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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에로이카 > [오마이뉴스] 8년 만에 재즈 앨범으로 돌아온 신해철을 만나다

아티스트이든, 정치인이든, 지식인이든, 대중과의 구별짓기를 통해 자신을 정립하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대중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신해철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내 귀가 고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신해철의 이번 판은 별로더라... 가수는 노래로 이야기해야 하겠지만, 신해철 같은 가수는 계속 이렇게 말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존경스럽다.

 

 

"뮤지션 구박하는데 음악이 먹히겠나
대중이 달라져야 아티스트 시대 온다"
[인터뷰①] 8년 만에 재즈 앨범으로 돌아온 신해철을 만나다
    김작가(zakka) 기자   
8년 만에 솔로 앨범을 낸 가수 신해철과 대중문화평론가 김작가의 만남. 3시간에 걸친 두 사람의 대화를 두 편으로 나눠 싣습니다. <편집자 주>
▲ 8년 만에 솔로 재즈 앨범을 낸 가수 신해철
ⓒ 싸이렌

한국의 뮤지션, 아니 문화계 종사자 중에서 신해철만큼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인물은 드물다. 그것은 그의 음악에 대한 논란이 아니라 알다시피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그의 화법에 기인하는 바가 더 크다.

사회 정치적 현안에 대해 언제나 말을 극도로 아끼는 우리 문화계의 풍토를 비춰본다면 그래서 더욱 이슈메이커로서 독보적인 자리에 있는 게 신해철이기도 하다.

그런 신해철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음악계의 도올 김용옥이라고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삼국지의 관우에 비교하기도 한다. 자신의 철학과 가치에 대한 끝없는 자신감, 혹은 거침없는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를 드러냄에 있어서 일말의 주저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신해철이 8년 만에 솔로 앨범 < The Songs For The One >을 냈다. 록과 일렉트로니카를 오가며 음악 활동을 해온 그로서는 이례적으로도 재즈를 표방하는 앨범이다. 듣는 이에 따라 새로운 도전으로, 혹은 안전한 선택으로 비칠 수도 있다.

서울 공덕동에 있는 사이렌 뮤직을 찾아 스물 다섯번째 앨범에서 새로운 영역에 도전장을 내민 속내를 들어봤다. 음악뿐 아닌, 다양한 현안에 대해서도 그는 말발굽소리가 날만큼 거침없이 생각을 내뱉었다.

"재즈란 장르보다 로맨스 먼저 생각해"

- 오랜만의 솔로 앨범이자 첫 재즈 앨범이다. 주변 반응은 어떤가.
"무조건 좋다는 팬들도 있고,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가며 괜찮다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냥 참고 넘어가는데 빨리 때려 부숴라, 나 기다린다 하는 사람들도 있다. 재즈라는 특정 장르보다는 로맨스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만든 앨범이다."

- 부인에게 바치는 앨범이라고 했다. 정작 부인의 반응은 어떤가.
"와이프한테 주는 앨범으로 되어있지만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 된다. 지극히 개인적인 '아버지와 나'가 일반적인 다른 사람들 얘기가 됐듯 이 앨범에서의 'One'도 나한테는 마누라지만 듣는 사람한테는 자신의 'One'이다. 내년에 듣는다 해서 촌스러워질 앨범도 아니고, 화이트데이나 밸런타인데이에 선물할 수 있는 음반이 되었으면 좋겠다."

- 오리지널 재즈 앨범이라기보다는 이지 리스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최근의 재즈라기보다는 재즈가 가장 대중에게 친근했던, 뉴올리언즈나 스윙 시절의 대중음악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분명히 이지 리스닝인데, 문제는 우리 대중들이 그리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일단 가요 팬들은 브라스 섹션이 튀어나오면 당황스러워 한다. 가요 팬들에게는 어렵고 재즈 팬들에게는 가벼운, 타깃 없는 앨범이라고 본다."

- 레퍼토리 선정은 어떻게 했나. 특히 최희준의 '하숙생'은 의외의 선곡이었다.
"여러 사람들과 회의를 거쳤다. 스탠다드 넘버와 리메이크 대상이 되는 우리 노래 수백 곡 중 세상 사람들이 다 알 만한 노래가 아니면 다 쳐냈다.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들 중 중학교 때도 부르는데 어려움 없었던 노래들로 갔다. '하숙생'의 경우 당시 노래들 중 트로트가 아닌 귀한 곡이어서 들어갔다. 만약 최희준씨가 노래할 때 우리나라 음악계에 재즈가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면 이렇게 가지 않았을까 한다."

"보컬 녹음하면서 이렇게 재미있었던 건 처음"

- 어느 앨범보다도 보컬리스트로서 역할에 충실한 작품이다. 프로듀서, 편곡, 연주를 다른 사람에게 전부 맡긴 첫 앨범 아닌가. 노래 부를 준비도 많이 했을 텐데.
"서양 사람들 앞에서 쪽 팔리기는 싫었으니 세 번 미리 불러보고 녹음했다. 생전 가장 노래 연습 많이 하고 녹음한 경우다. 원래 나는 레코딩 때 노래 연습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 습관적으로 녹음 들어가기 직전에 가사를 쓰기 때문이다. 녹음하기 전에 커피나 녹차 시켜놓고 식기 전에 다 불러버렸으니. 멜로디도 윤곽만 잡아놓고 녹음 직전까지 안 만들어 놓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넥스트 라이브 앨범 들어보면 오리지널 레코딩보다 좋다. 일단 연습이 되고 지방을 거친 후 서울 공연에서 녹음을 했기 때문에 원래 앨범보다 라이브 앨범에서 노래를 잘 불렀다. 기형적인 타입이지만 음악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그래서 어쩔 수 없다."

▲ 최초 미디 음반을 낸 신해철이지만 '조립식 음반'에 지쳐 '한방 레코딩'을 마음먹었다.
ⓒ 싸이렌
- 밴드의 전면에 서 있는 게 보컬리스트인데 그렇게 무책임해도 되나.(웃음)
"어릴 때부터 보컬은 악기의 하나라는 개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내가 보컬을 하게 된 계기가 가위바위보에서 졌기 때문이다. 우리 때는 기타가 최고고 음악은 하고 싶은데 할 줄 아는 악기가 없는 애가 하는 게 보컬이었다. 그래서 스쿨 밴드 처음 만들 때 보컬하라고 해서 분개했다. 애들 앞에서 기타를 막 치면서 이거 보라고, 우리가 기타가 두 명이지만 내가 리드 기탄데 왜 나보고 보컬하라고 하느냐 그러다가 가위바위보에서 졌다.(웃음)

심지어 '무한궤도' 이후 솔로 앨범 낼 때도 음악은 계속 해야지, 밴드는 계속 해야겠는데 상황은 안 좋지 그래서 전략적 방편으로 노래를 했다. 그러다 보니 보컬에 애정을 가질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프로듀서, 편곡 남한테 다 맡기고 노래만 불러보고 싶었다. 보컬 녹음하면서 재미있었던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 6일 만에 녹음을 끝냈다고 들었다.
"첫날은 파티였으니까 정확히 믹싱까지 포함해서 5일이었다. 한방에 갔다."

- 원 테이크 녹음은 사전 준비도 철저해야 하고 무엇보다 연주자들의 기량이 엄청나게 요구되지 않나.
"인프라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팝도 하고 클래식도 하고, 이런 사람들 끌어 모아서 하는 게 아니라 일년내내 빅밴드만 하는 사람들과 하니까 확실히 차이가 있더라. 노상 밴드를 하는 사람들이니까 리허설 과정에서 이미 밸런스를 맞춰버리고 레코딩에 들어간다. 녹음하다가 가수 컨디션 살펴보면서 '아, 그런 식으로 노래하려고? 야야 우리도 이렇게 가자' 이런 식으로 자기들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캐치해서 본 녹음에서 즉각즉각 맞췄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욕이 나올 정도였다. 선장이 지시를 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알아서 한다."

"조립식 음악에 지쳐 '한방 레코딩'으로"

- 원 테이크 녹음을 택한 가장 큰 이유는?
"이번 앨범이 어찌 보면 듣는 사람은 편한데 만드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녹음이야 5일 만에 끝났다고 하지만 사전 준비가 그만큼 길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다. 이 앨범이 어떤 면에서는 공격적이다. 첫째, 한방 레코딩으로 가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몽땅 미디로 찍어서 조립식으로 나오는 요즘 음악들에 나도 지쳤고, 듣는 이들도 지쳤다. 그리고 조립식으로 음악을 만드는 걸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이 나다.(신해철의 솔로 두 번째 앨범 < Myself >는 미디로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음반이다...필자주) 디지털 편집의 가능성이나 음악 수준을 상승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매력 때문이었다.

헌데 지금은 조립식이 아니면 나오는 앨범이 없으니까 짜증이 났다. 그리고 음반 시장이 축소되니까 투자, 제작비도 줄어든다. 따라서 미디의 위력 때문이 아니라, 싸게 가기 위해 미디를 사용한다. 그래서 일부러 28인조 밴드를 썼다. 인간이 연주하고,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는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

- 완전히 새로운 작업 방식을 통해서 앞으로의 음악에 있어서 자양분이 될만한 게 있었나.
"앞으로는 넥스트 앨범 녹음을 원 테이크로 한 방에 가려고 한다. 물론 넥스트의 경우는 오버더빙없이 한 번에 모든 걸 만들기는 힘들지만 원 테이크를 기본으로 삼아서 가려고 한다. 그리고 조립이나 편집, 기술을 많이 부리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그게 답이라는 건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러려면 연주도 잘해야 하고 곡이 좋아야 하는 거니까. 어쨌든 끝까지 가봐야 뭐든지 알겠더라."

- <모노크롬> <비트켄슈타인> 등의 앨범으로 디지털의 끝까지 가보니까 오히려 아날로그가 답이었다는 얘긴가.
"이제 아날로그, 디지털의 장점을 다 취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잃은 것도 많다. 그래서 공부는 적당히 하라고 후배들에게 그런다. 좋은 소설가가 되고 싶은지, 언어학자가 되고 싶은지 구별하라고 한다. 기타 치는 친구들에게도 말한다. 검객으로 달빛 자르기를 완성하면 검도 선생이 되는 거다. 만약 칼을 들고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싸움에 뛰어들어라. 즉, 곡을 써야 한다.

내가 그 반대로 갔으니까 나 자신은 할 말은 없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얻은 보람은 있다. 록 음악에서 프로듀서란 음악에서의 크리에이션뿐 아니라 사운드를 디자인하고 최종 단계에서 기계를 조작해서 믹싱까지 끝내주는 건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사람이 드물지 않나. 그런 단계까지는 간 것 같다. 스키조의 경우에도 사운드 디자인에서 믹싱까지 내 손으로 끝내줄 수 있었는데. 밴드들은 음악만 만들고 나머지는 다 나한테 맡겨, 그럴 수 있게 된 것 같아 그거 하나는 기쁘다."

- 앞으로 뮤지션이 아닌 프로듀서 신해철에 집중해야 하는 건가.
"어쩔 때는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최대의 프로듀서일 수 있다. 피터팬 콤플렉스의 경우 간섭하지 않는 게 최선의 프로듀싱이었다. 음악을 하면서 프로듀서도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고, 인디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 자본가들을 설득하고 끌어들이는 것도 내 할 일이다. 공연장 설립 사업도 계속 추진중이다."

▲ 신해철은 가수로서 뿐 아니라 가요계 이슈메이커로서 독보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 싸이렌
"앨범이 사라진다는 건 내겐 사형선고"

- 90년대 정상을 맛봤던 가수들이 더 이상 앨범을 내지 않거나, 앨범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비슷한 세월 활동해온 사람으로서 어떻게 보는지.
"나름대로 현명한 선택인 것 같기도 하다. CD가 사라진다는 걸 결정돼있는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 아닌가.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디지털 싱글이 아닌 디지털 앨범도 가능하다. 히트곡을 위한 목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게 아니라 앨범 위주의 작가주의적 생각으로 가려는 사람은 끝까지 싸워야지.

