 자기 안에 타자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정의상 양가성을 띠고 있다. 곧 이것은 인간에게 해롭고 악한 것일 수도 있고 유용하고 선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윤리적 규범과 가치 판단의 문제는 외부 대상에 대한 규제나 금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 각각의 개인 내부에 존재하는 비인간적인 요소, 악의 요소를 어떻게 규제하고, 또 유용하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은 그것들이 인간의 존재 자체와 동연적이라는 점에서 절대적인 관점에서는 제대로 해명되거나 해결될 수 없다. 악은 선과 마찬가지로(또는 폭력은 정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재 조건 자체의 일부인 것이다.

 

  따라서 규범의 발명이라는 테제는 생명공학이 불러올 수 있는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경계하고 대비하도록 요구하지만, 그에 앞서 인간의 특성 및 규범의 문제를 좀더 자연적이고, 좀더 적극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인간 복제 및 인공 지능 또는 인공 생명의 과학적 전망이 제시되는 시기에 이러한 관점은 과학기술과 윤리의 내재적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이론적 지주로 삼을 만하다.  


4. 이론적 과제와 전망


  내가 볼 때 이 책의 첫 번째 장점은,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을 17세기 과학혁명 이래 서양의 기술ㆍ과학적 발전의 과정 속에 위치시켜 고찰하고 있으며, 왜 그러한 고찰이 이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에 소개된 생명 복제나 인간 복제에 관한 대부분의 저술들은 현재의 맥락에서 전개되는 쟁점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에 따라 피상적인 현상 기술에 그치든가 아니면 맹목적인 편들기(가령 생명공학은 과학기술 발전의 신기원인가 인류의 재앙인가,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가 아니면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가, 또는 본래적인 자유의지를 갖는가, 배아는 인격체인가 아닌가,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존재일 뿐인가 인격의 존엄성을 가진 존재인가 등)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이 책은 넓은 역사적 시야와 신선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로 문제를 조망하면서 현재의 문제가 어떻게 오래된 신학적ㆍ철학적 쟁점들과 결부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이 문제를 적절한 방향에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술이나 인간 본성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익숙한 관념들이 개조되어야 하고 특히  윤리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물론 내가 볼 때) 보여주고 있다. 생명윤리에 대한 대개의 논의가 이러한 존재론적ㆍ인간학적 기초에 대한 검토 없이 특정한 윤리적 관점에 의거하여 규제적이거나 금지하는 대안들을 내놓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르쿠르의 제안이 얼마나 대담하고 파격적인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이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이를 윤리적ㆍ정치적 문제와 결부시켜 사고해온 저자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제기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동안 국내에는 소개되지 못했던 프랑스 과학철학 및 기술철학의 한 가지 관점을 엿보게 해준다는 점도 이 책이 지닌 또다른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에게 기술의 문제는 그동안 이론적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계에 관한 마르크스의 언급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이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된 소외론 또는 도구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취급되거나 아니면 경제사회학이나 경제사 분야의 부차적인 논의 주제로 간주되어 왔다.24) 가령 과학기술혁명(이른바 “극소전자혁명”)이 생산구조와 노동자 계급의 지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 같은 것이 한 가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 책은 구성적 기술론에 입각하여25) 기술이 사회구조 및 인간의 진화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좀더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좀더 정확한 논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태도라고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르쿠르 책은 (적은 분량의 저작에서는 불가피한 일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 공백을 남겨놓고 있다. 우선 󰡔인간 복제 논쟁󰡕에는, 한 논평자가 지적하듯이, 현대 과학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인 사회 경제적 조건에 관한 논의가 빠져 있다.26) 특히 생명공학과 관련된 핵심 쟁점 중 하나가 특허권을 둘러싼 국가들 사이의, 거대 기업들 사이의 경쟁이며, 이에 따른 자본에 대한 과학연구의 예속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간과해서는 안될 공백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백은 단순한 부주의로 보기는 어려우며, 좀더 내재적이고 심층적인 또다른 공백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근대 과학기술에 고유한 발전(또는 “진화”)의 동역학과 자본주의의 경제적 동역학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과학기술은 대개 생산력의 일부로 간주되었을 뿐, 자신의 고유한 발전 내지 진화의 메커니즘을 갖춘 체계로 인식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술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재 자체의 구성적인 조건을 이루고 있고 인간의 진화 과정과 긴밀한 상호연관 속에서 함께 진화되어 왔다면, 기술은 단순히 도구나 수단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제의 종속 변수 내지 생산력의 일부로 치부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의 메커니즘과 자본주의 경제의 동역학이 맺고 있는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는 분명 쉽게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또한 과학과 기술, 경제가 맺고 있는 상호연관성을 이론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회할 수 없는 쟁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27) 

 

  또한 르쿠르의 작업은 생체정치(biopolitique)의 문제설정으로 보충될 필요가 있다. 르쿠르는 이 책을 명시적으로 생체정치 또는 생체권력의 문제설정과 연결시키고 있지만(26쪽), 이를 구체적으로 이론화하지는 않고 있다. 푸코가 자신의 후기 작업, 특히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들에서 발전시킨 생체권력28) 개념은 규율권력이 개인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데 비해 대중으로서의 인구 또는 “종(種)으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체권력 또는 생체정치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수행되는 규율권력의 실행공간을 마련해주는 (일종의) 거시권력으로 볼 수도 있다. 생체정치는 생명체로서의 인간들의 생명을 규제하는 것을 자신의 고유한 과제로 삼는다. 건강과 질병의 문제나 공중위생 같은 보건복지 및 의료정책에 관한 일만이 아니라 인구조사 및 출산율과 사망률, 평균 수명 등과 같은 인구정책 전반이 생체정치의 주요 과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공학의 문제가 함축하는 윤리적ㆍ정치적 쟁점들은 생체정치의 문제설정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적한 이러한 공백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쟁점들이며,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과학들의 문제를 좀더 포괄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상호 연관성 속에서 취급되어야 할 문제들이다.29) 이렇게 볼 때 르쿠르의 책은 좀더 진전된 연구를 위한 일종의 “서론”으로 읽는 게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이 지니는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좀더 폭넓은 역사적ㆍ철학적 관점에서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인간 복제 논쟁󰡕은 귀중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조만간 좀더 많은 르쿠르의 저서들이 번역되고 그의 연구가 앞으로 좀더 체계화되길 기대하는 것이 필자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1) 󰡔진보평론󰡕 26호(2005년 겨울)는 황우석 스캔들의 초기 쟁점이었던 난자제공의 윤리적 문제와 연구 윤리 문제를 중심으로 “생명공학과 민중운동의 새로운 과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고, 󰡔인물과 사상󰡕은 “한국 사회를 발가벗긴 황우석 신화”라는 제목 아래 PD수첩 보도를 통해 드러난 한국 언론의 과학보도 관행의 문제점을 조명하고 있다. 

2) 1983년 사망한 미셸 페쇠는 담론 분석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해명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La vérité de la Palice, Maspero, 1975; (avec François Gadet), La langue introuvable, Maspero, 1983. 

3) 이 연구는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 박기순 옮김, 새길, 1995 참조. 그 외에도 그는 바슐라르의 과학철학과 시학 사이의 이론적 모순을 해명하고 있는 󰡔바슐라르, 낮과 밤Bachelard, le jour et la nuit󰡕, Grasset, 1974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4) Une crise et son enjeu: Essai sur la position de Lenine en philosophie, Maspero, 1973; 국역본은 󰡔유물론ㆍ반영론ㆍ리얼리즘󰡕 이성훈 편역, 백의, 1996의 1부에 수록되어 있다.

5) Lyssenko: Histoire réelle d'une “science prolétarienne”, Maspero, 1976.

6) Grasset, 1980. 

7) 여기서 “과잉sur-”은 교의나 이론으로 고착화된 종래의 철학적 실천에 맞서 이론(으로서의 유물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일종의 대체보충이다. 이 개념은 또한 바슐라르의 “surrationalisme”, 곧 “과잉합리주의”에 준거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함축하는 관념론적 한계를 정정하려는 시도로 간주될 수도 있다.

8) D. Lecourt, “Pour une philosophie sans feinte(Vers le sur-matérialisme)”, in L'ordre et les jeux; P. Macherey, “Sur l'histoire de la philosophie considerée comme lutte des tendances”, in Histoires de dinosaure: Faire de la philosophie 1965-1997, PUF, 1997; E. Balibar,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Aube, 1994 참조. 

9) 르쿠르는 󰡔인간 복제 논쟁󰡕에서도 여전히 이러한 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137쪽 참조.

10) Dictionnaire d'histoire et philosophie des sciences, PUF, 1999; Dictionnaire de la pensée médicale, PUF, 2004.  

11) 그 외에 르쿠르는 “디드로 포럼Forum Diderot”이라는 대중교양강좌를 주재하면서,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생명과학 분야의 쟁점들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특히 Faut-il vraiment cloner l'homme?, PUF, 1998; La bioéthique est-elle de mauvaise foi?, PUF, 1999; Les médecins doivent-ils prescrire des drogues?, PUF 2000 등 참조. 

12) 하지만 󰡔진보의 미래󰡕는 최악의 번역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번역이 엉망인 책이므로 주의하기 바란다.  

13) 이 책의 원제는 “Humain, posthumain: La technique et la vie”이고, 르쿠르 자신이 감수하는 “과학, 역사, 사회Science, Histoire et Société”라는 총서의 한 권으로 프랑스대학출판부(PUF)에서 출간되었다.

14) 이는 17세기 이래 또는 19세기 말이래 과학-기술 복합체를 형성해온 근대 과학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비판이다. 르쿠르는 이전 저작에서 파우스트(악마와의 계약)와 프랑켄슈타인(괴물의 발명)이라는 문학적 형상을 통해 과학에 대한 공포의 상상적인 기초를 검토한 바 있다. D. Lecourt, Prométhée, Faust, Frankenstein, Synthélabo, 1996 참조.      

15) 기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도구적 이성” 개념을 발전시킨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통에서도 볼 수 있다.

16) 이들의 저작은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프랑스 바깥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데리다와 스티글러의 대담집에서 이러한 기술철학 전통의 면모를 약간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자크 데리다ㆍ베르나르 스티글러, 󰡔에코그라피󰡕 김재희ㆍ진태원 옮김, 민음사, 2002 참조. 르루아-구랑의 연구는 초기 데리다의 작업, 특히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7) André Leroi-Gourhan, Le Geste et la Parole, tome 1-2, Albin Michel, 1964-65; B. Stiegler, La technique et le temps, tome 1, Galilée, 1994 참조.

18) Gilbert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Aubier, 2001 참조.   

19) 이러한 오류에 대한 비판으로는 르원틴의 글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리처드 르원틴, 「복제에 관한 혼동」, 그레고리 펜스 엮음, 󰡔인간 복제, 무엇이 문제인가󰡕 류지한 외 옮김, 울력, 2002. 

20) 생명공학을 비롯한 현대의 첨단 과학들이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이나 당혹감은 이러한 괴리의 한 가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1) 󰡔인간 복제 논쟁󰡕에서는 “규제하고 금지하는 규율”로 이해된 생명 윤리의 불모성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으나, 2004년에 출간된 악셀 칸과의 대담집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 좀더 부연하고 있다. Axel Kahn & Dominique Lecourt, Bioéthique et liberté, PUF, 2004 참조.

22) 시몽동에서 유래한 “관개체론”(transindividualisme)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5 참조.  

23) 발리바르, 앞의 글 참조. 우리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현대 스피노자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관계론적인 관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진태원,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6) 참조. 

24) 그러나 미국의 기술철학자인 앤드류 펜버그는 서구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프랑스 기술철학의 전통(특히 시몽동의 작업)을 접목시키려는 흥미있는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 Andrew Feenberg, Critical Theory of Technology,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Alternative Modernity: the Technical Turn in Philosophy and Social The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등 참조.  

25) 이는 80년대 이후 프랑스 출신의 브뤼노 라투르나 미셸 칼롱 및 영미의 과학/기술 사회학자들을 중심으로 제시된 이른바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social constructionism)과는 약간 다른 입장(양자가 대립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이다.

26) Axel Kahn & Dominique Lecourt, Bioéthique et liberté, op. cit., p. 51.   

27) 이 점과 관련하여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은 베르나르 스티글러다. 특히 B. Stiegler, De la misère symbolique, tome 1-2, Galilée, 2004; Mécréance et discrédit: tome 1, La décadence des démocraties industrielles, Galilée, 2005 참조.   

28)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박정자 옮김, 동문선, 1998;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Seuil, 2004;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1979), Seuil, 2004 참조. 이에 관한 평주로는 특히 Jean-Claude Zancarini ed., Lectures de Michel Foucault, ENS Editions, 2000 참조.