CD를 사는 마지막 한 사람이 날 때까지 CD를 내려고 한다. 나 같은 사람한테는 앨범이 사라진다는 건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패배할 게 뻔한 싸움이라도 마지막에 내 목에 칼이 들어와서 땅바닥에 꼬꾸라져야 끝나는 거지, 이미 끝났구나 싶어서 먼저 깃발 내려서는 안된다는 거다."

- 당신의 음악적 도박은 대체로 성공을 거둬왔다. 미디를 도입했고, 잘나가는 솔로 가수에서 밴드로 회귀했고, '도리도리'밖에 모르던 상황에서 테크노 앨범을 냈다. 시대 상황에 한걸음 앞서 왔던 셈이다. 음반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지금, 당신의 결의는 이제 대중들의 판정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 같다. 대중을 믿는 편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 대중을 가장 불신한다. 우리나라 대중은 음악계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에서 면책을 받고 있다. 매스미디어, 뮤지션, 시스템 여러 문제를 지적하면서 아무도 대중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다. 대중이야말로 모든 사태의 원인이자 책임자다. 아티스트가 반성할 게 없다는 뜻이 아니라 대중의 책임에 대해서는 아무도 다루지 않는다는 의미다. 뮤지션이 대중을 공격하면 싸가지없는 놈이 되거나 변명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20세기 이후의 대중이란 그 자체가 아티스트의 풀이다. 대중은 미래의 아티스트이기도 하고 최종 소비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대중이라고 하는 음악의 토양도 생각해 봐야 한다. MP3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다른 나라 음반 시장도 작살나긴 했지만 우리나라는 가장 먼저 가장 참혹하게 작살났다. 그게 오직 초고속 인터넷 때문일까. 과연 뮤지션의 역량이 떨어져서 음악을 조잡하게 만들기 때문 만일까.

아니다. 돌밭에 모내기했으면 쌀이 안 열리는 게 당연하다. 우리나라 대중은 20세가 넘어서면 급격히 주류에 편입하려 무릎을 꿇으면서 음악 듣는 걸 멸시하기 시작한다. 예전에 좋아했던 아티스트를 쳐다보면서 '한때는…' 이러면서 피식 웃는다. 문화비가 없다면서 울부짖으면서 술값은 항상 있다. 딱, 그 수준밖에 안된다.

그리고 어디서 많이 듣던 멜로디가 아니면 안 들으려고 한다. 집요할 정도다. 특이한 멜로디나 특이한 시도를 받아주지 않는다. 그러면 작곡가들은 어디서 듣던 멜로디를 죽어라 찾아내야 하는데 확률적으로 나올 수 있는 멜로디가 뻔하니까 표절을 하게 되는 거다. 표절에 도덕적 책임을 묻는 건 당연하다. 그러면 왜 대중들은 죽어라고 어디서 듣던 멜로디만 들으려고 할까.

일본 대중음악 차트를 보면 깜짝 놀란다. 톱10 안에 들어있는 노래들을 보면 요상망측한 노래들이 있다. 영국은 멜로디도 리듬도 없는 노래가 넘버 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그런가? 자기들이 뻔한 노래만 좋아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데 다 면책받고 있다."

"팝과 단절되면서 대중도 하향평준화"

- 하지만 예전의 대중은 안 그랬던 것 같다. 넥스트의 2집, 서태지와 아이들의 앨범 같은 새로운 음악이 우후죽순으로 나왔던 시대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대중은 언제나 준비되어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90년대 대중과 지금의 대중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처럼 평생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삶의 일정 시기에만 음악을 듣는 토양에서는 10년쯤 시간이 지나가면 대중을 이루는 세대 하나가 완전히 소멸하고 다른 대중층이 와있다고 봐야 한다. 지금의 20-30대도 음악을 듣겠지만 그들이 실제 필드에 미치는 영향은 극히 미미하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6.10항쟁 이후에 등장한 10대-20대 초반은 음악을 듣는 방식과 세계관이 다른 세대다. 결정적으로 라디오에서 팝의 공급을 끊어버리면서 팝에서 단절되어 귀가 하향평준화돼버린 게 지금의 대중이다. 우리나라 대중의 역사에서 가장 귀가 밑으로 떨어지는 게 지금이다. 이런 풍토에서 음악이 제대로 먹힐 리가 없다.

지금 라디오가 가장 뒤처져있는 매체라고들 한다. 하지만 옛날에는 음악 초보자는 2시의 데이트를 들으며 장르 구분과 명곡에 대한 기초를 배웠다. 해마다 초급반에 입학하는 애들은 다 김기덕으로 들어오고 중급반은 '황인용의 영팝스'로 가서 심장을 때리는 음악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후에 '전영혁의 음악세계'라는 마스터클래스로 넘어갔다. 이런 코스를 거치면서 팝과 가요를 동시에 듣는 세대가 90년대에 탄생한 거다. 팝을 듣던 그들이 왜 우리나라 음악은 그렇게 안되냐고 뮤지션들에게 압력을 가했던 거다.

넥스트가 앨범을 내고 성공할 수 있던 건 '우리나라에도 속주 기타를 칠 줄 아는 애가, 하이톤으로 빽빽 지르는 애가 있었으면 좋겠어'라는 심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2집을 낼 때는 '팝에 비해 사운드가 밀리는데 해결해'라는 압력이 있었던 거고. 그래서 미국에서 엔지니어를 불러 와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대중의 힘이다."

- 들을 음악이 없다는 불만도 대중들로부터 끊임없기 제기된다.
"들을 게 없어서 아예 음악을 듣지 않는다면 그런 말 해도 된다. 그건 자기의 선택이니까. 하지만 다운로드 계속 받으면서 그렇게 얘기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 일부 네티즌들의 행태는 그런 면에서 비겁하다. MP3와 함께 전멸한 건 아이돌 진영부터가 아니었다. 뮤지션 진영이 먼저 박살이 난 다음에 아이돌로 옮겨간 거다.

그나마 아이돌은 타격을 덜 받는다. 아이돌인 상대방과의 교감을 위해 직접 물건을 구매한다는 행위가 작용을 하니까. 하지만 아티스트 진영의 팬은 음악 내용만 있으면 되지 북클릿, 브로마이드 이런 건 필요 없거든. 소위 마니아들 포함해서 모두가 우리나라 음악에 칼을 꽂았다."

ⓒ 싸이렌

"음악하는 사람들을 구박하는 나라가 어딨나"

- 하지만 아직까지 뮤지션들의 앨범이 나오는 건 그걸 듣는 대중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앨범이 얼마나 팔릴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앨범 때도 난 그랬다. '아직도 니들이 내 앨범 제작비를 댄다고 생각하냐. 나는 다른 재주 부려서 돈 벌어서 내 돈 퍼부어서 앨범 만든다. 그럼 나한테 말할 자격이 없는 거지'라고 얘기하곤 한다. 나처럼 구르는 재주라도 있는 사람은 좀 다행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갑갑하다.

뮤지션들에게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야 한다. 90년대는 그런 예우가 가장 높았던 시기다. 그 음악을 듣는 팬들은 자기 맘에 드는 아티스트들은 팝 아티스트들과 동급으로 대우해줬다. 그렇지만 지금은 사람 취급을 안 하려고 한다. 말꼬리 잡고 늘어지거나 이상한 얘기 찍찍 해대고. 칭찬은 못 들어도 좋다. 그렇지만 왜 침 뱉고 돌 던지는 거냐는 거지.

그나마 나는 팬덤이 형성되어 있으니 보호막 역할을 해줘서 버티는데. 심지어는 음악한다고 자살까지 해야 하는 형편까지 갔으니까. 다들 죽으려고 한다. 실제 음악 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건 대중들이 그들을 대하는 악독한 태도다. 음악 하는 사람들을 구박하는 나라가 어딨나.

외국에 여행을 가면 놀란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할 때 뮤지션이라고 하면 일단 활짝 웃는다. 짐도 안 열어본다. 런던에서 택시를 탔는데 뮤지션이라고 하니까 뒤돌아보면서 '오, 모든 사람이 뮤지션이 되고 싶어하죠' 이러더라. 우리나라는? 엄마한테 따귀맞는 것부터 시작한다. 풍토가 너무 다른 거다."

- 뮤지션이 예우받았던 90년대는 자기 노래를 가지고 활동하는 이들이 중심이었다. 심지어 댄스 뮤직도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노이즈 같은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기획사 시대가 시작되면서 뮤지션의 자리가 위축됐다는 생각이다. 싱어송라이터를 필두로 한, 자신의 음악을 하는 이들이 산업의 변방에 있고 기획상품들이 미디어를 다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산업구조가 대중이 음악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단초가 아닐까.
"기획상품이 미디어랑 결합하고, 그게 블록화하면 아티스트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그게 순서대로 간다. 라디오가 그 순서를 그대로 보여줬다. 우리나라 라디오가 지위를 잃은 건 뉴미디어 탓도 있겠지만 자기 발을 자기가 찍은 게 더 크다. 라디오가 TV워너비가 되면서 아이돌을 끌어들여 DJ를 시키고 팝송을 끊었다. 그 결과 최약체 미디어로 전락했다. 하지만 외국은 여전히 라디오가 강력한 매체다.

TV 음악프로그램은 오로지 풍선 든 10대들만 대상으로 생각하고 아이돌만 데리고 놀았다. 요즘 어떤가. 음악 프로그램 시청률 안 나오고 망해간다. 하지만 EBS의 스페이스 공감 같은 경우는 어떤가. 그런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갔는데 성과가 나오고 있다. 매스미디어가 장기전략이나 고민없이 유행만 따라 왔다갔다하니까 순서대로 작살이 나고 있다. 아티스트들을 중심축에 뒀을 때 보다 못한 결과가 나오고 있다."

- 다시 아티스트들이 음악산업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시기가 올까.
"매스미디어가 다시 열리는 시기가 되면 창구가 올 수 있다. 다만, 그저 싱어송라이터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뭔가가 있어야지. 심지어 서태지도 아이돌 댄스팀이란 형태를 취함으로써 대중을 공략할 수 있는 길을 뚫었고, 듀스도 본인들이 댄서 아닌가. 넥스트의 경우는 무대에서 벌이는 퍼포먼스의 정도가 백댄서 데리고 나오는 아이돌 댄스팀에 비해 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넥스트가 1집 내고 TV에 한번도 안 나가다가 몇 년 만에 나가게 되니까 PD가 백 댄서를 세우려고 했다. 그룹사운드는 연주 말고는 보여줄 게 없다고 생각한 거다. 그래서 백댄서 세웠다가는 우리 기타에 맞고 코피 터지니까 치우라고 그랬다. 기타를 돌리고 이빨로 물어뜯고 하는 김세황 앞에서 무슨 백댄서가 필요하겠나. 쇼적인 측면과 아티스트는 반비례라 생각하는 인식은 치명적인 문제가 된다.

인디 밴드들과 얘기할 때 가끔 그런다. 홍대에서 클럽에 모여있는 관객 300명을 질질 싸게 못 만들면서 TV 앞에 있는 400만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라디오헤드처럼 가만히 있어도 시선을 끌 수 있는 포스가 있던가, 아니면 머틀리 크루처럼 '생쑈'를 하던가. 뭐든지 해야 한다.

차력을 하던 뭘 하던 관객의 눈을 끌어야 하는 거 아닌가. 넥스트는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차력단이었다. 음악만 열심히 하는 걸로 된 게 아니었다. 우리 슬로건이 '연주에 실패한 뮤지션은 용서받아도 액션에 실패한 뮤지션은 용서못한다'였다.(웃음)"

- 솔로시절부터 넥스트, 모노크롬 등 당신의 음악적 여정을 돌이켜보면 초기에는 상업적, 비평적 찬사와 함께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부터 평단의 지지를 그리 못 받았다. 그리고 시장에서도 팬의 외연을 넓히기보다는 기존의 팬층에 머물러있는 느낌이다. 그러다 보니 음악보다는 발언이 더 화제가 되는 상황이다. 뮤지션으로서 답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랫동안 하다 보니 어떻게 해야 평론가들이 좋아할지는 예측이 된다. 하지만 97년부터 더 이상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넥스트를 해산할 때 더 올라갈 곳이 없어서 해산한다 말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 이상의 평가와 판매를 원한 적이 없다. 그 이후부터는 철저히 내가 하고 싶은 걸 했다. 97년까지의 내가 인기있는 소설가였다면 그 이후부터는 논문을 썼던 셈이다.