29) 또는 역으로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만 생체정치의 문제설정 내에 존재하는 이단점들에 대한 좀더 정확한 인식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기술(적 진화)에 대한 관점의 부재에서 생체정치와 관련된 아감벤 작업의 이론적 한계 내지 공백 중 하나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가 하이데거를 철학적 준거로 삼고 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G. Agamben, Homo Sace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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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프로메테우스의 모험: 현대 과학기술의 철학적 의미

 

  월간 [사회운동] 3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혹시 공적으로 인용하거나 논의하시고 싶다면,

[사회운동] 3월호를 기준으로 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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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11월부터 3개월 가까이 나라 전체를 뒤흔든 황우석 스캔들은 이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앞두고 진정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굴절시키고 증폭ㆍ확대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한 인터넷 여론이나 신문 방송이 더 이상 이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하지만 법적인 처리가 이 사건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사건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인식과 해결책의 모색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황우석 팀의 논문 조작과 언론 플레이, 그리고 노무현 정권의 천박한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엄정한 책임 추궁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1) 황우석 스캔들은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하고 복잡한 쟁점들을 품고 있다. 우리가 소개하려는 르쿠르의 책은 이 사건이 제기하는 문제들 전체를 정확히 해명하고 해결할 수 있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생명공학의 철학적ㆍ윤리적 함의들을 좀더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성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도미니크 르쿠르(Dominique Lecourt, 1944-)라는 이름은 알튀세르의 사상에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는 국내에 잘 알려진 에티엔 발리바르나 피에르 마슈레와 함께 알튀세르의 주요 제자이자 공동 연구자였던 사람이다. 발리바르가 역사유물론과 정치철학 분야를 담당하고 마슈레가 문예이론과 철학사 연구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면, 르쿠르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또는 현대 인식론 분야에서 많은 공헌을 했다.2)

 

  특히 그는 약관 20대에 바슐라르에서 시작하여 캉귈렘을 거쳐, 푸코와 알튀세르로 이어진 프랑스의 인식론 전통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3) 이 작업이 알튀세르의 초기 문제설정에 따라 역사유물론의 한 분과로서 인식론을 체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바로 뒤에 출간된 󰡔하나의 위기와 그 쟁점: 철학에서 레닌의 입장에 대한 시론󰡕4)이나 󰡔뤼센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실제 역사󰡕5) 같은 저작들은 “이론 안의 계급투쟁”이라는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따라 과학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쟁점을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국가박사학위논문인 󰡔질서와 유희L'ordre et les jeux󰡕6)에서는 논리실증주의와 칼 포퍼,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 “과잉유물론Surmatérialisme”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7) 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볼 수 있는 철학에 관한 이중의 테제, 곧 변증법(방법)에 대한 유물론(존재론)의 우위, 역사유물론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우위라는 테제 대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핵심을 (이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에 근거를 둔) 철학의 새로운 실천에서 찾으려는 알튀세리엥들의 시도를 집약적으로 표현해주는 개념이다.8)  

 

  알튀세르가 공적인 이론 무대에서 퇴장한 1980년대 이후에도 르쿠르는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과학철학과 윤리학 분야에서 빼어난 저작들을 산출했다9). 90년대 이후 그는 주로 생명과학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이 제기하는 이론적ㆍ윤리적ㆍ정치적 쟁점들을 다루는 데 몰두하고 있다. 󰡔공포에 반대하여󰡕나 󰡔다윈과 성경 사이에 있는 미국󰡕 또는 󰡔생명윤리와 자유󰡕 등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책들이다. 이러한 저작들 이외에도 그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사전󰡕이나 󰡔의학사상사전󰡕 같은 집단 저작을 감수했는데10), 이 책들은 2000년대 프랑스 철학계가 배출한 주요한 성과 중 하나로 꼽을 만한 것들이다.11)

 

  20여권에 이르는 르쿠르의 저작 중에서 국내에 소개된 것은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와 󰡔유물론, 반영론, 리얼리즘󰡕(백의, 1996), 󰡔진보의 미래󰡕(동문선, 2001) 정도니까, 충분히 소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12) 이런 상황에서 르쿠르의 최근의 이론적 관심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인간복제논쟁󰡕은 독자들의 아쉬움을 얼마간 덜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인간복제논쟁󰡕은 2003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으로13), 국내에서는 매스컴에 널리 소개되지 못했지만 르쿠르의 이론적 역량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원서로는 불과 150쪽 정도이고, 여백이 여유 있게 편집된 번역본으로도 180쪽 남짓한 이 책은 분량으로 평가할 수 없는 중요한 통찰을 여럿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생명공학과 관련된 과학철학적ㆍ윤리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국역본 제목이 시사하듯이(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이 ‘인간 복제’라는 한정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체 복제”, “인간 복제”라는 과학적인 현상을 소재로 삼되, 이러한 현상이 함축하는 철학적ㆍ정치적ㆍ윤리적 쟁점들을 포괄적으로 검토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책에서 르쿠르가 제시하는 논점은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생명공학을 비롯한 현대의 첨단과학과 연루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르쿠르는 첨단과학에 대한 과도한 공포나 열광은 사실 기독교 신학의 오래된 두 극단의 표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술과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을 해명하는 일이다. 기술에 대한 도구적 관점과 규범의 절대적 기초로서 인간 본성이라는 관점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입장에 따라 형성된 관념들을 자명한 사실로, 또는 초역사적인 개념으로 오인하게 만듦으로써, 과학 및 기술의 역할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셋째, 현대 과학에 대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왜곡과 오용이 낳는 윤리적ㆍ정치적 폐해를 막기 위해 적절한 윤리적 관점을 제시하는 일이다. 르쿠르는 관개체론(貫個體論)에 입각하여 규범의 발명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1. 현대의 기술신학: 생명 파멸론과 기술 낙관론


  서론격인 「프롤로그」와 유나바머에 관한 부록 이외에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이중의 비판적인 목표, 이중의 투쟁 전선을 설정하고 있다.(하지만 이것들은 실제로는 하나의 동일한 대상이라는 점이 곧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생명 파멸론자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묵시록적인 관점에서 현대 생명공학은 결국 인간 본성을 파괴할 파멸의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고발한다. 이들은 심지어 생명공학 연구에 대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생겨난 “반인륜적 범죄”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극단적인 비판을 제기하기까지 한다. 이들이 생명공학, 특히 인간 복제 연구를 두려워하고 그것에 분노하는 이유는 이러한 연구가 자연적인 생명의 질서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인간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복제할 수 있는 사물의 수준으로 타락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인간 복제는 한 개인과 동일한 사본, 동일한 클론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의 정체성과 인격의 동일성 자체를 혼란에 빠뜨리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가톨릭 교회나 다양한 분파의 생태론자들,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보수적인 정치학자만이 아니라 심지어 하버마스 같은 비판 철학자들까지도 공유하고 있는 이러한 관점은 생명공학이 낳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파멸적인 결과들에 관한 공포의 담론을 조장하면서, 절대적인 윤리적 가치를 통해 이를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쪽에는 “기술 낙관론자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인공 지능 연구자들이나 로봇 공학자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들은 생명 파멸론과는 정반대로 정보통신기술과 생명공학의 발전에서 인류 구원의 희망을 발견한다. 컴퓨터와 로봇 공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내재한 동물성과 우리 육신에서 비롯되는 죽음”(78쪽)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의 진정한 본질인 지능에 영생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수학적으로 정의된 가상적인 생명체가 등장할 수 있는 인공적 조건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인공 생명 연구자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자기 자신을 조직화하고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주위 환경에 다양하게 반응하는 “포스트 휴먼”으로서 로봇 종(種)을 만들어내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결국 2099년에 이르면 ‘인간의 사유는 인간이 만들어낸 지능을 가진 기계의 세계와 융합될 것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조차 심각하게 변화할 것이다.’”(82쪽)    

 

  이 두 가지 관점은 인간의 장래에 대해 정면으로 대립하는 전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전혀 상이한 뿌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르쿠르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관점은 실제로는 동일한 한 가지 경향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 신학 전통, 더욱이 천년 왕국설에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뿌리를 두고 있는 기술-신학적 운동이다. 생명 파멸론이 생명공학에서 신의 고유한 권능에 도전하는 인간의 무모하고 어리석은 “오만”(hybris)를 발견한다면14), 기술 낙관론은 오히려 신의 영광의 표현 및 원초적인 낙원으로 회귀하는 길을 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전통 종교와 무관해 보이는 첨단 과학들이 실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천년왕국설의 이데올로기와 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은 이 책이 제시해주는 중요한 통찰 중 하나다. 


2. 두 가지 쟁점: 기술과 인간 본성


  이 두 가지 관점이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 과학을 적합하게 인식하고 활용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기술신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그리 만만한 과제가 아닌데, 왜냐하면 이는 이 두 가지 관점의 이데올로기적인 지주를 이루는 두 가지 통념, 곧 기술과 인간 본성이라는 통념에 대한 근본적인 쇄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 도구로서의 기술 대 구성적 조건으로서의 기술


  르쿠르는 이러한 기술 신학은 기술에 대한 특정한 관점, 곧 도구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의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19세기의 실증주의 이래 오늘날 과학-기술에 대한 지배적인 관점을 형성하고 있는 이러한 입장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외재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기술은 인간이 지닌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이거나 과학적인 지식을 응용하기 위한 도구로 파악된다. 수단 내지 도구로서의 기술은 온전하게 통제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젯거리가 되지 않지만, 생명공학(및 정보공학과 로봇공학)의 발전은 기술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 자신의 본성을 변형하고 파괴할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만들었다.15)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기술의 반란, 도구의 반역을 저지하기 위한 반테크놀로지 혁명을 수행하는 길이다. “유나바머”로 더 잘 알려진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실행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부록」) 르쿠르는 유나바머 사건은 증상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한다. 이는 두 가지 극단적인 기술 신학의 충돌이 어떤 결과를 빚을 수 있는지 잘 웅변해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독교 종말론에 근거를 둔 이러한 기술 신학이 또다른 종교적 극단, 예컨대 이슬람 근본주의와 충돌한다면, 그것은 훨씬 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이는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르쿠르는 도구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맞서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 곧 기술은 인간과 외재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인간이 인간으로 성립하기 위한 조건 자체를 구성한다고 보는 관점을 옹호하고 있다(3장). 사실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은 앙드레 르루아-구랑(André Leroi-Gourhan)이나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같은 기술철학의 대가들이 제창한 이래 장 클로드 본(Jean-Claude Beaune)이나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 등과 같은 기술철학자들이 발전시켜온 프랑스 철학의 독특한(그리고 강력한) 전통 중 하나다.16)

 

  르쿠르가 본론에서 자세히 논의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관점은 인류의 발생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 및 인간과 기술의 공진화 과정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인간의 개체화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에 의해 뒷받침된다. 르루아-구랑이 체계화한 고고학적 논의에 따르면 호미니드(hominid)가 유인원에서 분화하고 다시 호미니드에서 현생인류(homo sapiens)가 분화되는 과정에서 기술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는 이후 인류의 문화가 진화하는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17) 다른 한편으로 질베르 시몽동은 개체화 이론을 통해 인간과 기술의 구성적 관계를 보여준다. 곧 인간은 주변 환경과 무관하게 미리 형성된 존재론적 단위가 아니라 다른 생물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환경과의 끊임없는 교섭 작용에 의해 분화되고 개체화된다. 이러한 교섭에서 기술은 인간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데 본질적인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그러한 환경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기술적인 대상 역시 인간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독자적인 개체화 양식을 지니게 된다.18) 요컨대 구성으로서의 기술이라는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항상 이미 기술적 환경 속에서 실존해왔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기술과 더불어 공진화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이 인간과 기술의 외재성을 상정하는 도구적 관점만이 아니라 그것에 함축되어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관점 역시 거부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 인간 본성론인가 관개체론인가


  또한 기술 신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특정한 관점 또는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의 자명성을 전제하고 있다. 생명 파멸론이든 기술 낙관론이든 간에, 기술신학은 기술의 발전을 인간 본성의 문제와 결부시킨다. 전자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그대로 방치될 경우에는) 인간 본성을 파괴할 것이라고 믿는 반면, 후자는 인간 본성의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이 다를 뿐, 양자는 과학기술을 평가하기 위한 본질적인 척도로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

 

  사실 인간 복제 기술에 대한 비판가들, 특히 생명 파멸론자들의 역설은 극단적인 유전자 결정론에 입각하여 생명공학 및 인간 복제 연구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생명공학 및 인간 복제에 대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러한 기술적 발전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한 개인과 동일한 복제 인간을 만들어냄으로써, 결국 인간의 동일성을 치명적으로 파괴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복제 기술로 생겨난 사본이 원래의 인간과 정말로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유전적인 정보로 식별되는 한 개인의 유전적인 동일성이 그의 인간적인 동일성 전체를 규정한다는 점(또는 양자가 동일하다는 점)을 전제한다. 돌리의 탄생 이후 미디어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아인슈타인을 복제한다거나 죽은 가족의 성원을 그대로 복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역시 이러한 환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19)

 

  기술 낙관론자들 역시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 따라서 인간에 대한 본질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관념을 가정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과 하등 다를 바가 없으며 동물과 마찬가지로 유전자의 작용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흔히 이야기되듯이 “침팬지의 유전자와 인간의 유전자는 99%가 똑같다”. 좀더 세련된 형태의 환원론은 사유를 컴퓨터의 모델에 따라 이해하기도 한다. 이는 두뇌의 모든 기능을 수학적 모델에 따라 원하는 정도의 과학적 정확성으로 설명하고, 이를 인공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인공 지능 이론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과 침팬지가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유전적으로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왜 인간과 침팬지는 그토록 다른 것인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극단적인 두 가지 방식으로 해소시켜 버린다는 점에서 생명공학 및 첨단과학이 제기하는 쟁점들을 정확히 다루는 데 장애를 이룰 뿐이다. 다시 말해 이 개념에 의거할 경우 한편으로 인간 본성을 인간 종에게 부여된 선험적 자질로 간주하든가 아니면 이를 유전적 동일성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르쿠르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인간 본성이란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며 초역사적인 보편성을 지닌 자명한 개념도 아니다. 오히려 이 개념은 전형적인 근대적 개념으로서, 중세의 신학적 기초를 대신하여 인간 행위의 규범적 기준을 제공해준다. 문제는 이 개념이 인간의 특성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20) 가치나 규범에 대한 절대주의적 태도를 조장한다는 데 있다. 르쿠르는 생명윤리에 관한 담론들이 부정적이고 규제적인 방향 일변도로 진행되는 근본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찾고 있다.21) 

 

  이러한 관점에 맞서 르쿠르는 인간에 대한 관개체론적 관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22) 사실 기술에 대한 구성적 관점은 개인 또는 개체 일반에 관한 관개체론적 관점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관개체론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개체는 개체화 과정 이전에 독립적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항상 개체화 과정의 (잠정적인) 결과로서 실존할 뿐이다. 따라서 선험적인 인간 본성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연적인 본성을 인공적인 또다른 본성으로 대체하는 것이 문제일 수도 없다.

 

  (2) 개체는 그의 환경을 이루는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동일성을 갖춘 개체로 성립하며, 바로 이 때문에 타자들을 자신의 동일성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로 지니고 있다. 이러한 타자들은 반드시 인간 타자들로 국한되지 않으며, 자연적인 타자들이나 심지어 인공적인 타자들, 곧 기술적인 존재자들도 포함된다.

 

  (3) 가치 규범들은 환경과 교섭하는 인간의 생물학적 규준/규범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물학적 규준은 선험적이거나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교섭 과정에 따라 변화하며, 따라서 절대적인 가치 규범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관개체론적 이해는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진 인간의 가변성과 역동성을 인간에 대한 정의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불변적인 인간 본성을 가정하고 있는 기술 신학적인 관점보다 더 정확하게 인간의 위치를 개념화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선험적이거나 절대적인 가치 규범(예컨대 선의지라든가 타인에 대한 존중 같은)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첨단 과학이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들에 대해 적절한 규범적 대응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도 관개체론적인 관점의 강점 중 하나다.


3. 생명공학 시대의 윤리


  관개체론에서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때의 욕망은 선험적인 인간 본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고발하듯이 탐욕이나 이기주의적인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실존하고 진화해가는 인간의 특성을 가리킨다. 르쿠르는 드니 디드로 대학(파리 7대학) 교수답게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디드로(Denis Diderot)의 사상에서 이러한 형태의 인간관을 발견하지만, 사실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에도 완벽하게 부합하는 관점이다.

 

  스피노자가 모든 자연 실재의 본질을 “코나투스”(conatus)로, 그리고 특히 인간의 본질은 “욕망”(cupiditas)로 정의한 것은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 등이 주장하듯이 일종의 소유적 개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또한 이는 들뢰즈/가타리가 1970년대에 제안한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 모델이나 네그리의 스피노자 해석의 영향 아래 일부 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인간이 지닌 능동적 역량을 부각시키기 위해 제안된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욕망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환경과 분리하여, 개인이 다른 개인들과 맺고 있는 구성적인 관계와 분리하여 사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곧 이기주의적인 탐욕으로 간주되든 능동적인 역량의 표현으로 해석되든 간에 두 가지 관점에서 욕망은 정의상 개인의 욕망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를 비롯한 최근의 스피노자 연구가 잘 보여주듯이23), 스피노자의 욕망에 대한 정의는 그의 철학의 관계론적 관점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의 본질이 욕망으로 정의된다면, 이는 우선 본질 개념에 대한, 그리고 개체의 개념에 대한 본질주의적 이해에서 탈피할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 경우 욕망은 인간이 환경과 주고받는 영향의 인간학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스피노자 철학의 어휘로 말한다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실재,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변용되며affici”(영향받고), 또한 이러한 변용되기를 바탕으로 환경을 “변용한다afficere”(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인간의 욕망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변용되기/변용하기의 관계망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용(affectio)의 관계는 욕망과 기쁨, 슬픔, 사랑과 증오, 희망과 공포 등과 같은 정서들(affectus)로 변이되며, 이를 통해 각각의 개인은 자신의 동일성, 자신의 개성을 얻게 된다.

 

  따라서 모든 개인은 존재론적 개체로 성립하는 과정에서 타자와의 변용 관계를 필연적으로 함축한다는 점에서 관계론적 또는 관개체적인 본성을 지니게 되며, 더 나아가 항상 이미 타인들과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정서적 관계망(누구도 혼자서 기뻐하고 혼자서 슬퍼할 수 없으며, 더욱이 혼자서 사랑하고 증오하고 희망하거나 공포를 느낄 수는 없다)을 통해 자신의 동일성 내지 개성을 얻는다는 점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내면적인 모습에서도 타인의 흔적을 포함하게 된다. 그렇다면 불변적이고 자연적인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에 의거하여 생명 공학의 발전에 공포와 불안을 느끼거나 그것이 기존의 본성을 전혀 새로운 인공적 본성으로 대체시켜 줄 것이라고 환호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가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르쿠르는 인간 본성이라는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는 기존의 생명윤리 대신 관개체론에 입각하여 “규범의 발명”이라는 새로운 윤리적 관점을 제안한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 곧 “자신이 고유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재발견하는 능력”(64쪽)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물론 그가 제안하는 규범의 발명이라는 주장은 자의적으로 이런저런 윤리적 규범들을 만들어내자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이는 윤리적, 사회적 규범들이란 어떤 초월적이거나 절대적인 기초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로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물학적 규준에 의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규준의 변화에 맞춰 변화될 수밖에 없고 또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관점이 생명 공학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기초를 둔 일방적인 윤리적 승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개체론적인 관점에 따를 경우 인간 개인은 항상 이미 자기 안에 타자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정의상 양가성을 띠고 있다. 곧 이것은 인간에게 해롭고 악한 것일 수도 있고 유용하고 선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윤리적 규범과 가치 판단의 문제는 외부 대상에 대한 규제나 금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 각각의 개인 내부에 존재하는 비인간적인 요소, 악의 요소를 어떻게 규제하고, 또 유용하고 긍정적인 요소들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은 그것들이 인간의 존재 자체와 동연적이라는 점에서 절대적인 관점에서는 제대로 해명되거나 해결될 수 없다. 악은 선과 마찬가지로(또는 폭력은 정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재 조건 자체의 일부인 것이다.

 

  따라서 규범의 발명이라는 테제는 생명공학이 불러올 수 있는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경계하고 대비하도록 요구하지만, 그에 앞서 인간의 특성 및 규범의 문제를 좀더 자연적이고, 좀더 적극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인간 복제 및 인공 지능 또는 인공 생명의 과학적 전망이 제시되는 시기에 이러한 관점은 과학기술과 윤리의 내재적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이론적 지주로 삼을 만하다.  


4. 이론적 과제와 전망


  내가 볼 때 이 책의 첫 번째 장점은,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을 17세기 과학혁명 이래 서양의 기술ㆍ과학적 발전의 과정 속에 위치시켜 고찰하고 있으며, 왜 그러한 고찰이 이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에 소개된 생명 복제나 인간 복제에 관한 대부분의 저술들은 현재의 맥락에서 전개되는 쟁점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에 따라 피상적인 현상 기술에 그치든가 아니면 맹목적인 편들기(가령 생명공학은 과학기술 발전의 신기원인가 인류의 재앙인가,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가 아니면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가, 또는 본래적인 자유의지를 갖는가, 배아는 인격체인가 아닌가,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인 존재일 뿐인가 인격의 존엄성을 가진 존재인가 등)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이 책은 넓은 역사적 시야와 신선하고 깊이 있는 철학적 성찰로 문제를 조망하면서 현재의 문제가 어떻게 오래된 신학적ㆍ철학적 쟁점들과 결부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이 문제를 적절한 방향에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술이나 인간 본성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익숙한 관념들이 개조되어야 하고 특히  윤리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물론 내가 볼 때) 보여주고 있다. 생명윤리에 대한 대개의 논의가 이러한 존재론적ㆍ인간학적 기초에 대한 검토 없이 특정한 윤리적 관점에 의거하여 규제적이거나 금지하는 대안들을 내놓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르쿠르의 제안이 얼마나 대담하고 파격적인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이는 과학철학과 과학사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하고 이를 윤리적ㆍ정치적 문제와 결부시켜 사고해온 저자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쉽게 제기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동안 국내에는 소개되지 못했던 프랑스 과학철학 및 기술철학의 한 가지 관점을 엿보게 해준다는 점도 이 책이 지닌 또다른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에게 기술의 문제는 그동안 이론적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기계에 관한 마르크스의 언급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이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된 소외론 또는 도구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취급되거나 아니면 경제사회학이나 경제사 분야의 부차적인 논의 주제로 간주되어 왔다.24) 가령 과학기술혁명(이른바 “극소전자혁명”)이 생산구조와 노동자 계급의 지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 같은 것이 한 가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 책은 구성적 기술론에 입각하여25) 기술이 사회구조 및 인간의 진화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좀더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좀더 정확한 논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태도라고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르쿠르 책은 (적은 분량의 저작에서는 불가피한 일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 공백을 남겨놓고 있다. 우선 󰡔인간 복제 논쟁󰡕에는, 한 논평자가 지적하듯이, 현대 과학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인 사회 경제적 조건에 관한 논의가 빠져 있다.26) 특히 생명공학과 관련된 핵심 쟁점 중 하나가 특허권을 둘러싼 국가들 사이의, 거대 기업들 사이의 경쟁이며, 이에 따른 자본에 대한 과학연구의 예속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간과해서는 안될 공백이다.

 

  하지만 이러한 공백은 단순한 부주의로 보기는 어려우며, 좀더 내재적이고 심층적인 또다른 공백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근대 과학기술에 고유한 발전(또는 “진화”)의 동역학과 자본주의의 경제적 동역학 사이의 연관성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과학기술은 대개 생산력의 일부로 간주되었을 뿐, 자신의 고유한 발전 내지 진화의 메커니즘을 갖춘 체계로 인식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술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재 자체의 구성적인 조건을 이루고 있고 인간의 진화 과정과 긴밀한 상호연관 속에서 함께 진화되어 왔다면, 기술은 단순히 도구나 수단으로 간주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제의 종속 변수 내지 생산력의 일부로 치부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의 메커니즘과 자본주의 경제의 동역학이 맺고 있는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는 분명 쉽게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또한 과학과 기술, 경제가 맺고 있는 상호연관성을 이론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우회할 수 없는 쟁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27) 

 

  또한 르쿠르의 작업은 생체정치(biopolitique)의 문제설정으로 보충될 필요가 있다. 르쿠르는 이 책을 명시적으로 생체정치 또는 생체권력의 문제설정과 연결시키고 있지만(26쪽), 이를 구체적으로 이론화하지는 않고 있다. 푸코가 자신의 후기 작업, 특히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들에서 발전시킨 생체권력28) 개념은 규율권력이 개인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는 데 비해 대중으로서의 인구 또는 “종(種)으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체권력 또는 생체정치는 미시적인 차원에서 수행되는 규율권력의 실행공간을 마련해주는 (일종의) 거시권력으로 볼 수도 있다. 생체정치는 생명체로서의 인간들의 생명을 규제하는 것을 자신의 고유한 과제로 삼는다. 건강과 질병의 문제나 공중위생 같은 보건복지 및 의료정책에 관한 일만이 아니라 인구조사 및 출산율과 사망률, 평균 수명 등과 같은 인구정책 전반이 생체정치의 주요 과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공학의 문제가 함축하는 윤리적ㆍ정치적 쟁점들은 생체정치의 문제설정에서 다룰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적한 이러한 공백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쟁점들이며,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과학들의 문제를 좀더 포괄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상호 연관성 속에서 취급되어야 할 문제들이다.29) 이렇게 볼 때 르쿠르의 책은 좀더 진전된 연구를 위한 일종의 “서론”으로 읽는 게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책이 지니는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좀더 폭넓은 역사적ㆍ철학적 관점에서 생명공학을 비롯한 첨단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 󰡔인간 복제 논쟁󰡕은 귀중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조만간 좀더 많은 르쿠르의 저서들이 번역되고 그의 연구가 앞으로 좀더 체계화되길 기대하는 것이 필자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1) 󰡔진보평론󰡕 26호(2005년 겨울)는 황우석 스캔들의 초기 쟁점이었던 난자제공의 윤리적 문제와 연구 윤리 문제를 중심으로 “생명공학과 민중운동의 새로운 과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고, 󰡔인물과 사상󰡕은 “한국 사회를 발가벗긴 황우석 신화”라는 제목 아래 PD수첩 보도를 통해 드러난 한국 언론의 과학보도 관행의 문제점을 조명하고 있다. 

2) 1983년 사망한 미셸 페쇠는 담론 분석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해명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La vérité de la Palice, Maspero, 1975; (avec François Gadet), La langue introuvable, Maspero, 1983. 

3) 이 연구는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 박기순 옮김, 새길, 1995 참조. 그 외에도 그는 바슐라르의 과학철학과 시학 사이의 이론적 모순을 해명하고 있는 󰡔바슐라르, 낮과 밤Bachelard, le jour et la nuit󰡕, Grasset, 1974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4) Une crise et son enjeu: Essai sur la position de Lenine en philosophie, Maspero, 1973; 국역본은 󰡔유물론ㆍ반영론ㆍ리얼리즘󰡕 이성훈 편역, 백의, 1996의 1부에 수록되어 있다.

5) Lyssenko: Histoire réelle d'une “science prolétarienne”, Maspero, 1976.

6) Grasset, 1980. 

7) 여기서 “과잉sur-”은 교의나 이론으로 고착화된 종래의 철학적 실천에 맞서 이론(으로서의 유물론)에 대한 실천의 우위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일종의 대체보충이다. 이 개념은 또한 바슐라르의 “surrationalisme”, 곧 “과잉합리주의”에 준거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함축하는 관념론적 한계를 정정하려는 시도로 간주될 수도 있다.

8) D. Lecourt, “Pour une philosophie sans feinte(Vers le sur-matérialisme)”, in L'ordre et les jeux; P. Macherey, “Sur l'histoire de la philosophie considerée comme lutte des tendances”, in Histoires de dinosaure: Faire de la philosophie 1965-1997, PUF, 1997; E. Balibar,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Aube, 1994 참조. 

9) 르쿠르는 󰡔인간 복제 논쟁󰡕에서도 여전히 이러한 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137쪽 참조.

10) Dictionnaire d'histoire et philosophie des sciences, PUF, 1999; Dictionnaire de la pensée médicale, PUF, 2004.  