모노크롬은 레코딩 테크놀로지 실험이었고 비트켄슈타인은 미디가 어쿠스틱의 영역을 어디까지 잠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험이었다. 음반 자체의 구조와 예술성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거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누굴 위해, 뭣 때문에 그걸 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든거지. 그런 음악을 원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된다고. 90년대에 조성되어 있던 분위기 정도는 되어야 거기에 따라갈 텐데 그렇지 않으니 나 좋은 거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특별한 스타가 등장했을 때 팬덤이 형성된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거꾸로다. 팬덤이 형성된 후 그들이 요구하는 스타가 나온다. 그것도 비슷한 수천의 후보에서 한명이 간택되어 탄생한다. 간발의 차이로 너바나의 업적이 펄잼에 의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시작한 건 너바나였듯 말이다. 디스코가 난리 치고 다른 음악이 전멸할 때가 됐을 때 록이 파티 음악화되면서 LA메탈이 출연했다. 그 임무가 다하자 그 뒤를 이어 너바나가 등장했다. 그렇게 보면 미디를 무기로 등장했던 우리 세대의 등장이나, 서태지의 등장도 대중들의 요구가 상승하기 시작했을 때 튀어나온 거다."

"돈을 아끼려는 순간 뮤지션은 죽는다"

- 시대가 뮤지션을 낳는다는 얘기다. 그렇게 보면 지금은 더 비관적인 상황 아닌가. 음악은 감상의 대상이 아닌 BGM(배경음악)이 됐다. 음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 비관론은 음악이 세상에 존재한 이래 늘 있어왔다. 언제 뒤집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음악은 비주얼 없이 오디오만 존재하는 매체기 때문에 다른 예술과 결합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매체다. 그런 면에서 종합 엔터테인먼트화될 가능성이 남아있다. 자꾸 일회적이고 상업적인 매체와 결합해서 그렇지. 깊이 있는 다른 예술과 결합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간단히 말해서 핑크 플로이드가 영화 <더 월>이나 콘서트에서 보여준 종합예술과의 결합이 아니었으면 단순한 변칙 블루스 밴드로 끝날 수도 있었을 거다. 단지, 지금 방법을 못 찾고 있을 뿐 결합할 수 있는 매체가 존재하지않는 건 아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여러 토양이 필요하다.

우선 아이돌에 대항하는 아티스트의 축을 이루기 위해서는 콘서트 인프라가 있어야 한다. 콘서트에서 아이돌은 라이브를 중심으로 하는 아티스트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인프라가 없는 거다. 미국에서 스톤 템플 파일럿츠 공연을 2만원이면 봤다. 국내 가수를 보려면 8만원을 내야한다. 당연히 공연 사업이 안되는 거지.

여기서 화살은 정부에게 돌아간다. 콘서트는 최약체 산업이다. 여기서 무슨 세금을 뜯어간단 말인가. 면세 정책도 될까 말까 한데. 아티스트에게 돌아가는 돈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건 싸움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총탄이다. 그러나 돈을 벌면 몽땅 음악에 투자할 각오가 돼있는 뮤지션한테조차도 대중들은 돈을 주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거리의 악사가 없는 이유는 단속도 구속도 아니다. 거리에서 공연해도 사람들이 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뮤지션에게 나가는 돈은 아낄 수 있는 한 아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뮤지션은 죽는다. 이런 상황에서 뮤지션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음악을 하는 것밖에 없다. 시대가 어떻게 바뀌는지 관찰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영악해 봐야 소용없다. 제작자들이 영악해져야지. 너무 영악하면 음악 못한다. 그렇다고 너무 띨띨하면 음악할 수 있는 환경을 손에 넣지 못하고. 적당히 띨띨해야 한다.

내 경우를 돌이켜봐도 그렇다. 내가 솔로앨범 두 장을 내고 밴드로 전환했을 때 그렇게 안 했으면 오래 못 갔을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결과론적인 얘기다. 솔로 두 장이 대박이 터지니까 '이제 회사에서 뭐라고 못하겠지. 자, 하자' 이렇게 된 거다. 사전에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니다. 그리고 모노크롬을 내고 다시 풀 밴드로 돌아간 것도 '아, 막 두드려야지 이게 뭐냐!'는 욕구 때문이었다. 기본적인 자기 욕구에 충실하고 자기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결론적으로는 가장 영악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확신을 잃지 말아야지. 좋은 음악을 만들고 그걸 대중에게 보여주면 반응할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 것. 그게 내가 사이렌뮤직을 설립한 이유다. 싱어송라이터이고 사람들이 들을만한 음악을 만들지만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빠져있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메이저로 흡수시키는 게 목적이다. 그러다 보면 뭔가 바뀌겠지."

"인디는 수권능력 없는 약체 야당의 난립"

- 사이렌뮤직에도 스키조, 피터팬 콤플렉스 같은 팀들이 있지만 고스트 스테이션을 통해서도 인디 음악을 많이 소개하고 있다. 최근 인디 뮤지션들의 흐름이 어떻다고 느껴지는지.
"굳이 인디라 할 것 없는 사람들도 인디로 몰린다. 댄서블하고 상업적 음악을 만들지만 얼굴이 상업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댄서블한 음악을 들고 인디 신으로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보사노바 뮤지션도 인디다. 디스코 뮤지션도 있다. 외국 같으면 메인스트림에서 놀아야 할 뮤지션들이 다 인디에 머물러 있다. 매스미디어가 철저하게 폐쇄적이기 때문에 여기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인디가 된다. 인디의 풀이 대단히 다양해진 건 이런 상황에 대한 역설적 결과다.

R&B 아이돌 진영이 더 이상 히트를 내지 못하는 무능한 집권 여당이라면 인디펜던트는 수권 능력이 없는 약체 야당의 난립이라 볼 수 있다.(웃음) 정권교체를 하려면 인디 뮤지션들을 묶어 세력화하고, 콘서트 인프라가 부족한 상황에서 매스미디어로 뚫고 들어가야지. 제일 문제는 자신감의 결여다.

인디 뮤지션들이 자기 노래를 안 틀어줄 거라 생각해서 방송사에서 음반 심의를 안 받는 경우가 많다. 어떤 노래 괜찮아서 틀어보려 하면 심의가 안 돼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내가 직접 심의실로 가지고 가서 심의받아서 튼다. 만약 언젠가는 록 스타가 될 거라는 자신감이 있으면 그런 일은 안 생기겠지.

고스트 네이션에 게스트 출연하면 웬만하면 검색어 1위는 한다. 일반 음악 듣던 사람에게는 인디가 너무나 신비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진 않겠지만, 지금이라도 라디오 3사에서 아이돌 틀어봐야 아무 메리트 없다는 거 깨닫고 몽땅 인디 음악만 틀면 인디는 순식간에 세력화될 수 있다."

"인디 세력화 필요... 매스미디어도 거부 못해"

- 음악계에 대해 너무 비관적인 얘기만 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거라는 가능성, 혹은 징후는 느끼지 않나.
"최소한 음악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다는 거다. 20세기 후반 들어 홈스튜딩 테크놀로지가 보급되면서 대중에게 음악을 생산할 수 있는 수단이 넘어왔다. 컴퓨터가 한편으로는 뮤지션을 잡아먹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뮤지션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고, 쌓이는 메탄에너지가 결국 지금의 메이저를 밀어낼 거라고 본다.

방송사 PD들도 변했다. 옛날처럼 기세등등한 상황이었다면 스키조나 피터팬 콤플렉스 같은 팀들 TV에서 안 받아 줬을 거다. 우리 회사에서 프로모션할 때도 인디 밴드가 나와서 반응 있었던 적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녹화 현장에서 반응이 나온다. 윤도현 러브레터에 피터팬 콤플렉스 나왔을 때 검색어 1위하고 홈페이지는 방문자 폭주로 다운됐다.

그 사람들도 생각을 바꿀 기회가 있어야 한다. 당장 한 주 한 주 시청률이 나와야 프로그램을 계속 할 수 있는 입장이니 모험은 할 수 없어도, 만일 매스미디어에 진출한 인디 뮤지션이 대중의 관심을 끈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지."

- 하지만 방송국의 턱이 높다. 당신이 갖고 있는 루트와 여타 인디 레이블들이 가진 루트는 차원이 다르다. 인디 레이블 제작자들은 PD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든 게 엄연한 현실이다.
"사이렌에 소속된 팀들이 방송 출연하는 것만으로는 답이 안 나오니 사업 방향이 여러 가지다. 우선 여러 곳에서 인디를 세력화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거리와 클럽에서 시작해서 끝까지 올라갈 수 있는, 각 단계의 길을 건설하려고 한다. 긍극적으로는 그 길이 건설돼도 뮤지션이 자신의 신념에 맞지 않는다며 거부하는 일이 벌어져야 하지 않겠나."

- 뮤지션이 방송에서 활동할 때 가장 문제되는 게 립싱크다. 밴드 사운드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열악한 방송환경에서 립싱크는 필요악이라는 얘기도 있다.
"립싱크에 대한 편향적 시각도 바뀌어야 한다. 외국은 우리랑 다르다. 분명히 돈을 내고 보는 공연에서 립싱크를 하면 문제가 된다. 콘서트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라이브라는 게 누구나의 상식이니까. 그러니까 법적으로 콘서트에서 립싱크를 할 경우 별도 표시를 하라는 거지 TV에서의 립싱크는 논란이 되지 않는다. 비틀즈, 딥 퍼플, 레드 제플린, 도어스, 너바나. 다 TV에서는 립싱크했다. 그게 이슈가 되지도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립싱크란 프로덕션 기획 상품에 대한 불만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연예인을 구박하기 위한 용도에 불과하다. 진짜 음악을 사랑해서 라이브를 보려면 돈을 내야하는 거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이렇게 기브 앤 테이크 교육이 안 돼 있는지 모르겠다."

- 음반을 사는 것은 물론이고 MP3를 유료로 다운받아도 바보 취급을 받는 분위기다. 음악은 공짜라는 인식이 팽배해있다.
"우리나라는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문제 아닌가. 나는 우리 민족이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보는데, 그들 말을 받아들이자면 똑똑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얘긴데 그래서 피곤하다. 이 나라에 필요한 건 바보다. 우리나라 인구 중 천만명만 바보면 행복해진다. '우리 애들 영어과외 안 보내고 조기 교육 안시킬 거다. 때 되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딱 천만명만 되면 우리나라 행복지수 올라간다."

ⓒ 싸이렌
"다시 정치할 생각 없다"

-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잡기 위해서는 결국 정치의 문제가 된다. 올해가 대선의 해다. 지난 대선 때처럼, 이번에도 특정 후보를 공개 지지할 생각인가.
"생각 없다. 그때도 생각 없다가 갑자기 한 거고 이번에는 갑자기 할 것 같지도 않다. 정치할 거라는 의심을 많이 받고 있어서 이번에 한 번 더 얽힐 생각하면 끔찍해진다. 벌써 다음 대통령를 뽑는 해가 됐는데 지난번에 노무현 진영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현기증 날 정도로 증오를 표출하는 사람들이 꽤 되니까."

- 얼마 전에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기사를 봤는데 악플이 엄청 나더라.
"조선일보니까. 조선일보 독자들은 신해철을 철천지원수로 알고 있는데 그 신문에 내 기사가 나오니까 밉겠지. 음악 얘기만 했는데 거기서 노빠, 이런 얘기는 대체 왜 나오는거야.(웃음)"

- 얼마 전 한 포털 사이트에서 명사들을 대상으로 네티즌에게 궁금한 걸 묻는 이벤트를 벌였다. 하고 많은 질문 중 당신은 악플에 대한 질문을 던졌더라. 악플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지만 그 중에서는 악플이 하나의 비판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보나.
"단어 자체의 사전적인 의미를 좀 알고 얘기했으면 좋겠다. 적절한 수위 이상을 훨씬 벗어난, 이미 비판의 의미를 상실한 걸 악플이라고 부르지 않나. 단지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얘기를 했다고 악플이라 부르지는 않는단 말이다. 인권을 침해하고 악성루머를 퍼트리는 수준 의 악플을 왜 비판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 악플러가 판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그 질문에서도 악플이 근본적인 민족성인 발로냐고 했다. 최근 10년 동안 대중이 처음으로 스스로 쪽 팔리다는 걸 깨달은 건 이번 악플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현재 인터넷 문화에 문제가 있다는 여론이 조성된 게 이번이 처음 아닌가. 지금 같은 경우는 인터넷 실명제에 찬성하는 여론이 대세화되는 조짐이 보인다. 하지만 전에는 부정적이었다. 이것만 해도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로 봐야지. 사실 그 자체가 부끄러운 거다. 스스로 통제하지 못해서 실명제라는 제도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니 말이다.