11) 그 외에 르쿠르는 “디드로 포럼Forum Diderot”이라는 대중교양강좌를 주재하면서,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생명과학 분야의 쟁점들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특히 Faut-il vraiment cloner l'homme?, PUF, 1998; La bioéthique est-elle de mauvaise foi?, PUF, 1999; Les médecins doivent-ils prescrire des drogues?, PUF 2000 등 참조. 

12) 하지만 󰡔진보의 미래󰡕는 최악의 번역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번역이 엉망인 책이므로 주의하기 바란다.  

13) 이 책의 원제는 “Humain, posthumain: La technique et la vie”이고, 르쿠르 자신이 감수하는 “과학, 역사, 사회Science, Histoire et Société”라는 총서의 한 권으로 프랑스대학출판부(PUF)에서 출간되었다.

14) 이는 17세기 이래 또는 19세기 말이래 과학-기술 복합체를 형성해온 근대 과학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비판이다. 르쿠르는 이전 저작에서 파우스트(악마와의 계약)와 프랑켄슈타인(괴물의 발명)이라는 문학적 형상을 통해 과학에 대한 공포의 상상적인 기초를 검토한 바 있다. D. Lecourt, Prométhée, Faust, Frankenstein, Synthélabo, 1996 참조.      

15) 기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도구적 이성” 개념을 발전시킨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전통에서도 볼 수 있다.

16) 이들의 저작은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프랑스 바깥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데리다와 스티글러의 대담집에서 이러한 기술철학 전통의 면모를 약간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자크 데리다ㆍ베르나르 스티글러, 󰡔에코그라피󰡕 김재희ㆍ진태원 옮김, 민음사, 2002 참조. 르루아-구랑의 연구는 초기 데리다의 작업, 특히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7) André Leroi-Gourhan, Le Geste et la Parole, tome 1-2, Albin Michel, 1964-65; B. Stiegler, La technique et le temps, tome 1, Galilée, 1994 참조.

18) Gilbert Simondon,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Aubier, 2001 참조.   

19) 이러한 오류에 대한 비판으로는 르원틴의 글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리처드 르원틴, 「복제에 관한 혼동」, 그레고리 펜스 엮음, 󰡔인간 복제, 무엇이 문제인가󰡕 류지한 외 옮김, 울력, 2002. 

20) 생명공학을 비롯한 현대의 첨단 과학들이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이나 당혹감은 이러한 괴리의 한 가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1) 󰡔인간 복제 논쟁󰡕에서는 “규제하고 금지하는 규율”로 이해된 생명 윤리의 불모성을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으나, 2004년에 출간된 악셀 칸과의 대담집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 좀더 부연하고 있다. Axel Kahn & Dominique Lecourt, Bioéthique et liberté, PUF, 2004 참조.

22) 시몽동에서 유래한 “관개체론”(transindividualisme)에 대해서는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에서 개체성과 관개체성」,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5 참조.  

23) 발리바르, 앞의 글 참조. 우리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현대 스피노자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관계론적인 관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을 해석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진태원,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6) 참조. 

24) 그러나 미국의 기술철학자인 앤드류 펜버그는 서구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프랑스 기술철학의 전통(특히 시몽동의 작업)을 접목시키려는 흥미있는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 Andrew Feenberg, Critical Theory of Technology,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Alternative Modernity: the Technical Turn in Philosophy and Social Theor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등 참조.  

25) 이는 80년대 이후 프랑스 출신의 브뤼노 라투르나 미셸 칼롱 및 영미의 과학/기술 사회학자들을 중심으로 제시된 이른바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구성론”(social constructionism)과는 약간 다른 입장(양자가 대립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이다.

26) Axel Kahn & Dominique Lecourt, Bioéthique et liberté, op. cit., p. 51.   

27) 이 점과 관련하여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은 베르나르 스티글러다. 특히 B. Stiegler, De la misère symbolique, tome 1-2, Galilée, 2004; Mécréance et discrédit: tome 1, La décadence des démocraties industrielles, Galilée, 2005 참조.   

28)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박정자 옮김, 동문선, 1998;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Seuil, 2004;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1979), Seuil, 2004 참조. 이에 관한 평주로는 특히 Jean-Claude Zancarini ed., Lectures de Michel Foucault, ENS Editions, 2000 참조.

29) 또는 역으로 이러한 고찰을 통해서만 생체정치의 문제설정 내에 존재하는 이단점들에 대한 좀더 정확한 인식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기술(적 진화)에 대한 관점의 부재에서 생체정치와 관련된 아감벤 작업의 이론적 한계 내지 공백 중 하나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그가 하이데거를 철학적 준거로 삼고 있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G. Agamben, Homo Sace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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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퍼온글] 알튀세르와 마키아벨리

이 번역본은 (당장) 출판을 염두에 둔 게 아니며, 아직 충분한 교열을 거친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이 번역본을 출력하고 옮기고 하는 것은 허락하지만, 공적인 매체에서 인용하는 것은 불허합니다. 인용을 원하는 분은 사전에 이메일로 역자에게 허락을 얻기 바랍니다.

* 이 글은 후기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에 대한 독해와 마주침의 유물론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및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론의 난점들을 넘어서려는 그의 시도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해명하려는 한 가지 시도이다. 이런저런 점에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매우 집약적이고 풍부한 논점을 담고 있어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정세에서 정치의 문제를 사고하는 데 여러 가지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특히 이런저런 명목으로 정치 이론 및 정치적 실천에서 주체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복권시키려는 시도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번역과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해 둘 점은, 이 글은 영어로 된 원고를 불어로 옮긴 글인데, 번역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불어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이나 표현들이 여럿 눈에 띄고, 불어 문장을 그대로 따를 경우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었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역자가 임의로 약간의 첨삭과 교정을 한 곳이 두어 군데 있다. 나중에 영어 원고가 발표되면, 대조를 거쳐 교정할 생각이다. 꺾쇠들 중 하나는 원주이고, 다른 하나는 역자가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것이다(역자).  


Miguel Vatter, "Althusser et Machiavel: La politique apres la critique de Marx", Multudes 13, 2003.

알튀세르와 마키아벨리: 마르크스 비판 이후의 정치


  1977년 이후 알튀세르의 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거리를 두면서 하나의 "전회"를 실행한다. 이 시기의 유고들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위한 극히 풍부한 영감의 원천을 이루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두 가지 오류에 대한 논박을 보게 되는데, 이는 알튀세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뿌리에 근거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 대한 폄훼와 몰이해,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생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구성물에 대한 종속. 정치의 자율적이고 구성적인 차원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지평을 정의하기 위해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로 복귀해야 할 필연성을 느끼고 있다. 역사에 대한 근대 철학의 압류(emprise) 및 역사적 주체에 대한 근대 철학의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알튀세르는 사건의 차원에 우선권을 주는 역사이론 및 역사적 생성의 모든 실체 및 주체를 비워내는 우연적 마주침의 이론을 소묘해볼 것을 제안한다. 정치의 필연성과 역사의 우연성은 "마르크스주의 이후" 마르크스를 재발견하기 위한 두 가지 선행조건이다.


    지난 세기 동안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해 두 가지 근본적인 비판이 제기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국가와 정치를 적합하게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아왔는데, 이는 그것이 정치적 "상부구조"와 관련하여 규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경제적 "토대"로 이루어진 건축물로 사회를 표상하는 결함이 있는 은유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이론은 역사적 생성을 적합하게 고려하지도 못했는데, 이는 결정론적 법칙들과 과정들에 따라 전개되는 것으로 역사를 간주하는 결함이 있는 전제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스스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대표한다고 자부했던 사람들 쪽에서 실질적인 답변이 제시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알튀세르는 매우 드문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1977년 경 알튀세르의 사상은 예기지 못한 전회를 보여주는데, 이는 최근 그의 후기 저술들의 유고집 출간으로 해명되고 있다. 이 텍스트들에서 그는 이러한 비판들이 적절했음을 받아들이고, 이것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 파멸적인 결과들을 가져왔다는 점을 수용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러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몰락 속에서도, 내가 보기에는 오늘날 좌파에 무엇이 남아있는지 염려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혁신적인 답변들을 소묘해보려고 시도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비판: 사회적 적대와 정치의 자율성

    1977-1978년 동안 알튀세르는 <자신의 한계들 안의 마르크스>[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 pp.359-524]라는 텍스트를 쓰는데, 이 텍스트는 그가 여기서 앞서 말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약점들을 이론의 "절대적 한계들"로, 스탈린주의의 공포와 유로코뮤니즘의 정치적 실패를 불러온 한계들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두 가지 중심적인 해석적 테제는 알튀세르의 입장을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의 관점을 넘어 전위시킨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에게 비판은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현실적인 것[실재, le reel]이다"라고 쓰면서, 공산주의가 "사물들의 실존상태를 폐지하는 현실 운동"과 동일시되고 있는『독일 이데올로기』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알튀세르는 "현실적인 것"을 "계급들에 대한 계급투쟁의 우위"에 준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계급들"과 "계급투쟁"의 구분은 절대적으로 결정적이다. 계급 개념이 생산의 사회경제적 문법(마르크스주의 용어법으로 하면, 생산력, 생산수단, 노동분할[분업])에 의존하는 반면, 계급들 사이에서 생산되는 투쟁 개념은, 계급들에 선행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러한 문법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알튀세르는 투쟁이라는 개념을 생산관계의 문법과 연합시킨다. 항상 이미 정치적이고 착취의 사실에서 생겨나는 이러한 관계들은 본질적으로 적대적이며, 지배와 저항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계들이 없이는 계급형성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그것 자체에 거슬러 받아들이면서 알튀세르는 필연적으로 적대를 어떤 종합 속에서 극복해야 한다는 일체의 주장과 독립해서 "계급투쟁의 우위"를 이해하고 있다. 특히 사회적 적대는 계급투쟁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그 다음에는 계급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목적론적 "이행"의 관념(마르크스는 요제프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내는 1852년 3월 5일자 편지에서 이를 옹호하고 있다)과 완전히 독립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알튀세르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그 모든 변종들 속에서도 사회적 적대, 곧 어떠한 보충적이고 해결적인 종합 없이 사회적 관계들 전체를 관통하는 "현실 운동"으로서의 투쟁을 사고하지 못했다. 사회적 적대를 총체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에 따라 이를 하나의 종합 안으로 해소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알튀세르는 이러한 전통과 단절한다. 사회적 적대는 영속적이며, "역사의 종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해석적 테제는 사회적 적대의 영속성에서 따라나온다. 정치, 국가 및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단지 생산의 사회적 조건들의 반영 내지는 표현으로서, 이러한 조건들이 변혁되자마자 제거되는 것으로서 인식될 수 없다. 정치적인 것은 고유한 별도의 지위를 가져야 한다. 사회적 적대의 영속성은 정치적인 것의 영속성을 요구한다. "국가는 물론 낡지만 영속적이다 [...] 국가는 계급투쟁, 곧 착취가 폐지되는 게 아니라 보존되고 유지되고 강화됨에 따라 [...] 낡게 된다." 알튀세르의 판단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법적-정치적 장치와, 소위 그것의 "토대"("생산관계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몰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상부구조"를 그 자체로 파악하지 못하며, 이는 그 이론의 "절대적 한계"를 나타낸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마르크스가 1859년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소묘한 이 관계에 대한 표상을 따르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법적-정치적" 상부구조는 "사회의 경제적 구조, 현실적 토대"로부터 "성립된다."(erhebt)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이러한 성립의 순간, 이러한 관계를 결코 문제삼지 않았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상부구조의 "제도[화]" 및 "구성"은 결코 문제화되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들 안의 마르크스>의 중요성은, 정치적인 것은 토대의 실존조건이어서 "계급투쟁"과 근원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은 생산의 토대로부터 "성립"하거나 이 토대의 "반영물"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정치적인 것의 이러한 분리된 실존은 사회적 적대의 보존, 곧 착취가 그 내부에서 생산되는 생산관계들의 재생산을 자신의 대상으로 지니고 있다. 정치적인 것을 특징짓는 것이 적대와의 분리이기 때문에, 그리고 정치적인 것은 적대가 자신을 재생산하도록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적대는 정치적인 것의 제도[화]의 원인일 수 없다는 점이 따라나온다. 국가가 지배계급의 "도구"로 쓰이기 위해서는 계급들 사이의 투쟁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 테제를 사고함으로써 알튀세르는 아마도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을 결론, 곧 정치적인 것은 자기-제도화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치적인 것은 투쟁의 효과이기는커녕 사실은 "계급투쟁에 영향받지 않고, 심지어 이 투쟁에 의해 "관철될"" 수도 없다.[앞의 책, p. 437]
    1977년의 텍스트에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 관한 1970년 논문에서 제시된 정식과 관련하여 자신의 재생산 이론을 심화한다. 정치적인 것의 분리 없이는 "계급투쟁"도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분리되어-있음"이라는 점 때문에 정치적인 것은 생산관계들을 재생산하는 과제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 이제는 알튀세르의 테제가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비판받는 것은 이 이론이 어떤 의미에서 국가가 분리된 도구인지 또는 "기계"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에게 국가는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기계인 반면, 마르크스는 "생산의 사회적(이고 심지어 물질적인) 조건들의 재생산관계 하에서 국가를 파악하지 못한다."[같은 책, p. 457] 알튀세르의 테제는 정치적인 것이 생산의 적대적 관계들(여기서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에 의해 착취당한다)을 재생산하며, 역으로 이 적대적 관계들은 경제적 생산(곧 생산력과 생산수단의 결합)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급들 사이의 투쟁은 생산과 관련하여(사회적 노동분할, 계급들과 관련하여) 우위를 지니며, 역으로 정치적인 것은 재생산과 관련하여, 그리고 따라서 계급투쟁의 실존 그 자체와 관련하여 우위를 지닌다. 이 때문에 생산(관계들)의 조건들은 정치적 가능성의 조건, 이 관계들의 재생산의 정치적 원인을 갖는다. 알튀세르는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마르크스주의 도식을 완전히 전복시키며, 이렇게 되면 폐허만이 남는다. 계급투쟁은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소여이기 이전에 정치의 사실이다.