우리 국민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고, 우수한 것도 아닌데 자꾸 우수하다고 선전하고 가르치는 게 문제다. 계속 허풍을 떤다. 지금 우리 국민성이 좋을 수가 없다. 생각해봐라.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가 몇 년 됐나. 동족상잔전쟁이 일어난 게 이제 반세기. 찌들대로 찌들고 고생할 대로 고생하고, 사회 이념이라고는 좌익이니 우익이니 얘기하지만 사실 우리나라에 이념은 잘 먹고 잘 살자, 하나밖에 없다.

경제 얘기를 왜 그렇게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 정권이나 정부의 치적의 포커스가 경제로만 몰리는 것도 이해가 안 간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들이 우리처럼 불행하게 사나. 그렇지 않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해리슨 포드가 수명이 정해져 있는 사이보그에게 얘기한다.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기분이 어떠냐.' 우리는 그런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 낙오와 도태, 끊임없는 경쟁에 대한 공포. 원론적인 얘기지만 인간은 그렇게 해서 행복할 수 없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경제지수에서 결정난다는 것 자체가 무지막지한 착각이다. 선진국 다니면서 느끼는 게 당황스러운 친절을 길거리에서 받았을 때, 우호적인 사람들로 가득찬 거리를 봤을 때다. 우리의 거리는 적대적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다. 이 속에서 어떻게 행복하겠나.

도로교통에서 선진국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난다. 차선 변경할 때 보자. 앞차가 아무 이유없이 막는다. 내 차선 막는다고 빨리 가는 게 아닌데도.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행복해질 수가 있나. 무의식적으로 딴 놈이 내 앞으로 오는 게 싫다, 양보하는 게 싫다, 그런 심리가 깔려있는 거다. 런던에 있을 때 운전하고 다녔다. 유럽은 우리와 차선도 반대고 핸들도 반대다. 얼마나 힘들겠나. 그런데 한국보다 편했다. 내가 깜빡이 켜주면 뒤차는 무조건 서주니까."

"한민족 우수성 교육이 배타적 문화 만들어"

- 왜 그런 분위기가 형성됐을까. 개발독재, 군사독재 시절을 거치면서였을까.
"박정희, 전두환보다 뿌리가 깊다.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도 무지막지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토양이 잡혀 있으니까 그 분위기에 올라탈 수 있었던 거지. 이승만이 국부 운운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럴 토양이 있었던 것이니 굉장히 오래된 얘기다. 지금만 해도 끊임없이 경쟁심을 부추기지 않나. 아마 내 속에 있는 얘기 다하면 아마 길거리에서 맞아 죽을 것이다.(웃음)"

- 우리가 배타적이라는 건 사실인 것 같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적 시각만 봐도 그렇고.
"근본적으로 한민족이 인종차별주의자인 게 한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데서 교육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다른 민족에 대한 존중도 가르쳐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런 인식은 음악에도 영향을 미친다. 허구한 날 국악의 우수성 운운하는데 미치겠다. 물론 국악 우수하다. 하지만 태국음악, 인도음악, 일본음악 다 우수하긴 마찬가지다.

서양사람들이 국악 공연 보고 기립박수 치고 립서비스 차원에서 '원더풀!' 그러는 건데 생각해보면 그들은 세련된 거지. 듣도 보도 못한 음악에 기립박수 치는 건데. 그걸 보고 국악이 전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음악이라고 하면 미쳐버리지. 지독한 콤플렉스가 지독한 오만으로 표출되는 거다. 꼭 우리 조상이 우수해야 2007년 지금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건가. 하여간 초중고 12년간 선생들한테 남대문의 선이 어쩌고저쩌고, 그런 내용을 듣느라 죽는 줄 알았으니까."

- 그런 내용을 제도권 교육에서 군대까지 거치면서 받다 보니 생기는 문제일 수도 있다. 당신의 아이가 크면 제도 교육을 받게 할 건가.
"그건 내가 결정할 게 없다. 아이가 즐거워한다면 시킬 수 있다. 자기 오류를 수정할 기회는 나중에 스스로 찾는 거니까. 나만 해도 남존여비 집안에서 마초, 극우적인 사고방식을 주입받으면서 자랐다. 하지만 스무살 때 내가 택한 길은 다른 거였다. 지금도 인터뷰 기사 뜨면 '신해철, 이 노빠! 전라디안!'하면서 난리 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난 오리지널 경상도거든. (웃음) 나 대구 못 간다. 온 집안 친척들이 다 죽이려고 해서."

- 다시 한번 묻자면, 정말 정치할 생각은 없는 건가? (웃음)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정치 안 한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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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두 개의 전체주의

생각난 김에 작년봄 '런던북리뷰'(LRB)에 게재됐던 지젝의 기고문 '두 개의 전체주의'를 옮겨온다. 우리말 번역은 '프로메테우스'(05. 03. 12)에 '지젝, 두 개의 전체주의'란 제목으로 게재된 김택님의 것이며, 그 아래에 원문을 이어붙였다. '전체주의'에 대해 사고하고자 할 때 유익한 참조가 되어주는 글이다.  

-(2005년) 2월 3일자 신문에 작은 기사 - 물론 헤드라인 기사는 아니었다 - 하나가 실렸다. 갈고리 십자를 비롯한 여타의 나치 상징물을 공공장소에 전시하는 것을 금지하는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그 대부분이 구사회주의 국가 출신인 일단의 보수적인 유럽의회 의원들은 공산주의적 상징물 역시 동일하게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낫과 망치는 물론 붉은 별도 금지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쉽게 기각되지 못했다. 이것은 유럽의 이데올로기적 정체성에 생겨난 깊은 변화를 말해준다.

 

 

 


 
<%IMG2%>-지금까지도 스탈린주의는 나치즘이 배격당하듯이 간단히 거부되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는 스탈린주의의 끔찍한 면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대한 향수(Ostalgie)는 아직도 허용되고 있다. ‘굿바이 레닌!’이라는 영화는 만들 수 있지만 ‘굿바이 히틀러!’라는 영화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왜일까? 다른 예를 들어보자. 독일에서는 구동독의 혁명가와 당가를 담은 많은 CD가 팔린다. ‘친구이자 동지인 스탈린’이나 ‘당은 항상 옳다’같은 노래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치 노래 모음집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이런 우화적 수준에서도 나치와 스탈린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다.

-스탈린주의적 인민재판에서 고발당한 사람이 공개적으로 그의 죄를 고백하고 죄를 저지르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나치는 유태인에게 독일 민족을 향한 유태인의 음모에 어떻게 연루되었는가를 고백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스탈린주의는 스스로를 계몽주의의 전통에 놓인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전통에 따르면 진리는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타락했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나치에게 있어 유태인의 죄악은 유태인의 생물학적 구성의 한 요소였다. 따라서 그들의 죄를 증명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죄를 진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허상을 살펴보면 보편적 이성은 역사적 진보라는 무정한 법칙의 외양을 통해 객관화된다. 지도자를 포함한 모두는 그러한 법칙의 노예이다. 나치의 지도자는 연설을 한 후에는 꼿꼿이 서서 조용히 박수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의 경우 의무적으로 치는 박수는 지도자의 연설의 맨 마지막에 터져나온다. 그리고 지도자는 일어서서 같이 박수를 친다. 에른스트 루비치(Ernst Lubitsch)의 <사느냐 죽느냐(Be or Not to Be)>를 보면 히틀러는 나치식 경례에 대해 그의 손을 들고는 ‘나 자신 만세(Heil myself!)!’라고 외친다. 이것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순수한 유머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실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박수를 치며 ‘스스로에게 만세를! (Heil himself)’이라고 외쳤다.

-스탈린의 생일날 죄수들은 어두침침한 굴락에서 스탈린에게 축하전보를 전송했다. 하지만 유태인이 아우슈비츠에서 히틀러에게 그러한 전보를 보내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 밋밋한 차이는, 그러나 스탈린 치하에서는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인민이 역사적 이성에 종속된 자들로서 함께 만나는 공간을 지배이데올로기가 상정했음을 입증해준다. 스탈린 치하에서 모든 인민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평등했던 것이다.
 
-의견을 달리하는 공산주의자들이 목숨을 걸고 소련 사회주의의 ‘관료주의적인 변형’과 투쟁을 벌인 것과 같은 것을 나치즘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나치 독일에서 ‘인간의 얼굴을 한 나치즘’같은 것을 주장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보수적인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Ernst Nolte) 같은 사람들이 중립적인 위치를 취하며 공산주의에 적용된 동일한 기준을 왜 나치에게 적용해서는 안 되느냐고 질문하는 온갖 시도의 결점과 편향이 놓여있다. 그는  “만약 하이데거가 나치와 밀회한 것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면 루카치와 브레히트 같은 자들은 그보다 훨씬 오랫동안 스탈린주의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용서를 받는가?”라고 묻는다. 이러한 입장은 나치즘을 볼셰비즘이 먼저 저지른 실천에 대한 반응이자 반복으로 보는 것이다. ‘원초적 죄악’은 공산주의가 먼저 저질렀다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놀테는 소위 수정주의논쟁에서 하버마스의 주요한 논적이었다. 그는 나치즘을 20세기의 전무후무한 죄악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곧 나치즘만이 비난받을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나치즘은 공산주의 이후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나치즘은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과도한 반응이다. 또한 나치즘의 공포는 소비에트 공산주의에서 이미 자행된 것을 단순히 복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주장했다. 놀테의 생각은 공산주의와 나치즘이 ‘동일한 전체주의적 형식’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양자 간의 차이는 다만 구조의 역할 하나하나를 채우고 있는 구체적 행위자들이 다르다(‘계급의 적’ 대신 ‘유태인’)는 데에 있다.

-보통 자유주의자들은 놀테가 나치즘을 상대화하여 공산주의라는 악의 이차적인 메아리로 축소시켰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공산주의와 나치즘의 극단적인 사악함 사이의 별반 도움이 안 되는 이러한 비교를 집어치운다고 해도 놀테가 말한 요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즉 나치즘은 실제로 공산주의적 위협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다시 말해 나치즘은 실제로 계급투쟁을 아리안 종족과 유태인 간의 투쟁으로 대체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프로이트적 의미로 페어시붕(Verschiebung, 보통 정신분석학에서 ‘전치’로 번역됨)을 뜻하는 ‘대체’라는 말이다. 나치즘은 계급투쟁을 인종적 투쟁으로 대체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진정한 성격을 흐리게 만들었다. 공산주의가 나치즘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무엇이 변화했는가를 보는 것은 형식을 통해 문제를 파악하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나치의 이데올로기가 신비화된다. 즉 정치적 투쟁이 인종적 충돌로 화하며, 사회구조에 내재적인 계급적대는 아리안 공동체의 조화를 교란하는 이질적인 (유태인의) 육체들의 침입으로 환원된다. 놀테의 주장처럼 각각의 경우에 형식적으로 동일한 적대의 구조가 자리 잡는 것이 아니다. 대신 적의 장소가 상이한 요소(즉 계급이 인종으로)로 채워진다. 인종 간의 차이나 충돌과 달리 계급 적대는 완벽하게 사회적 영역에 귀속되어 버리며 그 구성부분이 되고 만다. 결국 파시즘은 계급간의 본질적 적대를 제거한다.

-그렇게 되면 10월 혁명이 어떤 비극을 낳았는가가 분명하게 부각된다. 그 고유한 해방적 잠재력의 측면은 물론 그것이 스탈린주의라는 결과를 산출한 역사적 필연성의 측면 모두에서 말이다. 우리는 스탈린주의적 숙청이 어떤 의미에서 파시스트의 폭력보다 더 ‘비합리적’이었다고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 숙청의 과도함은 스탈린주의가 파시즘과 달리 인증된 도착적 혁명의 예라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흔적이다. 파시즘 치하에서는 - 나치 독일에서조차 - 정치적 반대파로 활동하지만 않는다면 ‘평범한’ 일상의 삶의 외관을 유지하며 생존하는 것이 가능했다(물론 그가 유태인이 아닐 경우에).

-1930년대 후반의 스탈린 치하에서는 반대로 아무도 안전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돌연 고발당하고 체포되어 반역자로 총살당할 수 있었다. 나치즘의 비합리성은 반유태주의, 즉 유태인의 음모에 대한 믿음에 ‘농축’되어 있었다. 반면 스탈린주의의 비합리성은 사회전체에 퍼져있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나치 경찰 조사관은 반국가 행위의 증거와 흔적을 밝히려 한 반면, 스탈린의 조사관은 기쁜 마음으로 증거를 조작하고 음모를 발명해 내었다.
    
-하지만 우리가 인정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아직도 우리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만족할만한 이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스탈린주의라는 현상에 대한 체계적이고 완벽한 분석을 생산하지 못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물론 몇몇 예외가 있긴 하다. 프란츠 노이만 Franz Neumann의 <베헤모쓰 Behemoth>(1942)는 3개의 거대한 세계체계- 뉴딜 자본주의, 파시즘, 스탈린주의-가 관료주의적이고 범지구적으로 조직된 동일한 ‘관리’사회를 향해 치닫고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책 중 가장 열정이 식어 있는 <소비에트 맑시즘(Soviet Marxism)>(1958)은 이상하게도 헌신을 분명하게 보여주지 못한 채 소비에트의 이데올로기를 중립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980년대에 몇몇 하버마스주의자들이 의견을 달리하는 현상들의 출현을 반영하여 시민사회 개념을 공산주의 레짐에 대한 저항의 장소로 가공하려 시도했다. 흥미는 있지만 스탈린적 전체주의의 특수성에 대한 총체적인 이론은 아니었다. ‘현존사회주의’라는 악몽을 분석하는 것은 삼가면서 해방의 기획이 실패한 조건에 초점을 맞출 것을 요구하는 맑스주의적 사유의 학파들이 어떻게 가능해진 것일까? 그들이 파시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진짜 외상(trauma)과 감히 대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침묵의 자백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좌파 ‘전체주의’와 우파 ‘전체주의’ 모두가 정치를 비롯한 여러 가지 차이에 대한 불관용에 기초하고 있으며 민주주의와 인간적인 가치를 거부하는 나쁜 것이라는 ‘순수’ 자유주의적 태도는 선험적으로 오류이다. 한쪽 편을 들어 파시즘이 근본적으로 공산주의보다 ‘나쁘다’는 주장을 해야 한다. 합리적으로 두 개의 전체주의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함축적이든 명시적이든 파시즘이 덜 사악한 것이었으며 공산주의적 위협에 대한 이해할만한 반응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2003년 9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무솔리니는 히틀러나 스탈린 혹은 사담 후세인과 달리 누구도 죽이지 않았노라고 격렬히 외쳤다. 진정한 추문은 베를루스코니의 연설이 그의 특이한 성격에서 나온 표현이기는커녕 반파시스트 공동체에 기반하는 전후 유럽의 정체성에 대한 약정을 바꾸려는 진행형의 기획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유럽의 보수주의자들이 제기하는 공산주의의 상징물에 대한 금지 요청이 이해될 수 있는 정확한 맥락이다.

The Two Totalitarianisms

Slavoj Zizek

A small note – not the stuff of headlines, obviously – appeared in the newspapers on 3 February. In response to a call for the prohibition of the public display of the swastika and other Nazi symbols, a group of conservative members of the European Parliament, mostly from ex-Communist countries, demanded that the same apply to Communist symbols: not only the hammer and sickle, but even the red star. This proposal should not be dismissed lightly: it suggests a deep change in Europe’s ideological identity.

Till now, to put it straightforwardly, Stalinism hasn’t been rejected in the same way as Nazism. We are fully aware of its monstrous aspects, but still find Ostalgie acceptable: you can make Goodbye Lenin!, but Goodbye Hitler! is unthinkable. Why? To take another example: in Germany, many CDs featuring old East German Revolutionary and Party songs, from ‘Stalin, Freund, Genosse’ to ‘Die Partei hat immer Recht’, are easy to find. You would have to look rather harder for a collection of Nazi songs. Even at this anecdotal level, the difference between the Nazi and Stalinist universes is clear, just as it is when we recall that in the Stalinist show trials, the accused had publicly to confess his crimes and give an account of how he came to commit them, whereas the Nazis would never have required a Jew to confess that he was involved in a Jewish plot against the German nation. The reason is clear. Stalinism conceived itself as part of the Enlightenment tradition, according to which, truth being accessible to any rational man, no matter how depraved, everyone must be regarded as responsible for his crimes. But for the Nazis the guilt of the Jews was a fact of their biological constitution: there was no need to prove they were guilty, since they were guilty by virtue of being Jews.

In the Stalinist ideological imaginary, universal reason is objectivised in the guise of the inexorable laws of historical progress, and we are all its servants, the leader included. A Nazi leader, having delivered a speech, stood and silently accepted the applause, but under Stalinism, when the obligatory applause exploded at the end of the leader’s speech, he stood up and joined in. In Ernst Lubitsch’s To Be or Not to Be, Hitler responds to the Nazi salute by raising his hand and saying: ‘Heil myself!’ This is pure humour because it could never have happened in reality, while Stalin effectively did ‘hail himself’ when he joined others in the applause. Consider the fact that, on Stalin’s birthday, prisoners would send him congratulatory telegrams from the darkest gulags: it isn’t possible to imagine a Jew in Auschwitz sending Hitler such a telegram. It is a tasteless distinction, but it supports the contention that under Stalin, the ruling ideology presupposed a space in which the leader and his subjects could meet as servants of Historical Reason. Under Stalin, all people were, theoretically, equal.

We do not find in Nazism any equivalent to the dissident Communists who risked their lives fighting what they perceived as the ‘bureaucratic deformation’ of socialism in the USSR and its empire: there was no one in Nazi Germany who advocated ‘Nazism with a human face’. Herein lies the flaw (and the bias) of all attempts, such as that of the conservative historian Ernst Nolte, to adopt a neutral position – i.e. to ask why we don’t apply the same standards to the Communists as we apply to the Nazis. If Heidegger cannot be pardoned for his flirtation with Nazism, why can Lukács and Brecht and others be pardoned for their much longer engagement with Stalinism? This position reduces Nazism to a reaction to, and repetition of, practices already found in Bolshevism – terror, concentration camps, the struggle to the death against political enemies – so that the ‘original sin’ is that of Communism.

In the late 1980s, Nolte was Habermas’s principal opponent in the so-called Revisionismusstreit, arguing that Nazism should not be regarded as the incomparable evil of the 20th century. Not only did Nazism, reprehensible as it was, appear after Communism: it was an excessive reaction to the Communist threat, and all its horrors were merely copies of those already perpetrated under Soviet Communism. Nolte’s idea is that Communism and Nazism share the same totalitarian form, and the difference between them consists only in the difference between the empirical agents which fill their respective structural roles (‘Jews’ instead of ‘class enemy’). The usual liberal reaction to Nolte is that he relativises Nazism, reducing it to a secondary echo of the Communist evil. However, even if we leave aside the unhelpful comparison between Communism – a thwarted attempt at liberation – and the radical evil of Nazism, we should still concede Nolte’s central point. Nazism was effectively a reaction to the Communist threat; it did effectively replace class struggle with the struggle between Aryans and Jews. What we are dealing with here is displacement in the Freudian sense of the term (Verschiebung): Nazism displaces class struggle onto racial struggle and in doing so obfuscates its true nature. What changes in the passage from Communism to Nazism is a matter of form, and it is in this that the Nazi ideological mystification resides: the political struggle is naturalised as racial conflict, the class antagonism inherent in the social structure reduced to the invasion of a foreign (Jewish) body which disturbs the harmony of the Aryan community. It is not, as Nolte claims, that there is in both cases the same formal antagonistic structure, but that the place of the enemy is filled by a different element (class, race). Class antagonism, unlike racial difference and conflict, is absolutely inherent to and constitutive of the social field; Fascism displaces this essential antagonism.

It’s appropriate, then, to recognise the tragedy of the October Revolution: both its unique emancipatory potential and the historical necessity of its Stalinist outcome. We should have the honesty to acknowledge that the Stalinist purges were in a way more ‘irrational’ than the Fascist violence: its excess is an unmistakable sign that, in contrast to Fascism, Stalinism was a case of an authentic revolution perverted. Under Fascism, even in Nazi Germany, it was possible to survive, to maintain the appearance of a ‘normal’ everyday life, if one did not involve oneself in any oppositional political activity (and, of course, if one were not Jewish). Under Stalin in the late 1930s, on the other hand, nobody was safe: anyone could be unexpectedly denounced, arrested and shot as a traitor. The irrationality of Nazism was ‘condensed’ in anti-semitism – in its belief in the Jewish plot – while the irrationality of Stalinism pervaded the entire social body. For that reason, Nazi police investigators looked for proofs and traces of active opposition to the regime, whereas Stalin’s investigators were happy to fabricate evidence, invent plots etc.

We should also admit that we still lack a satisfactory theory of Stalinism. It is, in this respect, a scandal that the Frankfurt School failed to produce a systematic and thorough analysis of the phenomenon. The exceptions are telling: Franz Neumann’s Behemoth (1942), which suggested that the three great world-systems – New Deal capitalism, Fascism and Stalinism – tended towards the same bureaucratic, globally organised, ‘administered’ society; Herbert Marcuse’s Soviet Marxism (1958), his least passionate book, a strangely neutral analysis of Soviet ideology with no clear commitments; and, finally, in the 1980s, the attempts by some Habermasians who, reflecting on the emerging dissident phenomena, endeavoured to elaborate the notion of civil society as a site of resistance to the Communist regime – interesting, but not a global theory of the specificity of Stalinist totalitarianism. How could a school of Marxist thought that claimed to focus on the conditions of the failure of the emancipatory project abstain from analysing the nightmare of ‘actually existing socialism’? And was its focus on Fascism not a silent admission of the failure to confront the real trauma?

It is here that one has to make a choice. The ‘pure’ liberal attitude towards Leftist and Rightist ‘totalitarianism’ – that they are both bad, based on the intolerance of political and other differences, the rejection of democratic and humanist values etc – is a priori false. It is necessary to take sides and proclaim Fascism fundamentally ‘worse’ than Communism. The alternative, the notion that it is even possible to compare rationally the two totalitarianisms, tends to produce the conclusion – explicit or implicit – that Fascism was the lesser evil, an understandable reaction to the Communist threat. When, in September 2003, Silvio Berlusconi provoked a violent outcry with his observation that Mussolini, unlike Hitler, Stalin or Saddam Hussein, never killed anyone, the true scandal was that, far from being an expression of Berlusconi’s idiosyncrasy, his statement was part of an ongoing project to change the terms of a postwar European identity hitherto based on anti-Fascist unity. That is the proper context in which to understand the European conservatives’ call for the prohibition of Communist symbols.

06. 05. 27.

 

 

 

 

P.S. 현대 전체주의론의 모체가 되는 책이 12월에 출간됐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한길사, 2006)이 그것이다. 지젝의 '두 개의 전제주의'론과 대비해서 읽어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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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프레임의 향얀

어제 필름2.0 인가...하여간 영화잡지를 보다가 기사를 복사해왔다.