마르크스 이후의 마키아벨리: 공화주의적 자유의 회복

    유고로 출간된 {마키아벨리와 우리}(1972-1986)에서 알튀세르는 소위 경제적 "토대"와 관련하여 국가의 정치의 우선성을 인정하는, 국가와 정치에 관한 이론을 제공하려고 시도한다.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이론 비판에 대해 마키아벨리로의 회귀는 무엇을 보태주는가? 우선 이는 화해 불가능한 사회적 적대의 심연적인 "토대"로부터 출발하는, 무로부터의 정치적인 것의 자기-구성이라는 이론을 보태준다. 피렌체 서기장의 중심적인 질문이 정확히 말하면 지속 가능한 정치적 국가가 무로부터 어떻게 생성될 수 있는가 하는 것 마르크스는 결코 이 문제를 검토하지 않는다 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구성적 권력으로서의 새로운 군주라는 오래된 그람시의 문제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독해에서 혁신적인 점은 그가 이 문제를『로마사론』에 대한 한 가지 해석을 통해 해소한다는 점에 있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로 돌아간다. 알튀세르에게 공화국은 국가의 지속의 계기를 포함하며 구성적 권력의 재생산에 따라 질서지어져 있다. 반면 새로운 군주는 단지 국가의 시작의 계기만을 포함할 뿐이다. 마키아벨리를 통해 알튀세르는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본질적인 문제가 정치적인 것의 공화적 형태 속에, 곧 군주적 형태가 아니라 법의 통치로서의 공화국 속에 담겨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이에 따라 알튀세르는 암묵적으로, 1971년의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에 관한 텍스트 속에도 여전히 현존하고 있는 계급의 "독재" 형태로서의 국가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관념을 거부하게 된다.
    마키아벨리에 관한 독해를 통해 알튀세르는 재생산 문제에 대해 한 가지 보족적인 재귀성(반성성, reflexivite)의 차원을 추가한다. 곧 1971년에 일차적인 질문은 단지 생산의 재생산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마키아벨리에 관한 텍스트에서 일차적인 질문은 재생산 자체의 재생산이 된다. 새로운 군주와 공화국, 구성적 권력과 구성된 권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은 자기 자신에 의한 국가(재생산 권력으로서)의 재생산이라는 문제 및 따라서 그 지속이라는 문제를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독해가 르포르의 혁신적인 마키아벨리 독해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시인한다. 르포르와 관련하여 그가 혁신적인 점은 "지속하는 국가"의 구성을 "무로부터의" 성립(emergence)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무"를, 정치적인 것(비르투)과 사회적인 것(포르투나)의 사건적이고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분절(표현, articule)하는데, 이는 가능한 일체의 역사철학 및 "역사의 법칙들"과 "역사적 필연성"에 관한 일체의 담론 바깥에 놓여 있다. 정치적인 것의 자기-구성을 사건과 우발성의 지평(그가 "정세적 결합"(conjonction)이라 부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사고하면서, 알튀세르는 마키아벨리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두 가지 근본적인 이론적 한계, 곧 정치이론의 결여 및 역사의 형이상학에 대한 의존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을 찾으려고 한다. 알튀세르는 역사를 유물론적 사건이론의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할 목적으로 마키아벨리로 되돌아가는데, 이 이론에서 사건들은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 적대의 "현실 운동"의 "마주침" 내지는 "정세적 결합"으로 인식된다. 다만 이 적대는 더 이상, "최종 심급에서" 정치적 마주침의 방도(issue)를 규정하는, 구조적이거나 실체적인 과정(곧 생산의 존재론)으로 이루어진 "토대"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그렇다. 반대로 사회적 적대는 "공백"으로, 정치적 마주침을 규정 불가능한 것으로, 따라서 자유로운 것으로 남겨두는 유일한 조건으로 이해된다.
    주요 논점은 이로부터 성립하는 정치적 형태들을 계급투쟁이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곧 계급투쟁의 적대는 단지, 그 결과 여부가 완전히 열려 있는 어떤 마주침의 "불충분근거"[충분근거율 내지는 충족이유율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 역자]일 뿐이다. 알튀세르에게 사회적 적대가 "규정적" 이것의 인과적 의미가 어떤 것이든 간에 이지 않은 이유는 더 이상 적대 자체의 자기 동일성도, 존재론적 실재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마키아벨리 독해에서 적대 자체가 소송의 대상, 갈등하는 관점들(perspectives)의 대상임을 의식하게 된다. "정치적 시점(point de vue)의 장소와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장소 사이에는, 정치적 시점의 "주체", 곧 인민과 정치적 실천의 "주체", 곧 군주 사이에는 환원 불가능한 이원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이원성, 이러한 환원 불가능성은 군주 인민 모두를 변용시킨다(affecte)." 그리고 "마키아벨리가 그로부터 군주의 정치 전체를 정의하게 될 이 인민, 이 인민에 대해 어떤 것도 스스로를 인민으로 구성하도록, 또는 정치적 세력으로 생성되도록 강제하거나 심지어 제안하지도 않는다. ... 그리고 어떤 것도 마키아벨리가 어떻게든 이러한 분할을 극복하려고 시도했다고 지시해 주지도 않는다. 역사는 인민의 관점에서 군주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지만, 인민은 아직 역사의 "주체"가 아니다." 새로운 군주의 구성적 기획은 이러한 기획 바깥에 놓여 있고, 그 기획보다 훨씬 원초적인 어떤 관점에 따라 분석되고 평가된다. 곧 또다른 정치적 주체의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의 합성과 순치(pacification) 이것이 어떤 정치적 형태를 띠든 간에 를 금지하는 사회적 적대에 대한 관점으로서 인민의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관점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여기서 장래의 마키아벨리 해석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고 있다. 그가 이룩한 중요한 진전은 "정치적 시점"과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시점" 사이의 차이를 명료화했다는 데 있다. "정치적 시점"이 정치적 통치 형태들의 구성의 시점으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에, 인민의 관점은 정치 형태의 제도화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 어떤 정치의 원천이 된다. 이는 근원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정치가 해야 할 게 무엇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게 무엇인지에 관한 쇄신된 이해를 위해 지극히 의미심장한 직관적 통찰이다[Le pouvoir constituant, PUF, 1997에서 Negri의 마키아벨리 독해와 비교해보라. 네그리는 인민의 "정치적 시점"과 새로운 군주의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시점"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네그리는 인민을 새로운 군주로 이론화할 수 있는데, 이는 인민이 "민주주의"라 불리는 통치의 "절대적" 형태를 구성하도록 요구받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비르투(virt , 역량)가 사회적 적대의 "현실 운동"과 조우하게 되는, 사건의 근원적으로 우연적인 성격 때문에 정치적인 것은 구성적으로 관점주의적이다. "현실 운동"이 주어진 어떤 정치 형태 속에서 완전히 합성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적 사건 안에는 정치 형태의 구성보다 더 많은 것이 존재해야 한다. 정치적인 것을 통해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 형태의 "해체"이며, 또한 모든 정치 형태의 성립에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임박한 방식으로 따라다니는(귀신들려 있는, hante) 갈등적 사건 속으로 [정치] 형태의 복귀이다[해체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Derrida, Spectres de Marx, Galilee, 1993; Marx & sons, PUF/Galilee, 2002 참조]. 정확히 말하자면 "정치적 세력 및 실천의 시점"과 대립하는 "정치적 시점"을 표현하는 것은 바로 사건 속으로 이러한 형태의 복귀이다. 인민에게 형태를 부여하는 "힘"[세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인민이 정치적 기동력(ressort)을 결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믿는 것은 오류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믿음은 정치적인 것이 형태를 구성하는 실천으로 환원되거나 이러한 실천으로 소진된다는 생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점의 차이는 이러한 전제를 반박한다. 마키아벨리가 끊임없이 지적하듯이 인민은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욕망"에 따라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인민의 정치적 행위는 항상, 어떤 정치적인 또는 적법한 지배형태 안에서 인민의 [구체적인] 표현 가능성(figurabilite)을 초과하며, 일차적으로는 통치형태들을 구성하는 것으로서보다는 해체하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하지만 국가의 해체에 관해 다루기 전에, 국가의 구성의 비밀은 무엇인가? 한 국가가 지속하기 위해서는 구성된 재생산의 권력은, 말하자면 구성적 권력으로서의 인민을 복속시켜야 하며, 인민이 자신의 "주체"로서, 자신의 "기원"으로서 기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마키아벨리가 로마 공화국에 대한 분석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마키아벨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 지속 가능한 국가의 정초, 시작인데, 이 국가는 일단 군주에 의해 정초되면 "혼합" 통치의 효과에 의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 이 중심은 로마, [오랜 시간 동안] 지속했던 국가이다. 로마의 중심은 그 시작이다. 이 공화국의 시작은 군주정이었다는 데 있으며, 이 군주정은 이 국가를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적절한 어떤 통치[정부], 곧 혼합 통치를 로마에 덧붙였고, [이를 통해] 이러한 통치는 공화국의 관점에서 추구되었다."[E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II, p, p. 96] 국가의 지속은 군주정과 공화정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할 것을 요구한다. "한 국가의 구성에서 두 가지 계기. 1) 절대적 시작의 계기가 존재하는데, 이는 단 하나, "단 하나의 개인"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계기는 그 자체로는 불안정하다 [...] 2) 두 번째 계기는 지속의 계기인데, 이는 법률의 부여(donation, 제정) 및 고독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이중적 작용에 의해서만 보증될 수 있다."[같은 책, p. 115] 이 두 번째 계기에서 국가는 군대, 동의(곧 종교)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에 의한 통치 같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을 통해 인민 속에 "뿌리내린다." 로마사에서 공화국의 계기는, 단지 자기 자신을 국가를 "보존하는" 권력으로 이해시키려는 목적으로 "절대적인" 구성적 시작으로 주어지는(se donne, 스스로를 제시하는) 재생산의 계기에 상응한다.
    알튀세르는 국가 이것 자체가 생산관계들의 재생산 형태이다 가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방식을 해명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모델로서 로마 공화국 헌정[구성]의 발전에 대한 이러한 독해에 의지하고 있다. 로마 헌정의 발전은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재생산 형태로서의 국가)의 이데올로기(재생산)를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의 고유한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이는 로마인들이 군주정에서 공화정으로 헌정을 발전시키면서 제도화했던 정치적 권위를 산출하는 체계와 다르지 않다. 국가의 권위(auctoritas)는, 정초자가 형태를 부여하고(agere) 다수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유지하는(gerere) 관계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마키아벨리가 설명하듯이, "국가의 건국에는 단지 한 인물이 적합하다 해도, 일단 조직된 정부는 그것을 유지하는 부담이 단지 한 사람의 어깨에만 걸려 있다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정부를 많은 사람들이 보살피게 될 때, 즉 그 유지가 많은 사람들의 책임에 내맡겨지게 될 때, 그것은 실로 오래 지속되"기 때문이다[『로마사론』1권 9장; 강정인·안선재 옮김,『로마사론』한길사, 2003, 109쪽]. 정치 형태는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를 뒷받침하려는 태세가 되어 있는 한에서만 지속할 수 있다. 이러한 뒷받침은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 최초의 시작, 정초와 단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결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오히려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정초를 완수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통치자에서 시민들로 전달되고 대의 정치 기구(본질적으로는 입법 의회) 안에 제도화되는 이러한 요청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호명이라고 부른 것에 밀접하게 상응한다. 호명의 기능은 인민을 정치적 기체(基體, subjectum), 국가를 구성하는 토대로 만드는 데 있으며, 역으로 이러한 토대는 국가가 실행하는 예속과 지배에 대해 지속과 적법성을 부여함으로써 국가를 정초한다. 
    로마 공화국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독해에서 알튀세르는 이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 행간에서 읽을 수 있는 한 가지 결정적인 직관에 대한 확증을 발견한다. 이 직관은 이데올로기 장치로서의 국가가 자기 자신의 정초, 지속 내지는 재생산을 위해 인민이 탁월한 정치적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곧 인민이 구성 권력이 되고 이를 통해 통치의 토대로 제공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에 관한 이 텍스트에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절대적 한계들" 너머로 나아가는데, 왜냐하면 그는 지속 가능한 국가의 토대는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 장치로서의 국가는 자신의 토양 내지는 자신의 토대를 자기 바깥에서, 예컨대 특수한 경제적 이해관계들에서 발견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좀더 정확히 말하면, 로마 공화국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대의적이고 입헌적인 민주주의 형태 안에서 발견한다. 대의·입헌 민주주의는 국가가 자신의 이데올로기 장치로서의 소명을 가장 잘 성취할 수 있게 해주는 통치 형태이다. 이는 구성된 권력이 자기 자신을 구성 권력으로, 곧 국가의 주체로서의 인민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해주는 형태이며, 역으로 이 후자는 국가 자신이 가장 오래 지속되도록, 가장 효과적으로 재생산되도록 보증해준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재생산 이론이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 담론에서 자신의 확증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의 마키아벨리 독해는 환원적이어서, 정치적 지배의 비밀들에 대한 이해가 아닌 정치적 자유의 가능성들에 대한 이해를 위한 담론적 함의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를 결여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유일한 통치 형태, 곧 국가가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통치 형태에 관심을 두고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알튀세르는 인민의 시점을 군주의 시점에 종속시킨다. 잘 정초되고 지속할 수 있는 정치 형태를 지향하는 것은 오직 군주일 뿐, 인민도 그런 것은 아니다. 인민의 관점은 국가의 주체-기체(sujet-subjectum)의 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
    로마의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는 이전 및 이후의 모든 정치 사상과 관련하여『로마사론』의 진귀함은, 시민의 삶(vivere civile)은 정치가 잘 정초된 법의 통치라는 이상 이는 로마식의 권위 체계를 모델로 삼고 있다 을 초월하고 전복하는 한에서만 자유로운 삶(vivere libero)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주장은『로마사론』3권에서 등장하고 줄곧 옹호되고 있는데,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그 자신이 시초로의 회귀(riduzione verso il principio)라고 부르는 것을 경유함으로써만 정치체는 자유롭게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을 옹호하고 있다. 내용 및 형태에서 "시초로의 회귀"는 혁명을 의미한다. 여기서 회귀하는 시초는 권위의 시초, 정초의 절대적 시작과 동일한 "시초"이며, 이러한 회귀는 권위로부터 역사적 생성에 어떤 정치적 형태를 각인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고, 역사적 생성의 근원적 우연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나는 이러한 근원적 우연성을 모든 정치 형태의 사건적 성격이라고 부른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을, 모든 정치 형태가 그로부터 성립해야 하고, 또 어떤 주어진 정치 형태가 확립한 특권 내지는 불평등이 이 정치 형태 아래서 번영을 누리고 이 정치 형태의 특혜를 받는 사람들을 타락시킬 때마다 모든 정치 형태가 거기로 회귀할 수 있는, 권리평등(isonomy)의 시공간으로 재정의한다. 타락은 불평등의 소외인데, 이는 모든 주어진 지배의 정치 형태가 고착되고 존속됨에 따라 생산된다. 이 때문에 공적 공간의 평등 및 자유로의 회-귀(re-duction)는 "시초로 회귀하는", 곧 정치 형태를 혁-명(re-volutionne)하고 정치체 내의 타락과정에 저항하는 사건 속에서만 생산될 수 있다.