타이틀이 24시간 무료개방,온라인으로 만나는 포토 갤러리...이런거였는데 ..관심있으신분들은 들어가봐도 좋지 않을까

매그넘 (www.magnumphotos.com) : 보도 사진의 레알마드리드.35만점의 사진

존카플란(www.johnkaplan.com) 다큐멘터리사진작가,산업화와 근대의 이면

유다유조(www.uzo.net) 일본의 포토저널리스트,아시아 중남미 인물사진,위안부 할머니사진

션 커넌(www.seankernan.com) 나무 사진,클로즈업의 매력

앤드류 에클스(www.andreweccles.com) 유명인물 사진

라이트 레드베터(www.ewrightledbetter.com)쿠바인들의 모습

조이 테네슨(www.tenneson.com) 접사사진의 예술

마르쿠 라데스마키(www.markkuphoto.com) 과장과 역설의 극대화

그레고리 콜버트(www.ashesandsnow.org) 자연과 사람 ,책<인생 수업>의 표지

리웨이(www.liweiart.com) 험난한 작업과정을 통해 얻은 사진

자크 골드(www.zachgold.com) 광고패션 사진

에드 카시(www.edkashi.com) 다큐멘터리 사진,광고사진

닉 나이트(www.showstudio.com)쇼 스튜디오 사진

샌드 스코글런트(www.sandyskoglund.com) 대상과 공간의 미장센

 

....더 있는데 치기 힘들어서..ㅜㅜ 옆에 설명은 잡지에 나온 글 중 몇 몇 단어들로 소개를 대신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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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특집 석학 인터뷰: 세계 지성과 만나다

◎ 이름:교수신문(펌)
2002/5/16(목) 21:12
가라타니 고진 인터뷰   

특집 석학 인터뷰: 세계 지성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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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일본 긴키대 교수)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기대 신인류 대망, “동양의학적 평화운동으로 자본주의 한계 넘어서야”




기획을 시작하며
2002년 우리 지식인들은 몇 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지식’의 현실적 사용이 문제가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식인’이라는 존재와 그 당위의 문법이 여전히 반복적으로 조명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는 비단 한국 지식인만의 특수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물론 보편과 특수로 나눠, 바깥을 통해 보편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시대성’을 사유하며 고민을 나누려는 것이다. 특집 석학 인터뷰 ‘세계지성과 만나다’는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수 있는 문제를 중심으로 기획을 진행하려고 한다. 가라타니 고진 교수는 박유하 교수와의 이메일 대담에서 최근의 근황과 고민을 솔직하게 들려주고 있다.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의 생각들은 여러 지식인들에게 도움을 주리라 본다. 한편 그가 대화 중 사용한 몇몇 용어들을 굳이 번역하지 않았다. ‘어소시에이션’이 그 예인데, 어느 하나로 옮길 경우 고진 교수가 의도했을 지도 모를 이중적 의미를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서 영어 철자 그대로 음역했다. 제한된 지면상 대화의 일부를 싣지 못했는데, 일부는 아래 기사에 축약 소개했다. 전문은 교수신문 홈페이지(www.kyosu.net)에 게재했다. 앞으로 프레데릭 제임슨, 쟈크 데리다, 다너 해러웨이, 가야트리 스피박 등의 서구 지식인은 물론 제3세계 지식인들과도 지적 대화를 진행하려 한다. 우리 신문은 이 지면을 최대한 개방해 ‘열린 인터뷰’를 만들고자 한다. ‘지식인됨’의 고민이 스며든 인터뷰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지면이다. 독자 여러분의 참여와 관심을 구한다.

[참고할 웹사이트 주소]

NAM - http://www.nam21.org
Q 프로젝트 - http://www.q-project.org
비평공간 - http://criticalspace.org

박유하(이하 박): 냉전이 끝나고 10년 이상 지났지만 9·11 테러가 상징하는 것처럼 세계는 오히려 더욱더 혼미한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냉전의 ‘끝’은 새로운 대립의 ‘시작’이기도 했던 셈인데, 좀처럼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인 만큼 ‘현실’을 바꿀만한 힘을 가진 ‘말’(비평)이 지금이야말로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교수신문’이 이번 인터뷰를 기획한 배경에는 최근 한국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한 논의를 다시 생각할 때, 최근의 저서 ‘트랜스 크리틱’과 선생님에 의한 ‘NAM’의 제창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NAM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주십시오.

가라타니 고진(이하 고진): NAM은 ‘뉴 어소시에이션니스트 무브먼트’의 약자입니다. 저는 이것을 과거 2세기 동안의 사회주의운동을 논리적으로 통합하는 것으로서 구상했습니다. 어소시에이셔니즘은 프루동 등의 아나키스트가 제창했던 사고입니다. 그에 대해서 다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맑스와 프루동은 전면적으로 대립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맑스 사후에 성립한 ‘맑스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상황입니다. 물론 맑스는 프루동을 비판하고 있지만, 실은 그는 매우 많은 영향을 받은 사상가 이외에는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건 그가 아담 스미스나 리카르도를 집요하게 ‘비판’하면서 독일의 속세적 경제학자를 완전히 무시한 사실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맑스의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은 젊었을 때 프루동에 의해 제공됐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국가를 揚棄한다고 하는, 즉 보존하면서 동시에 폐기하는 사고입니다. 예를 들면 말년의 맑스는 파리 코뮨에서 실현된 것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산소비협동조합과 같은 어소시에이션이 국가를 대체한다는 사실에 ‘실현 가능한 코뮤니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코뮤니즘은 엥겔스나 레닌이 생각한 국가 통제적인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오히려 프르동이 말하는 아나키즘입니다. 실제로 파리 코뮨은 주로 프루동파에 의해서 실현됐으니까요. 맑스주의자도 아나키스트도 서로 비난하기만 할 뿐 이러한 관계를 보려 하지 않습니다.

1989년 국가주의적인 맑스주의운동이 파산된 이후로 아나키즘이 부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실제로도 근년의 세계화에 대한 대항운동의 주체는 주로 아나키스트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아나키즘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일까요? 맑스주의에 대해서 역사적인 반성을 한다면 동시에 아나키즘에 대한 반성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특히 NAM은 아나키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트랜스 크리틱’에도 ‘NAM원리’에도 되풀이 쓴 바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코뮤니즘이나 아나키즘 대신에 ‘새로운 어소시에이셔니즘’이란 말을 골랐습니다. 코뮤니즘이라고 하면, 아직 소련·중국·북한 등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나키즘에 관해서도 다른 나쁜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한 명칭을 사용하게 되면 ‘아니, 사실은 코뮤니즘은 그런 게 아니다, 아나키즘은 그런 게 아니다’라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번거롭고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어소시에이셔니즘이라고 하면, ‘그건 뭡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때는 아나키즘이나 맑스주의를 포함하는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를 설명하면 되는 것입니다.

박: 선생님께 있어 이론(비평)과 현실에 대한 개입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고 있습니까. 저는 자신의 글쓰기가 ‘현실에의 개입’이 될 수 있음을 늘 의식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그건 어디까지나 ‘글쓰기’에 의한 현실 개입일 뿐 실제 ‘운동’에 나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언젠가 필요한 때가 오면 하고 싶은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비상사태에 가까운 시기일 것입니다. 그래도 그때 저 자신을 움직이는 것은 제 나름대로의 ‘이론’일 테니 ‘이론’과 ‘실천’이 다른 차원의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정치)운동에 나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을까요.

“실현 가능한 코뮤니즘 , 분명 존재한다”

고진: 제가 시작한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정치활동이겠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정치활동은 아닙니다. 제 생각에 NAM은 ‘윤리적·경제적 운동’이라고 불러야 하는 운동입니다. 방금 당신은 언젠가 비상사태 같은 때가 오면 참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참여에 관해서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NAM의 운동은 비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극히 일상적입니다. 특히 목숨을 거는 식의 용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제활동을 중심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종래 생각돼 왔던 운동과는 다릅니다.

그에 대해 말하기 전에 제가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서 말해둬야 할 것 같습니다. 훨씬 예전의 학생운동 때를 별개로 한다면 그것은 1991년 걸프전쟁 때입니다. 그것은 소련의 붕괴, 냉전구조의 붕괴 이후에 나타난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사건이었습니다. 냉전구조, 즉 미소의 이원구조가 있던 시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편했습니다. 그 쌍방을 비판하고 상대화하는 식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됐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저는 종래의 맑스주의적 정당이나 국가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 비판은 그들이 굳건하게 존재해나갈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존재하는 한 그저 부정적이기만 하면 뭔가 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빠져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1989년에 이르기까지 저는 미래에 대한 이념을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자본과 국가에 대한 투쟁은 미래에 대한 이념 없이도 가능하고 현실에 발생하는 모순에 대해 끝없이 투쟁하는 일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련 등이 반영구적으로 존속할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붕괴했을 때 저는 나 자신이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의존해왔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내용의 무언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것을 생각하는데 10년이 걸렸습니다. 그것이 '트랜스 크리틱'라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결시킨 지점(2000년)에서 NAM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걸프전부터입니다. 그것은 걸프전의 결과로 일본의 정치체제, 군사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90년대에 들어 저는 그때까지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됐습니다. 한일문제에 관해서도 저는 4번의 한일작가회의에 참가했고 그 외 많은 강연활동을 했습니다. 아사다 아키라 씨와 함께 편집하고 있는 ‘비평공간’에서도 현실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또 저는 현실의 의회정당에 꽤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99년에 자민당정권은 걸프전이래 목표삼아온 일들을 전부 실현시켰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좌파는 완전히 패배·붕괴됐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어 더욱 비참한 상황입니다. 저는 자신의 작업이 패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NAM을 시작한 계기는 정치적인 패배에 있었고 정치적인 것에 대한 비판에 있었습니다. 정치적 활동이 아니라 윤리적·경제적 활동이라고 말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좀더 말하자면 NAM을 특징짓고 있는 것은 단순히 소비·생산협동조합 같은 것을 추진하는 일뿐 아니라 마이클 린튼이 고안한 LETS(지역교환거래체계: 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라는 지역통화를 핵심으로 한 경제권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지역통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통산성이나 시·군·구의 행정지도에 의해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에 의해 발행돼 국가적 화폐(엔)의 자본주의 경제를 보완하는 것일 뿐입니다. LETS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는 각 개인이 화폐를 발행하는 주권자이고 또한 전원의 적자와 흑자의 총액이 0이 되기 때문에 이윤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말을 바꾸면 LETS에 의한 교역에 있어서는 자본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NAM에서는 LETS를 개량해 웹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Q라는 명칭으로 불립니다. ‘円보다 球(큐)’라고 하는, 일본어 농담을 원용한 말입니다. 더 이상 지역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지역통화 대신 시민통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NAM에서는 시민통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박: 9·11 테러는 미국이라는 이름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형태로 표면화됐지만 자본에 대항하는 주체가 ‘국가·민족’ 주체였다는 사실에 처음부터 모순이 내포돼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와 자본에 대한 동시적 대항을 제창하는 선생님의 전략은 이런 모순을 타개하려는 것으로도 보였습니다.

고진: 통상 맑스주의에서는 경제적인 하부구조가 있고 그 위에 국가나 민족이라는 상부구조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경제적 결정론이 부정되고 상부구조의 독자적 위상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부구조가 이데올로기적이고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을 때, 경제는 그렇지 않은 굳건한 하부구조일 수 있을까요. 자본제 화폐경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신용에 의해 뒷받침된 환상시스템이고 언제 붕괴될지 모른다는 점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맑스는 ‘자본론’이라는 책에 몇십 년 동안이나 매달렸습니다. 그것은 경제적 하부구조라는 인식으로만 끝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젊은 맑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화폐경제는 종교적 세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국가나 민족은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시장경제에 있어서의 교환과는 다른 것이긴 하지만, 역시 교환을 그 근본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는 모든 것을 ‘경제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알고 있는 교환의 형태에는 크게 세 종류가 있습니다. 공동체나 가족 안에서의 교환처럼 상호 보수적인 것. 이것은 상호 부조적이지만 동시에 구속적입니다. 다음에 봉건적 영주와 같이 조세를 계속 얻기 위해 그것을 어느 정도 재분배하는 것. 여기서는 사람들은 구속돼 착취당하고 있지만 보호받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또 하나가 화폐에 의한 시장경제입니다. 앞의 둘과는 달리 여기서의 교환은 당사자의 자유로운 합의와 계약에 의해서만 성립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화폐를 가지는 자가 유리하고 잉여가치의 착취, 계급분해가 발생합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네이션=스테이트가 본래는 이질적인 네이션과 스테이트의 ‘결혼’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지적이지만 그 이전에 역시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두 존재의 ‘결혼’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국가와 자본의 ‘결혼’입니다. 국가·자본·네이션은 봉건시대에는 명확하게 구분됐습니다. 즉 봉건국가(영주·왕·황제), 도시 그리고 농업공동체입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교환’의 원리에 기초합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의 원리에 기초합니다. 둘째, 그러한 국가기구에 의해 지배당하고 서로 고립된 농업공동체는 그 내부에 있어서는 자율적이고 상호 부조적, 호혜적 교환을 원리로 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러한 공동체들 ‘사이’에 시장, 즉 도시가 성립합니다. 그것은 상호 합의에 의한 화폐적 교환입니다. 봉건적 체제를 붕괴시킨 것은 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침투입니다.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절대주의적 왕권국가를 낳았습니다. 그것은 상인계급과 결탁해 다수의 봉건국가(귀족)를 쓰러뜨림으로써 폭력을 독점하고 봉건적 지배(경제 외적 지배)를 폐기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국가와 자본의 ‘결혼’입니다. 상인자본(부르주아)은 이 절대주의적 왕권국가 속에서 성장해 통일적인 시장형성을 위해 국민의 동일성을 형성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내셔널리즘의 감정적 기반이 생기지 않습니다. 저는 네이션의 기반에 시장경제의 침투와 함께, 도시적인 계몽주의와 함께 해체된 농업공동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자율적이고 자급자족적이던 각 농업공동체는 화폐경제의 침투에 의해 해체되는 것과 동시에 그 공동성(상호부조나 상호보수성)을 네이션(민족) 속에 상상적으로 회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말로 ‘결혼’하는 것은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서입니다. 프랑스혁명에서 자유·평등·우애라는 삼위일체가 제창된 것처럼 자본·국가·네이션은 뗄 레야 뗄 수 없는 것으로써 통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근대국가를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라고 불러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보강하도록 돼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해 그 상황이 계급적 대립으로 귀결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국민의 상호 부조적인 감정에 의해 넘어서서 국가로 하여금 규제시키고 부를 재분배하는 식인 것이지요. 그 경우 자본주의만을 타도하려고 하면 국가적인 관리를 강화시키는 일이 되고 혹은 네이션적 감정에 굴복당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는 전자가 스탈린주의이고 후자가 파시즘입니다.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라는 삼위일체의 구조는 극히 강력합니다. 어떠한 사유도 이 틀을 넘어서기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를 넘어서기는커녕 그것이 존속하기 위한 유일한 마지막 형식입니다. 저는 사회민주주의에 아무런 희망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90년대에 저는 다른 형태에 가능성이 없는 이상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이 세 가지 형태 이외의 교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소시에이션입니다. 그것은 상호 부조적이지만 공동체와는 달리 자유롭게 참가하고 또 나갈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은 모르는 사람들끼리 교환하는 ‘시장’이면서도 자본주의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재분배에 의해 부의 불평등을 보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윤리적·경제적인 어소시에이션은 일정한 종류의 화폐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합니다.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시민통화입니다.

되풀이 말하자면 시민통화는 가족이나 공동체에 의한 상호보수적 교환도, 시장경제의 사업적 교환도 아니지만 동시에 양쪽 모두이기도 합니다. 바꿔 말하면 이 둘을 ‘揚棄’하고 있습니다. 즉 보존하면서 폐기합니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생각과 긍정하는 생각, 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시장경제를 揚棄한다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시장을 揚棄한다’는 것은 시장의 폐지도 부정도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민통화Q 안에서 시장경제는 보존됩니다. 예를 들면 Q에서는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계약하고 교환하니까요.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적인 이윤추구는 폐기됩니다. 또 한편 Q에 있어 공동체의 상호 보수적 교환이 보존됩니다. 증여나 보답과 같은 교환관계가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Q에 있어서는 가족이나 공동체 같은 폐쇄적·배타적 구속은 없습니다. 애정이라는 이름하의 무상노동이나 심리적 빚도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장경제처럼 사업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동체는 폐기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이 금방 달성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몇 세기는 걸릴 일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론적으로 미래변혁에의 길이 존재하는가 입니다. 현실에 모순이 있는 이상 투쟁이나 대항운동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사회민주주의, 또는 의회정치에 흡수돼 버립니다. 왜냐하면 장래에 대한 논리적 전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민통화 Q가 윤리·경제적 관계 만들어

박: 20세기는 아이덴티티 중에서도 ‘민족’ 아이덴티티만이 강조된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상황이 그때까지 이상의 대규모적 전쟁과 살육을 유발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민족’ 아이덴티티의 강조는 그 속에 있는 성이나 계층의 대립을 은폐시킵니다. 그런데 이른바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적·경제적 식민지화에 대한 저항의 언어로써 유용해 보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패권주의적 정치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차이’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차이 따위는 없다고 인식하는, 즉 아이덴티티는 다양한 것이지만 동시적일 뿐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대해 더욱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의 강조는 필연적으로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경계’를 만들어냅니다. 그러한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경계’를 넘어서는 만남(세계시민으로써의 연대)은 언제까지나 불가능할 것입니다.

NAM의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처음부터 ‘트랜스내셔널’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국가와 자본을 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전통적) ‘공동체’를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 기반해 있겠지요.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익숙해진 것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있고 ‘공동체’를 넘으려는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런 움직임에 대한 저항도 강력하고 뿌리깊은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점은 익숙해진 것으로부터 이반할 것을 말하는 담론이 상황에 따라서는 폭력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9·11사건으로 무너진 계몽 기획

고진: 세계화라고 불리는 것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국가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자본은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로의 형태로만 존재합니다. 시장경제의 세계화가 진행되어도 국가가 해체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도 해체되지 않습니다. 그렇기는커녕 반대로 국가와 민족이 강조됩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를 저술한 이래 네이션은 상상물이라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단순한 표상이나 가상이 아닙니다. 칸트는 “감각에 의한 오차로부터 생기는 가상이라면 이성에 의해 제거할 수 있지만 어떤 종류의 가상은 오히려 이성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라든지 신이나 사후의 생명 같은 것이죠. 그것들은 가상이라고 하면서 제거시키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그것을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화폐나 네이션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화폐 같은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네이션도 마차가지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서의 사업적인 관계와 국가에 의한 폭력적인 지배·피지배관계 속에 있어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서로 돕는 동포라고 하는 ‘표상’입니다. 그것이 환상이라 해도 그것을 필요로 하는 현실을 해소하지 않는 이상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내셔널리즘이 강해질 때 어떻게 해야할까요. 물론 지식인들이 그러한 상황에 대해 계몽적인 발언을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은 더 이상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90년대에 저는 그런 일을 계속 해왔지만 ‘패배’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9·11과 같은 사건 하나만으로 긴 세월에 걸친 계몽도 모두 무화됩니다. 더 말하자면 일본에는 네이션을 초월한 것처럼 말하는 지식인이 적지 않지만 저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일본 안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그들은 네이션은 단순한 가상이 아니고 초월론적 가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네이션이 상상물이라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없고 또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는 그런 일 대신 아무리 작은 규모의 것이라도 네이션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네이션에 대항해 어소시에이션을, 국가의 통화에 대항해 시민통화를 대치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시민통화에 기초한 어소시에이션은 네이션이 상상적으로 충족시키고 현실에서는 국가에 의해 (세금의 재분배로서) 실행되는 일을 그 자신이 실현합니다. 저는 ‘트랜스내셔널’이란 말을 ‘인터내셔널’과 구별해 쓰고 있습니다. ‘인터내셔널’이 네이션을 단위로 하는데 비해 ‘트랜스내셔널’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가가 발행하는 것이 아닌 시민통화는 트랜스내셔널한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경제적인 관계를 트랜스내셔널적으로 확장시키는 일이 내셔널리즘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 문제는 그런 식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욕망과 권력욕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선생님께서 칸트를 원용하면서 타자를 수단으로 하지 말고 목적으로 하라는 계몽적인 ‘윤리’를 언급하시는 것도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과 같은 식민지 체험을 한 나라에 있어서는 과거에 얻을 수 없었던 ‘주체’화에의 욕망은 물론, 가난했던 시절에 대한 반동으로서 강렬한 경제적 욕망이 존재합니다. 이런 현재의 한국에 있어서 ‘자유로워라’는 명제가 어디까지 수용될 수 있을지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보편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욕망을 넘어설 수 있는 ‘윤리’는 어떤 조건하에서 가능해질 수 있을까요.

고진: 저는 ‘윤리21’에서 이런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따금 칸트는 “타자를 수단으로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써 대하라”고 한 것처럼 언급되지만 실제로 칸트가 말한 것은 “타자를 단순히 수단으로서만 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하라”는 것입니다. 즉 수단으로써 대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분업과 교환 속에서는 우리들은 타인을 수단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타자를 단순히 수단화하는 것이기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칸트의 윤리학은 시장경제를 전제로 하고 또한 그것을 비자본주의화할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는 경제가 없는 윤리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까 시민통화Q가 윤리적·경제적이라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그 경우 중요한 것은 윤리적 동기가 없더라도, 즉 무엇인가 이윤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Q에 가입해도 상관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Q를 사용하는 한 그 사람은 자연히 윤리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정한 ‘변혁’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리적인 결단이나 강제만으로는 생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도덕적 설교도 아니고 개인적 의지도 아닙니다. 제 생각으로는 기술적 인식입니다. 예를 들면 관료제나 권력의 부패를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여러 방안이 논의돼 왔습니다. 현재의 의회제 민주주의도 그 소산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잘 안됩니다. 변함없이 관료가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관료주의적 부패에 대한 비판을 계속 해왔지만 그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교나 모택동 식으로 설교를 해도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막는 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권력이 집중하는 곳에 우연성, 즉 제비뽑기제도를 도입하며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대의 아테네처럼 전부 제비뽑기로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선거+제비뽑기’입니다. 선거는 필요합니다. 오히려 선거의 기능을 살리기 위해서 최후에 제비뽑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3명을 투표로 골라서 그 중에서 제비뽑기로 결정합니다. 최종적 결정은 제비뽑기에 의해 정해지므로 권력자가 자신의 승계자를 만들 수 없습니다. 파벌을 만들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매수행위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든지 투표할 때 상대적으로 괜찮은 사람을 고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 3명은 나름대로 유능한 사람이 선택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에서 누가 결정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제비뽑기로 결정된 사람은 자만할 수 없을 것이고 떨어진 사람도 그렇게 분할 것도 없으니까 협력할 것입니다. NAM에서는 대표를 포함해서 선거와 제비뽑기로 구성원을 결정하는 시스템을 취하고 있습니다.

박: 로자 룩셈부르크나 레닌은 노동자의 정치적 스트라이크와 봉기를 중심으로 하는 전술을 제창했지만 제국주의를 저지할 수 없었다고 하는 선생의 지적에서는 선생의 문제의식이 어디에 있는지가 명확히 보입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것 중에서도 특히 제게 흥미로웠던 것은 불매운동 등의 '보이콧'이라는 행위의 가능성이었습니다. 저는 내셔널리즘비판은 최종적으로는 국가전쟁의 보이콧에 연결되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는 다양한 접촉수단이 있고 자신이 속한 국가보다도 다른 국가나 거기에 존재하는 개인 쪽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진 사람들, 특히 젊은층이 늘고 있습니다. 90년대 이후의 인터넷의 등장은 아마도 상상되고 있는 이상의 교류와 소통을 가능케 하고 있을 것으로도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제는 전세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두 나라사이의 국가에서 매스컴을 넘어선 시민 레벨에서의 의사소통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이콧'이라는 행위의 가능성에 대해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바를 조금 더 이야기해주십시오.