사건들의 유물론을 향하여

    자신의 마지막 혁신적인 철학 텍스트인 <마주침의 유물론의 은밀한 흐름>(1982)에서 알튀세르는, 하이데거, 푸코, 들뢰즈 및 데리다 같이 그보다 먼저 이 오솔길을 밟아간 일련의 철학자들에 강하게 준거하면서, 명시적으로 형태 및 사실에 대한 사건의 우선성을 주장하고 있다. 알튀세르의 "마주침의 유물론"(또한 "우발성의 유물론" 내지는 "사건들의 유물론"이라 불리기도 한다)은 사건들로부터 출발하여 형태들의 세계의 성립을 사고하려는 시도이다.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와 우리}에서 정세적 결합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는, 사건적인 마주침들로부터 출발하여 형태들의 세계의 구성 및 원자들의 결집을 설명하는 원자들의 클리나멘(clinamen) 또는 편향(deviation)에 관한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의 학설에 준거함으로써, 좀더 적합하게 마주침이라고 지시된다. "세계는 완성된 사실(기성 사실, fait accompli), 일단 사실이 완성된 후에 그 속에서 근거[이성], 의미, 필연성 및 목적의 군림이 시작되는 완성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의 이 완성은 우연의 순수한 효과일 뿐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클리나멘의 편향에 기인하는 원자들의 우발적 마주침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사실의 완성 이전에는, 세계 이전에는 사실의 미완성만이, 원자들의 비현실적 실존에 불과한 비세계만이 존재할 뿐이다."[알튀세르,『철학과 맑스주의』서관모·백승욱 옮김, 새길, 1996, 39-40쪽] 어떤 것도 원자들의 마주침에 선행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이러한 마주침을 필연적인 것으로 규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의 완성"의 "구성적" 차원 그 자체가 하나의 우연적 사건이며, 이러한 차원은 알튀세르가 "사실의 미완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결코 규정될 수 없다. 정치적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사실의 완성에서 완성된 사실로의 이행이 군주 또는 국가의 활동을 기술한다면, 이러한 이행의 우연적 성격, "완성" 자체가 지닌 사건적 성격 이는 완성이, 자신의 가능한 실현 여부에 대해 무-차별적으로(in-differente) 남아 있는 역량으로서의 "미완성"에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은 인민의 해-체적(탈-구성적, de-constructive) 활동에 상응한다. 이러한 해-체적 활동에서 인민은 더 이상 국가의 정치적 주체로, 국가에 의해 정립된 구성적 주체로 간주되지 않으며, 오히려 통치되지 않으려고 하는 정치적 행위자로 간주된다.
    {마키아벨리와 우리}에서처럼 이 텍스트에서도 군주의 비르투는 마주침을 "지속"시키는 권력으로 정의된다. 군주는 "마주침의 효과들에 형태를 부여하는 형태들"에 상응한다. 군주는 "우연적인 것들의 마주침의 필연-화(필연적-생성, devenir-necessaire)"를 자신의 과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이전의 마키아벨리 독해와 달리 여기서는 "필연의 우연에 대한 종속"을 사고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점을 함축하고 있다. 곧 "결코 어떤 것도 완성된 사실의 실재성그 영구성의 보증이 될 것이라고 보증하지 못한다. (...) 역사는 (...) 완성해야 할 또 다른 판독 불가능한 사실에 의한 완성된 사실의 영속적인 폐지이며,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이 폐지라는 사건이 일어나는지 결코 미리 알지 못한다. 다만, 패를 다시 분배하고 주사위를 빈 탁자 위에 다시 던져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철학과 맑스주의』, 46-47쪽] 지속하는 국가는 항상 이미 자신의 "폐지"의 내재적이고 임박한 가능성 내부에 기입되어 있다. "시초로의 복귀"가 단지 완성된 사실을 사실의 완성을 구성하는 권력으로 되돌려보낼 뿐만 아니라, 좀더 근원적으로는 완성 자체가 자신의 사건 및 자신의 비 사건에 대해 완전히 무차별적으로 남아 있게 만들 때, 그 때가 바로 "폐지"의 순간이다. 이러한 무차별성은 완성의 문법의 견지에서는 판독 불가능한 "또 다른 사실"에 상응할 것이다.
    알튀세르는 결코, 완성된 사실을 폐지하는 역량으로 이해된 인민의 역량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역량은 새로운 구성적 활동의 전제일 뿐 아니라, 좀더 원초적으로는 인민 편에서 보여주는 주권적 무차별성[무관심]의 표현이며, 따라서 국가 및 정치 정당 체계가 부과하는 통치의 기획에 대한 정치적 시점의 표현이기도 하다. 인민의 역량이라는 관념과 관련하여 "통치에 대한 주권적 무-차별성"이라는 표현에 의지하여 나는, 소위 구성적이라고 하는 인민의 입장의 세 가지 특징을 부각시켜 보려고 한다. 첫째, 인민은 국가의 정초 기획에 대한 자신의 차이를 주장하는 한에서만 역량을 지닐 뿐이다. 그의 무-차별성은 이러한 차이 "내"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데 있다(이러한 유보는 인민을 국가의 정초와 동일시하는 모든 전통적인 "공화주의" 기획을 좌초하게 만든다). 그 다음으로 비통치의 행위자로서 인민은 국가 및 그것의 통치 기획에 의해 정식화될 수 있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지 않으며, 그의 "무-차별성"은 통치 가능성의 결과들에 대한 근원적 비-이해관계[무-관심]에 준거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문제가 되는 결과들에 대한 진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국가를 판정할 수 있으려면 인민은 국가 및 정치 체계가 적법성을 획득하기 위해 재합성해야 하는, 특수한 이해관계의 저장소로 기능해서는 안된다(이러한 유보는 인민을 시민사회와 동일시하는 모든 "다원주의적" 시도를 좌초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인민의 주권적 무차별성은 의회의 호명에 대한 그들의 무반응(impassibilite)에 준거한다. 인민은 역량을 지니고 있을 때 정치적으로 대표되려고 하지 않는데, 이는 정확히 말하면 국가에서 유래하는 이러한 정치적 인정의 형태는 인민들의 예속적 주체화(sujetion)를 획득하는 주요 방식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유보는 인민을 선거 민주주의에 의해 구성된 공적 공간[공론장]과 동일시하는 모든 "자유주의적"인 시도를 좌초하게 만든다).
    혁명적 사건에서 인민은 더 이상 자신을 정치적 주체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가 욕망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국가에 의해 통치의 기획 안에서 실현될 수 없다. 통치되지 않으려는 욕망은 국가의 관점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며, 이러한 욕망이야말로 인민의 역량을 국가가 다루기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민이 통치되지 않으려는 자신의 욕망을 표현할 때마다 재생산 과정은 정지의 고통을 겪고 국가의 기계는 중단된다.
    이러한 호명에 대한 위반들(manquements), 국가-기계의 갑작스런 중단들을 해명할 수 있는 인민의 역량이라는 관념은 이제 겨우 몇몇 사람들에 의해 파악되고 있다[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자크 데리다와 자크 랑시에르가 최근 개진했던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들은 특히 풍부한 시사점을 지니고 있으며, 이들이 과거에 알튀세르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 그렇다]. 이러한 인민의 역량이 마르크스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독재"(곧 국가의 궁극적인 파괴를 목표로 하는 국가 권력의 획득) 정식이나, "인민을 위한 인민의 통치"라는 참여 민주주의적 정식으로 파악될 수 없음이 이미 분명히 드러난다. 이 두 가지 정식은 헤게모니 투쟁의 형태, 곧 통치를 위한 투쟁의 형태를 표현하고 있는 반면, 우리가 방금 호소했던 것은 정확히 말하면 가능한 한 엄밀하게, 통치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투쟁 이는 결코 명령하지 않는다 을 헤게모니의 세력과 정치적 실천들에 의한 이 투쟁의 "복속"으로부터 구분하려는 시도이다. 만약 인민이 역량을 지니고 있다면, 구성된 권력이 사회적 적대와 정치 형태의 분리를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가는 이러한 분리를 항상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의 형태 아래 제어하며, 이를 명령의 대상이 되는 주체에 대한 투쟁이다. 하지만 "현실 운동"으로서 적대는 그 자체로는 헤게모니적이지 않으며, 헤게모니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구성된 모든 정치 형태와 관련하여 이러한 적대가 지니고 있는 무차별적이고 근원적으로 비정초적 성격은 재생산적이고 해체적이며 정초적이고 혁명적인, 정치적인 것의 두 가지 계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 두 가지 계기의 상호 작용이 없다면 정치적 자유는 인식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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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퍼온글] 발리바르-[마르크스를 위하여] 재판 서문

Etienne Balibar, “Avant-propos pour la réédition de 1996”, in Pour Marx, La Découverte, 1996.

 “맑스를 위하여”―하나의 호소, 거의 구호에 가까운 이 제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또는 아마도 새롭게, 30년 전과 마찬가지로 높고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하지만 다른 이유들 때문에, 그리고 전혀 다른 맥락에서 그렇다. 알튀세르의 책은 이제 새로운 독자들에게 전달될 것이고,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예전의 독자들의 경우는 사람 자신만이 아니라 텍스트를 수용하는 방식까지도 크게 변화했다.

1965년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되었을 때는 자신의 고유한 논리 및 윤리를 지닌 특정한 방법에 따라 맑스를 읽자는 선언과 동시에 맑스주의, 좀더 정확히 말하면 진정한 맑스주의(한 운동, 한 “당파”와 분리할 수 없는, 그리고 이를 공개적으로 내세우는 이론, 철학으로서)를 위한 선언이 중요한 문제였다. 오늘날의 경우는, 아마도 이 책에서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려고 하는 또는 심지어 상상적으로 이를 재개하려고 하는 향수에 젖은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돌이킬 수 없이 끝나버린 맑스주의의 종언 이후, 맑스주의를 넘어서, 맑스를 읽고 연구하고 토론하고 활용하고 변혁하자는 호소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 세기 이상 동안 맑스주의로 존재해 온 것에 대한, 이를 우리의 사고 및 우리의 역사와 결부시키는 복합적인 연계들에 대한 놀랄 만한 무지나 또는 보수주의적인 경멸을 용인하면서 그렇게 하자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배제(foreclusion)는 늘 그렇듯이, 때로는 상반된 색조를 띠기도 하는 가상과 오류의 반복만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호소는 맑스 자신이 맑스주의와 맺고 있는 심층적으로 모순적인 관계, 이를 입증해 주는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분석하려는 집요한 노력에 대한 호소다.

사실 이 책에는 맑스주의에 이론적인 실체와 형태를 부여하고자 하는, 저물어가는 20세기에 이루어진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웅변적인 그리고 또한 가장 설득력 있는 논거를 지닌 시도들 중 하나가 담겨 있다. 맑스에 대한 해석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이 시도는 분명 맑스의 작업 및 그 계승자들의 “작업들”들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몰인식을 표현해 주었다(tradusait). 하지만 이 책에는 또한―적어도 나는 어느 때보다도 이를 더 분명하게 느끼고 있다―맑스의 사고 양식, 또는 알튀세르가 제안한 표현에 따르면 그의 “이론적 실천”에 고유한 어떤 것이 다시 출현했는데, 이는 어떤 “맑스주의”로도 환원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고유한 방식에 따라 맑스주의의 한계들을 드러내 주는 데 기여했다. 이는 이 사고양식에 구성적인 명제들 및 아포리아들로 거슬러 올라가서 내부에서 이 작업을 수행했기 때문에 더욱 더 강력한 기여였다.

이 때문에 1965년 『맑스를 위하여』의 출간(및 몇 주 뒤에는 『자본을 읽자』라는 집단 저작의 출간)이 곧바로 점화하고, 앙리 르페브르 같은 위대한 맑스주의자들 및 레몽 아롱 같은 맑스주의의 위대한 적수가 참여한 “상상적 맑스주의”와 “현실적 맑스주의” 사이의 논쟁은 오늘날 더 이상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모든 맑스주의는 상상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들 중 일부, 서로 매우 다르고 사실은 매우 적은 또는 소수의 텍스트들이 대표하고 있는 몇 가지 맑스주의는 여전히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따라서 현실적 효과들을 생산하도록 할 수 있는 힘을 보유하고 있다. 나는 『맑스를 위하여』의 “맑스주의”가 능히 이것들에 포함된다고 믿는다. ...

하지만 꼭 필요한 몇가지 역사적이고 전기적인 정보들을 제시하기에 앞서, 이 기록과 그 독자들 사이에 여러 개의 가리개―여러 가지 설명틀―을 만들어 놓을지도 모를 “낡아빠진” 독해의 시도를 예방하고 싶다.

『맑스를 위하여』에 수록된 텍스트들은 1961년에서 1965년 사이에 출간되었다가 한 권에 묶였다는 점을 잘 알아 두어야 한다. 따라서 이는 한편으로는 스탈린의 범죄에 대한 “흐루시초프의 보고”(1956)와 부다페스트 봉기 및 수에즈 파병(둘 모두 1956에 벌어졌다), 쿠바 혁명의 성공(1959), 알제리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알제리 무장 봉기 이후 드골 장군의 권력으로의 복귀(1958-1962), OECD의 창립(1960), 베를린 장벽 축조(1961) 같은 프랑스사 및 세계사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1965), 중국의 문화 혁명(1966에 시작), 프랑스와 다른 나라(멕시코, 독일, 미국, 폴란드 ...)에서 68년 5월에 일어난 사건들, “프라하의 봄” 및 체코슬로바키아 침공(마찬가지로 1968년), 사회당과 공산당 사이의 “좌파 연합에 따른 공동 강령”(1972), 70년대 “유로 공산주의” 탄생, 아옌데 정권의 몰락 및 아옌데 피살(1973),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1974) ... 등과 관련되어 있었다.

『맑스를 위하여』의 테제들을 맑스주의 및 맑스에 대한 논쟁의 역사만이 아니라 20세기 철학사―이 테제들은 이 역사 안에 아주 가시적인 흔적을 남겨 놓았다―안에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이 책이 1960년이라는 아주 놀라운 해 바로 다음부터 쓰여졌다는 사실을 알아두는 게 유익할 뿐 아니라, 아마도 필수불가결할 것 같다. 1960년 이 해에는 메를로-퐁티의 『기호들』([모스에서 레비-스트로스까지] 및 [마키아벨리에 대한 노트]가 수록된)과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레비-스트로스는 1962년 『야생의 사고』에서 이 책에 답변할 것이다), 질-가스통 그랑제(Gilles-Gaston Granger)의 위대한 인식론 저서 『형식적 사고와 인간 과학』 및 가스통 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 앙리 에(Henry Ey)가 조직한, 라캉을 중심으로 한 정신분석에 관한 본느발 회의, 마지막으로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 의식』의 불어 번역(저자 자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이 출간되었다. 앙리 르페브르의 『일상 생활 비판』(1958, 1961)과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1961), 자크 데리다의 『후설 『기하학의 기원』 서론』 및 레비나스의 『총체성과 무한』, 하이데거의 『니체』 강의 출간은 『맑스를 위하여』의 시작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계획적으로가 아니라 “개입”이라는 우연적 기회들에 따라 『맑스를 위하여』가 쓰여지고 있는 동안, 장-피에르 베르낭의 『그리스인들의 신화와 사상』(1965),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1963),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 변동』(1962),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1963), 르루아-구랑의 『행동과 말』 및 레비-스트로스의 『신화론』 1권(1964), 칼 포퍼의 『추측과 논박』과 비유멩의 『대수의 철학』(1962), 그리고 또한 코이레의 『뉴턴 연구』(1965)가 잇따라 출간됐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출간된 후 곧바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1차원 인간』, 피에르 쉐퍼의 『음악대상론』, 장켈레비치의 『죽음』, 바르트의 『비평과 진리』, 벤베니스트의 『일반 언어학의 문제들』, 푸코의 『말과 사물』, 라캉의 『에크리』, 캉길렘의 [개념과 생명][1968년 『과학사 및 과학 철학 연구』에 재수록] 등이 뒤따랐는데, 이 모두는 또 하나의 놀라운 해인 1966년에 출간되었다 ...

요컨대 프랑스 대학의 심장부에 거주하는 프랑스 공산당의 “기층”의 투사[평당원, militant “de base”]인 한 철학자의 『맑스를 위하여』의 저술 및 출간은, 점령 기간 중에 태어난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냉전이 “평화 공존”으로 역전(또는 연장)되었을 때, 탈식민화가 불가피하게―하지만 항상 힘겨운 투쟁 끝에―일반화된 반제국주의와 사회주의로 향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들의 경제적 성장과 문화적 변동이 부와 권력의 분배에 대한 반대를 확대하는 데까지 이르렀을 때, 서유럽에서 (여전히) 민족적이고 (얼마간) 사회적인 국가가 세계화로의 전환점을 준비하고 있는 반면, 동쪽에서는 스탈린 이후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공공연하거나 잠재적인 위기가 여러 가지 형태로 “혁명 속의 혁명”(레지스 드브레)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처럼 보였을 때인 전후의 긴박한 정세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두는 것이 유익하다.

그리고 이 책은 전쟁 직후와 관련하여 철학 논쟁이 자신의 대상 및 스타일을 바꾸고 있던 시기에 출현했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도 유익하다. 단지 “의심의 철학들”―그 위대한 스승은 니체이고, 부차적으로는 프로이트 내지는 “구조주의들”이다―, 즉 사회적 실천과 의미작용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들(disciplines)에게 그것들에 본래적인 과학성을 부여하려는 야심을 지닌 철학들이 주장되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푸코가 자신의 천재적인 종합적 정식화의 능력으로 곧바로 말하게 될 것처럼 “지식과 권력의” 질문들이 오랫동안 도덕과 심리학(여기에는 현상학적 심리학도 포함된다)의 질문들을 압도하게 될 것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또한, 그리고 아마도 무엇보다도 이 시기 전체 동안 역사와 인류학, 정신분석과 정치를 관통하면서 철학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의 타자, 자신의 무의식, 비철학에 직면하고, 이것들과 대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철학이 당시에 추구하던 것이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비판과 자신의 재구성의 수단들을 발견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분명히 바로 이것이, 모든 믿음들 및 소속들과 관련된 문제는 제쳐 둔다면, 철학이 맑스와 치열한 논쟁을 벌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렇다, 이 모두는 유용하고 필수적이다. 하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맑스를 위하여』는 기록 문헌(document)이 아니다. 이는 책이며, 여기에는 두 가지의 타당한 이유가 존재하는데, 이제부터 가능한 한 간명하게 그 이유들을 환기해 보고 싶다.

첫째로 『맑스를 위하여』는 용어의 강한 의미에서 쓰여진 것이다. 이 책은 알튀세르의 철학 스타일을 가장 명료하게 표현해 주는 것들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다수의 미간행 원고들―이중 어떤 것들은 매우 이른 시기의 원고들이고 또 어떤 것들은 말년의 원고들이다―의 출간 덕분에 우리는 이제 이 스타일이, 고전들의 취향으로 가득차 있고 영성과 역사에 대한 관심에 푹 젖어 있는, 매우 논쟁적인 한 사춘기 소년의 펜으로부터, 그 이후에는 우수한 대학 논문을 쓴 젊은 필자로부터 쓰여진 몽상들과 에세이들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추구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중에 가면 이 스타일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 유물론”을 그 고유한 지반 위에 체계화하는 데 기여하려는(concurrence) 이론적 투사의 시도 속에서, 그리고 허구적인 법정에 제출하기 위해 쓰여진 검사의 구형논고이자 동시에 변론인 자서전의 고백(나는 이 주장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 속에서 사라지고, 예외적으로 번득이는 자취 속에서 엿보일 뿐이다. 하지만 『맑스를 위하여』에서―이미 저 비범한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PUF, 1959; 1992년 Quadrige 총서로 재출간]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마키아벨리와 우리』[L. Althusser, Écrits philosophiques et politiques, tome II, ed. François Matheron, Stock/IMEC, 1995, pp. 42-168]라는 “책”(왜냐하면 이는 한 권의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이 그의 책상서랍에서 그에게는 유일하게 “이론”의 영예를 얻을 만한 것으로 보존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에서―이 스타일은 가장 훌륭하게 표현되고 있어서 이 책의 첫 번째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는 과학의 엄밀함에 대해 말하고, 그 수사법적, 개념적 경제성을 통해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주는 스타일이면서 또한 매우 예외적으로 정열적인 스타일이기도 하다. 즉 알아내기 힘든 원천들에서 체험된 그 모든 정열이 일종의 추상의 서정주의(언젠가 알튀세르가 크레모니니에 대해 “추상 회화”가 아니라 “추상적인 것에 대한 회화”라고 말하게 될 의미에서)로 표현되는 스타일인 것이다. “결과들의 힘”([아미엥에서의 주장])이 공언되는 이 스타일은, 원하는 모든 것을 파스칼과 루소에게, 페귀와 사르트르(이는 분명한 사실이다)에게, 맑스와 니체에게 빚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절대적으로 독특한,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공적인 어조를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이는 우리에게 글쓰기의 발명 없이는, 이 글쓰기가 “편”드는(prend le “parti”) 개념에 의한, 이 개념을 위한 글쓰기의 발명 없이는 철학―추론적이든 반성적이든, 아포리즘적이든 논증적이든 간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입증해 준다.

두 번째로, 『맑스를 위하여』는 아무런 고유한 교의도 제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는 주어져 있는 한 교의(또는 이론), 즉 맑스의 교의를 위해 “봉사한다.” 하지만 이 교의는 실존하지 않는다는, 적어도 체계적 서술의 형태로는 실존하지 않는다(왜냐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론화는 분명히 이 교의의 희화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는 기묘한 특수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설명하듯이 구상[ébauches]과 응용, “전제 없는 결론들” 내지는 “맑스주의의 이론적 작업들” 및 “실천적 작업들”에서 그 자체로 정식화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답변들의 형태로 이를 발견함과 동시에 진정으로 이를 생산해야 한다.

즉 개념들을 명명하고 분절하고, 개념들이 그 속에 놓여 있는 테제들(사실은 물론 가설들)을 언표해야 한다.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에서 맑스로 하여금 그가 실제로 말했던 것 이상을, 그리고 그와는 다른 것을 말하게 하면서, 하지만 또한 인식론과 정치, 형이상학의 모든 영역으로 맑스에서 유래한 질문들과 통념들을 수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으면서, 놀랄 만한 개념적 도구들의 배형(constellation)을 생산함으로써 끊임없이 수행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알튀세르는 [서문]([오늘], II, p. 24)에서 자신이 제시한 맑스 독해의 가설들을 “문제설정”(그는 이를 1963년에 죽은, 그리고 이 책이 헌정된 자크 마르탱(Jacques Martin)에게 빌려 왔다고 말한다)과 “인식론적 절단”(그는 이를 자신의 선생이었던 가스통 바슐라르에게 빌려 왔다고 말한다)이라는 주요한 두 가지 이론적 개념과 결부시켰다. 사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두 개념―이 개념들이 제기하는 문제들과 함께―은 “알튀세르주의”의, 또는 오히려 그가 인식론 담론에 남긴 흔적의 서명 표시로 표상/대표된다. 『맑스를 위하여』의 기획에 본질적인 이 개념들은 하지만 분명히 『맑스를 위하여』의 이론적 내용 전체를 소진시키지는 않는다. 나로서는 이러한 단순화된 소개―여기서는 토론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논쟁의 소재를 지적해 두는 게 문제다―가 지닐 수 있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상호 독립적인 통념들과 질문들의 세 가지 배형을 확인해 두고 싶다.

한 가지 배형은 “인식론적 절단”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사실 이 개념에는 이론적 실천, 과학성, 그리고 관념들이나 사고들 자체가 아니라 이것의 물질적 가능성의 체계적 통일성으로 사고된 문제설정(이 개념은 아마도 하이데거의 프로블렘슈텔룽(Problemstellung)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유래한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들뢰즈와 푸코의 “문제화”(problématisation) 개념과 이를 비교해 보면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 같은 개념들이 속할 만한 충분한 권리를 갖고 있다.

여기가 가장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지점인데, 이는 과학이라는 관념이 품고 있는 정서들 및 이 관념이 포함하고 있는 난점들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이 점에 관해서는 두 가지 관찰만 제시해 두겠다. 알튀세르는 상이한 자기비판들(특히 “변증법적 유물론” 또는 “이론적 실천의 이론”이 과학 담론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철학 담론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에 관하여)을 전개할 때에도 (『자본』에서 제시된 것과 같은) 맑스의 이론이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적인 중핵을 포함하고 있다는 관념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은 반면, 맑스 이론의 과학성에 대한 관점에서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전혀 그런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연구인 [알튀세르의 대상](국역: [철학의 대상: ‘절단’과 ‘토픽’], 윤소영 옮김, 『알튀세르와 맑스주의의 전화』(이론, 1993) 참조].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는 (이데올로기적 가상들을 넘어) “현실적인 것으로 회귀”한다는 관념으로부터 “이론적 전유”―이는 동시에 과학이 대립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이자 이데올로기에 고유한 가상적 권력에 대한 과학이기도 하다―라는 좀더 스피노자적인 관념으로 진화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맑스를 위하여』 및 후속 논문들이, 실존하는 과학성의 모델을 맑스주의적 논쟁 안으로 “수입”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또는 어쨌든 동시에) 역사유물론 (및 정신분석)이 구성하는 (갈등적이면서 엄밀한) 독특한 인식의 실천으로부터 출발해서 “과학” 개념을 개조하려고 한 것인지 질문해 볼 수 있다(또한 마땅히 질문해 봐야 한다). 이 경우 “과학”이 우리에게 절단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맑스의 절단에 고유한 명증성(흄식의 감각론적 형태뿐만 아니라 헤겔식의 사변적인 형태까지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경험론 및 직접성에 대한 비판으로서)이야말로 과학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우리가 다시 질문해 보도록 촉구한다. 다시 말해 과학이 포함하는, 하지만 과학이 필연적으로 그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지는 않은, 인식과 진리 효과들 자체에 관해 질문해 보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공된 두 번째 배형은 구조라는 통념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이 통념은 분명 체계적 통일성 내지는 “총체성”라는 관념에 준거하지만, 이 후자는 완전히 내재적인 방식으로, 또는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효과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부재하는 원인”의 양식으로 자신의 효과들 안에서 주어질 뿐이다(알튀세르는 나중에 이를 자신의 다양한 양태들 안에 내속하는 스피노자의 실체와 비교하게 된다). 문제는 맑스 및, 그와 그 이후의 다른 맑스주의자들(특히 정세, “구체적 상황”에 대한 분석을 할 때의 레닌)이 역사 안에서 발견하고 싶어 하는 인과성의 유형 자체이기 때문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제의 다양성이 실천들의 다양성이라는 점이다. 실천들의 총화를 구조화하는 것은 실천들이 서로에 대해 작용하는 방식을 가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알튀세르는 실천들은 오직 본질적이고 환원불가능한 과잉결정의 양식으로 서로에게 작용한다고 말하는데, 어떤 “복잡성의 감축”도 이 과잉결정 너머에서 선형적 결정 관계의 단순성을 재발견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한다. 그와는 반대로 여러 실천들 중 하나에 의한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이 주장되면 될수록, 이와 상관적으로 이질적인 “지배”(domination), 또는 “지배작용”(dominance)의 필연성이 생겨 나고, 따라서 “순수한” 경제적 경향의 실현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의 다양화가 생겨 난다. 그리고 이 장애물들이야말로, 다른 의미에서 본다면, 유일하고 진정한 “역사의 동력”을 이루는 계급투쟁의 소재 전체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구조에 대한 이러한 관점 ... 은 인문과학들의 인식론을 분할하고 있는 방법론적 “개체론”과 방법론적 “유기체론” 내지는 “전체론”에 대한 이중적 거부에 의해 부정적으로 표시된다. 따라서 이 관점은, 적어도 형태상으로는, 근원적으로 관개체적인(transindividuelles) “관계들”(“rapports” ou “relations”)의 결합으로서의 사회적인 것을 이론화하는 데서 철학적인 표현을 제공해 준다.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고전적인 관념론 및 유물론에 직면하여 이러한 이론화의 필요성을 깨달은 뒤, 계속 이에 관한 작업을 시도했다. 구조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피콜로 극단: 베르톨라치와 브레히트(유물론적 연극에 관한 노트)]에서 제시되는 것처럼, 주관적 시간들의 분리 내지는 거리두기의 구조라는 관점에서 비범하게 소묘되고 있는 “의식”이라는 인간학적 범주에 대한 비판을 자신의 대응물로 지니고 있다. 이 논문은 책 전체의 이론적이고 기하학적인 중심이지만, 이 책에서 이 논문은 “도둑맞은 편지”로 나타나는데, 이는 누구도 이를 그 자체로[즉 이 책의 중심으로] 읽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는 이 논문이 미학에 관한, 연극에 관한 논문이라는 암묵적인 이유(raison honteuse)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렇다면 다시 한번, 알튀세르가 여기서, 궁극적으로는 역사나 역사성이 아니라, 아주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 안에서 우연의 필연성을 사고하기 위해―단지 맑스 이론의 “시작들” 및 진화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구조”라는 관념을 활용하는 방식에 내재하는 난점이 드러나게 된다. 한편으로 과잉결정이라는 관념은 사건이 포함하는 예견불가능성과 비가역성의 역설적 결합과 함께 사건의 가지성에 응용되었다( ... “정세” ... ). 다른 한편으로 이는 생산양식들의 범역사적 비교에, 따라서 계급투쟁 및 사회구성체의 역사적 경향에 응용되었는데, 여기서 문제는 이것들을 진보의 이데올로기들 및 경제주의적 진화주의와 “역사의 종말”이라는 종말론에서 떼어내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한다면 한편으로는 공산주의 혁명들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적 이행들에 응용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이 양자는 같은 것이 아니다. 연속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모순과 과잉결정], [유물변증법에 대하여]라는 위대한 두 논문을 읽거나 다시 읽어본다면, 내 생각으로는, 첫번째 논문은 사건에 대한 사고쪽에서 과잉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비해, 두 번째 논문은 경향 및 시기 구분쪽에서 이 개념을 이끌어낸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분명 하나의 관점을 다른 관점과 대립적으로 선택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해결책은 『맑스를 위하여』에서, 그리고 여기에 나타난 구조에 대한 관념에서 이 두 관념 사이의 긴장, 또는 상호성으로서의 역사성이라는 질문에 대한, 결론은 아니겠지만, 매우 밀도있는 논의를 확인하는 데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라는 통념 및 질문 주위에서 조직되는 배형이 남아있다. 한편으로는 (정치적이면서 철학적인 이유들 때문에) “이데올로기(들)”에 대해 말하기를 중단하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 통념에서 해석학이나 역사에 대한 담론의 계보학의 주요 장애물을 발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 문제에 대한 30여년 간의 토론―이 역시 하나의 주기를 이루고 있다―이후에, 아마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관점에 대해 간단히 몇 마디를 결론적으로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통념은 그의 철학적 기획 및, 담론으로서, 학문으로서 철학과 그가 맺고 있는 관계의 핵심 자체를 구성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라는 통념은 철학이 자신의 “자기의식”―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간에―을 통과해서, 그 자신을, 그 자신이 아닌 것, 즉 사회적 실천들의 장 안에, 자신의 물질적 가능성의 조건들과 관련하여 위치시킬 수 있게 해주기(또는 가설상으로는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한 그 자신을 제거해 버리거나 “반영물”로 환원시키지는 않고서. 바로 이 점에서 이 통념은 알튀세르의 이론을 그의 철학적 모델들, 즉 스피노자 및 어떤 프로이트와 결합시키는 능동적인 혈통 노선을 구성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철학 담론의 자율성과 자족성의 이론가가 아니라 타율성의 이론가들이다. “토픽”, 즉 사고가 분석하는 갈등의 장 안에서 사고의 위치에 관한, 따라서 사고의 현실적이지만 유한한 역량에 관한 이론가들인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후에도 이데올로기 일반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결코 변화하지 않았다. ... 이데올로기는 역사적 존재(Sein)에 대한 의식(Bewusstsein), “물질적인 실존 조건들”을 반영하고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얼마간 떨어져 있는”(즉 추상적, 관념적인) 담론들로 표현되는 “사회적인 의식의 형태”가 아니다. 이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실존 조건과 맺고 있는 관계를 상상적으로 영위하는 의식 및 무의식의(재/인지 및 몰인식의) 형태다. 바로 여기에 적어도 모든 이데올로기적 구축물의, 특히 계급 투쟁의 연속적인 형성체들 속에서 역사적 이데올로기들(“중세적”이고 “부르주아적”이며, 또한 “프롤레타리아적”인)이 담당하는 기능의 기본적인 수준, 근본 층위가 존재한다.

이로부터,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의 종언 역시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종언 또는 사회적 관계들의 투명성으로의 회귀의 다른 이름인 한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파괴적인 사실의 확인이 직접 따라나온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알튀세르는 단지 “자신의 진영에 맞서” 집요하게 작업(그는 이것이야말로 철학의 본질적 기능들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철학자는 진영을 가져야 한다)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명백한 형태상의 모순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그는 계속해서―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맑스를 위하여』는 오직 이를 주장하기 위해 쓰여졌다―이데올로기에 대한 이 정의는 유일하게 인식가능한 맑스주의적 정의, 어쨌든 “사회적 관계”에 대한 맑스의 이론화와 일관된 유일한 정의이며, 이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론을 보완할 수 있게 해준다. 분명 (다시 한번 내 주장에 대해 기꺼이 책임을 지겠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서 이러한 정의는 맑스 자신(엥겔스의 경우는 제쳐 두고)이 정식화할 수 있었던 정의들(특히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정반대일 뿐만 아니라, 알튀세르의 집요한 적용은 사실은 맑스주의 이론 및 그 공언된 완결성에 대한 “해체”로 인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알튀세르가 그러한 정의야말로 “유물론적”이라고 주장하면 할수록, 아무런 어긋남 없이 “유물론적”이면서 동시에 “맑스주의적”인 철학의 지평은 점점 더 그 앞에서 멀어져 갔다.

분명 이 지점에서 알튀세르의 자기비판들에 대해 한 마디 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간략하게, 그저 독자들이 가장 특징적인 텍스트들을 참조하게 하는 정도로 그치고 싶다.

이제 우리는, 이름 그대로 지칭되든 아니든 간에, 다수의 “자기 비판들”을 보게 된다. 이 자기 비판들은,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자신을 정당화하고, 자신을 정정하거나 와해시키고(심지어 자신을 파괴하고), 아마도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에게 복귀하려는 양가적인 성향을 표현하는데, 이는 전혀 알튀세르에게 (심지어 철학자들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의 경우에 자기 비판은 그의 실존 및 그가 이론과 맺고 있는 관계의 독특성을 비가역적으로 표시할 만큼 통상적인 비율을 넘어서는데, 이는 그의 사상의 내적인 성향 때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주위의 끔찍한 압력 때문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정정들이 반복되고, 또 이처럼 반복되면서 전환된다는 데 있다. 우리는 또한 알튀세르 자신이 제시한 몇 가지 “길 안내”를 갖고 있지만, 이는 같은 길을 지시해 주지 않고 있으며, 이는 심지어 『맑스를 위하여』를 독해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여기서 제안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주해들―이것들은 때로는 그 자체로 매우 흥미있으며, 또는 문제를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을 사상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이를 텍스트의 문자에 체계적으로 투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앞에서 우리는 『맑스를 위하여』를 그 시대와 그 환경 속에서 읽어야 하지만, 이를 기록 문서로 전환시키지는 말아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재발간에서 편집자는 매우 정당하면서 신중하게도,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의 외국어 번역본들을 위해 1967년에 작성한, 그리고 거기에서 제시된 해명들 및 평가들은 프랑스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가치를 지니는 [독자들에게]라는 서문을 [후기]라는 이름으로 포함시키고 싶어했다. 이 [서문]에 반영되어 있는 입장들(“이론주의”에 대한 자기 비판, “구조주의”에 대해 거리두기, 과학과 철학의 차이에 대한, 그리고 철학과 정치, 특히 혁명적 정치의 내적 연관성에 대한 강조)은 『레닌과 철학』(1968) 및 『자기 비판의 요소들』(1974)에서는 이론의 시각에서, 『입장들』(1976)이라는 논문 모음집 안의 몇몇 텍스트들(특히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 및 마르타 아르네케르의 저서에 대한 서문으로 쓴 [맑스주의와 계급투쟁])에서는 정치의 시각에서 다시 제시되고 가공된 자기 비판들과 같은 것들이다. 이 자기 비판들은 알튀세르 자신이 선택했던 투쟁 동지들이지만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던, 하지만 또한 이론의 고상한 시선을 위해 “계급 투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환기시키려고 했던 양쪽 편(프랑스 공산당(PCF)의 공산주의자들과 맑스-레닌주의 청년 동맹(UJCML)의 마오주의자들)에서 동시에 가해졌던 폭력적인 압박을 반영하고 있다. 좀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이 자기 비판들은 자신의 이론적 수단들을 통해 확장된 맑스주의 이론의 장―여기서는 착취 및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조건들이 “최종 심급에서 결정적이다”―안으로 당대의 68년 5월 및 다른 사건들을 끌고 들어가 해명하려고 했던 알튀세르의 시도를 반영한다.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자기 비판들은 하나의 “실천”으로서 이론을 끝까지 사고하는 데―이 시도가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해도―는 난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아무런 회고적인 진리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이 문제를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

상이한 시기에, 상이한 목적에 따라 생산되었고 상이한 측면들에 집중하고 있는 두 개의 또다른 “자기 비판”을 지적해 두고 싶다. 하나는 [아미엥에서의 주장](1975년에 쓰였고, 1976년 에디시옹 소시알에서 출간된 논문 모음집 『입장들』에 재수록)에서부터 1980년의 파국 이전이나 이후에 쓰인 매우 암시적인 또는 매우 밀도높은 몇 개의 텍스트들(1984년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대담』[『철학에 대하여』, 서관모,백승욱 옮김(동문선, 1995)]에서 나타나는, 근대의 변증론자들보다는 에피쿠로스에서 영감을 받은 “불확실성의 유물론”을 인식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암시 같은 것들)에까지 진행된다. 과소결정이라는 단어가 이전의 저작들에서 단 한 차례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알튀세르는 1975년 국가 박사학위 심사위원들에게 제출한 [아미엥에서의 주장]이라는 텍스트에서 모순과 그에 고유한 “불균등성”에 관해 수수께끼처럼, 과잉결정은, 이것 못지 않게 본질적인 과소결정이 없이는 결코 작용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양자가 교대로 작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과적 결정 자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동일한 구조에 양자 모두가 구성적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여기서 주석 및 보충이라는 은폐된 형태로 이루어진 자기 비판을 읽어내야 할까? 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 자기 비판은 다른 것들보다 더 구성적이라는 점에서 훨씬 흥미로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비판이 제공하는 암시―우연의 필연성을 “구조적으로” 해명한 이후,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는 이러한 우연의 우연성, 동일한 사건의 내부에서 공존하는 가능태들 내지는 경향들의 “과소결정된” 다양성을 표현하는 것이다―는 하나의 테제나 심지어 하나의 가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철학적 프로그램이라는 점 역시 확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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