고진: 스트라이크와 보이콧의 문제는 '자본론'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어느 쪽을 중시하는가 하는 해석과 연결됩니다. 제 생각은 '자본론'의 해석을 바꾸는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제까지 맑스주의나 아나키즘(생디칼리즘)에서는 생산점에서의 노동자의 제네럴 스트라이크가 변혁을 가져온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옛날부터 불가능했고 더더욱 불가능해져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시민운동 즉 소비자의 운동이나 그에 따른 여성이나 마이널리티의 운동이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과 노동운동 사이에는 교류가 없을 뿐 아니라 대립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순수한 '시민'이니 순수한 '소비자'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소비자란 노동자가 소비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 생기는 입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노동자가 생산점에서 싸우면 스트라이크이고 소비(유통)점에서 싸우면 보이콧입니다.

자본의 축적운동은 M-C-M(화폐-상품-화폐)라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그런 경우 산업자본에 있어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만든 노동자입니다. 즉 잉여가치는 총체적으로 보자면 노동자가 자신들이 만든 것을 다시 살 때 생기는 차액에 있습니다. 그러나 'M-C-M' 운동 안에는 자본이 만나는 두 가지 위기적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노동력상품을 사는 일과 생산물을 노동자에 파는 일입니다. 만약 이중 어느 한쪽에서 실패한다면 자본은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자본일 수가 없는 거지요. 노동자는 이 두 가지 점에서 자본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는 안트니오 네그리가 말한 것처럼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노동력을 팔지 말라'(자본제 아래에서 임금노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마하트마 간디가 말한 것처럼 '자본제 생산품을 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노동자가 '주체'일 수 있는 장소(포지션)에서 행해집니다. 그러나 노동자=소비자들이 '일하지 않는 일'과 '사지 않는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일하거나 구매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비자본제적인 생산과 소비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超出적인 투쟁(생산-소비협동조합이나 LETS)은 자본제 경제에 있어 내재적인 투쟁을 위해 불가결합니다. 반대로 후자(보이콧을 중심으로 하는 내재적 투쟁)는 자본제 기업을 비자본제적 기업형태로 조직을 변환시켜 나가는 일을 포함합니다.

보이콧은 옛날부터 있었고 지금도 가끔 행해지고 있습니다. 주의할 점은 그것이 내셔널리즘을 위해서 행해진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기업이나 각각의 국가는 그럴 경우 큰 타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국제분쟁을 격화시킵니다. 한편 우리들이 생각해야 하는 보이콧은 자본제에 대한보이콧이고 동시에 그것이 네이션=스테이트에의 보이콧이 되는 보이콧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는 NAM은 보이콧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여성운동이나 마이너리티를 위한 운동, 혹은 환경운동 같은 운동들은 현재까지는 서로간에 연결코드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NAM운동은 그런 운동들간의 연대를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과거나 현재에 차별과 지배의 구조 속에서 중심이 되었던 존재들, 예컨대 식민지피해자들과 제국주의 지배자들, 지배당했었던 여성들과 지배했었던 남성들은 자각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삶을 영위하는 이상 누구나 어떤 의미에서건 지배와 착취의 구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 그렇다는 사실에 대하여 자각적이 되어 그러한 구조를 끊으려는 의식을 가질 수 있다면 선생님의 '운동'은 성공하겠지요.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부터 현재까지의 일본 혹은 그 이외로부터의 반응과 남은 과제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고진: NAM에는 개인이 참가합니다. 모든 개인은 다수의 차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경우 한 레벨에서는 소수자이지만 다른 레벨에서는 다수자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NAM의 조직원리는 '개인'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그 개인은 다수의 관심사나 지역에 동시적으로 귀속됩니다 . 아직 규모는 작지만 이 개인의 다수소속제에 의해서 많은 관심영역이 교차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이제까지 생각되지 못했던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자본제 경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생산과정에 대한 것에서 유통과정 쪽으로 그 중점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스트라이크로부터 보이콧 쪽으로지요. 즉 소비자로서의 노동자투쟁이 되는 거지요. 이것은 동시에 노동운동은 남성에 의해, 소비자 운동은 여성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던 이제까지의 관행을 깨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까 NAM의 활동은 비일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이 운동이 '여성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여성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데 그것은 일본의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적'이고 또한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민통화Q의 보급과 함께 여성참여자의 수가 늘어가고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운동에서는 예전부터 여성의 가사노동을 어떤 식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왔습니다. 대체적으로 이런 거지요. 가사노동은 임금을 지불 받지 못하니까 비가치생산적이고 이리이치가 말하는 '그늘의 작업'이었습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싶은 나머지 그것을 임금노동 일반과 등치시켰습니다. 그리고 임금이 지불되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자본주의화 되는 사회가 바람직한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거기에는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를 초월할 수 있는 전망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생각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만약 남편이 아내에게 임금을 지불한다면 부부일 필요가 없습니다. 가정부를 고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보면 부부의 관계는 단순히 사랑이나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증여와 보답이라는 상호 보수적 관계 속에 있고 이것은 즉 교환관계이며 넓은 의미에서는 '경제적'인 것입니다. 부모자식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자본주의적인 교환관계로 환원시킬 수 는 없습니다.

모든 관계가 자본주의화 되는 사회가 좋을 리 없습니다. 그렇다 해서 남편이 밖에서 일하고 부인을 먹여 살린다고 생각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가사노동에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화폐적인 교환가치로 그것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곤란은 시민통화를 사용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사노동에 대하여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 돈(엔)을 지불하지 않고 시민통화로 지불하면 됩니다. 그밖에도 예컨대 감사하는 마음이나 받은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지만 그것을 돈으로는 돌려주고 싶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시민통화를 사용하면 윤리적·경제적인 관계가 가능해집니다. 시민통화는 인간관계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제까지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할 열쇠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아까 시민통화나 어소시에이셔니즘은 수세기 걸릴 운동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이곳에서 당장 실현할 수도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자본제적인 경제는 언제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실제로 비자본제적인 촌락공동체의 경제는 다소 남아있습니다.) 예를 들면 9/10은 엔으로 1/10은 시민통화로 교역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렇게 된다면 말하자면 1/10만 코뮤니즘이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시민통화가 엔과 같은 국가통화를 전면적으로 대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민통화가 전경제의 1/10을 넘는 시점에서는 경제전체가 달라질 것입니다. 국가도 자본도 자기 멋대로 행동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상태를 실현하기 위하여 서두를 필요가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구온난화, 환경오염, 유전자개조식품 등이 밀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본의 자기증식운동 M-C-M의 산물입니다. 개개인이 생각을 바꾼다 해도 이 현상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비자본제적인 시장경제를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어떻게 될 지와는 별개로 우리들은 이 운동을 서둘러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칸트는 '타자를 수단으로써 뿐만 아니라 목적으로써 대하라'고 말했는데 이 경우 타자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간입니다. 온난화나 환경오염의 피해를 받는 것은 그들입니다. 즉 우리는 그들, 타자를 완전히 수단으로만 대하고 있는 셈입니다. 제3세계의 타자라면 항의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불만도 말하지 않습니다. 아직 존재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서 타자를 무시해서는 안되겠지요.

박: 일본은 걸프전 이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나라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나라’를 지향한다는 말에 시민들도 공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익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생기는 것이겠지요. ‘戰前의 思考’라는 개념을 선생이 강조하신 것은 다가올 전쟁을 예상해서 한 말이었겠지만 작금의 상황은 선생의 예상이 예언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9·11 테러 이후 , 미국 중심의 20세기적 구조가 변하려는 시대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있습니다만, 21세기를 맞아 세계질서가 그 재편성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 단계에서의 일본이나 미국을 둘러싼 정치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선생의 미국으로의 ‘이동’도 이러한 정치상황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만 그런 점에 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고진: 실은 9·11 테러 직후 곧바로 제 예언이 들어맞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옴진리교 지도자가 제 예언에 대해서 쓴 글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옴은 제가 쓴 것을 예언으로 받아들여서 그에 대비해 움직인 모양입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제가 한 말은 예언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경기순환(파동)과 일본이 국제적으로 놓여있는 관계구조에 대해 말한 것이고 그러한 상황이 반복적이라는 점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80년대 일본경제에서 주가가 끝없이 상승해나가고 있을 때 이것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예언이 아닙니다. 예측이라 할 만한 것조차 아니지요. 자본제 시장경제가 잔혹한 경제순환을 통해야만 자기조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누구라도 말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앞으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음과 같이 명확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 속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거기서 빠져 나오기 위한 방법은 그것과 다른 어소시에이션을 조금씩 확산시켜 나가는 길뿐이라는 것이지요. 앞으로 어떻게 될 지에 관해서는 국가도 자본도 필사적으로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분석하고 비판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현재나 수년, 수십년 후의 전망이 아니라 수세기 후를 향한 전망, 바꿔 말하자면 ‘이념’을 갖는 것입니다.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미국에서 활동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제가 하는 말들이 일본보다도 오히려 미국에서 더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활동한다고 해서 NAM 지부를 만들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애초에 NAM에는 해외지부라는 발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도 우리는 NAM을 확산시키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NAM적인’ 것을 확산시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운동은 그 나라의 조건에 따르는 형태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미국에서 일어나는 운동은 다른 이름으로 불릴 것이고 다른 형태를 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NAM적’인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만약 한국에서 ‘NAM적인’ 운동이 일어난다면 일본의 NAM과 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 선생님을 잠시 ‘일본’의 지식인으로 간주하고 질문하겠습니다. 한일 ‘화해’라는 명제는 ‘전후’를 종식시키고 ‘식민지시대’를 종식시키는 것으로서 20세기를 종식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20세기적 불행한 관계를 기반으로 해서 21세기적·세계시민적 관계를 쌓는다는 의미에 있어서도 저로서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방법이 되겠는데 저는 각 개인이 ‘일본’과 ‘한국’의 틀을 넘어서 생각하는, 즉 민족이나 국가단위의 사고의 틀을 넘어선 대화가 행해지지 않는 한 화해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해자=책임자’의 구조가 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아 단순히 ‘일본’이라는 국가적 명칭만으로는 ‘가해자’의 실체를 확실히 할 수 없는 만큼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사죄하지 않는다고 한국은 비난하지만, ‘국가’라는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법’ 자체가 타자를 억압하는 것이니 ‘국가’를 넘어서는 사고를 하지 않는 한 ‘사죄’는 할래야 할 수 없는 구조가 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애당초 ‘국가’에 윤리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으니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이 사죄하기 위해서는 ‘국가’이면서도 ‘개인’·시민의 사고를 할 수 있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한일 사이의 화해를 방해하는 것은 일본에도 책임이 있습니다만 피해자로써의 입장이 무조건적으로 ‘옳음’으로 비춰지는 상황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한일 혹은 중일사이에서 지식인끼리 연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아시아’를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서구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 투박하게 사고하기

고진: 되풀이 말헤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어소시에이셔니즘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이외의 방법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나름대로 많은 활동을 해왔다고 생각하고 있고 앞으로도 한일 지식인의 연대를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활동해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저는 이제까지 해왔던 방법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일관계는 더 이상 간단히 결렬될 수는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복잡하게 뒤섞인 상태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존재하는 대립이 불거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제가 하는 말은 너무나 작고 너무나 우회적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동양의학’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 특징은 국소적인 증상에 직접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밸런스를 점차 바꾸어 가는 것으로 서서히 치료해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의미에서도 시민통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인이 그것에 참가하려 할 때 어떤 나라의 ‘국민’일 필요는 없습니다. 각 개인이 직접 통화를 발행하니까요. 따라서 그것은 트랜스내셔널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자본이나 국가와는 다른 윤리·경제적인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개개인이 일부러 그런 점을 의식하지 않아도 그렇게 됩니다. 저는 이제 이것 이외에 희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쨌든 거기에는 희망이 있으니까 그나마 낫다고 생각합니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저술했을 때 국제교역이 발달하면 전쟁이 억제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외국과 경제적인 교역관계가 깊어지면 전쟁을 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오히려 국제교역에 의한 이해대립으로부터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그렇다면 칸트가 틀렸을까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역(경제관계)이 네이션=스테이트간의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교역이 자본주의적인 이유추구에 바탕한 것이라면 전쟁이 됩니다. 그것이 만약 비자본주의적인 교역이라면 전쟁은 억제됩니다. 즉 여기서부터 시민통화에 의한, 어소시에이션에 의한 교역이 ‘영구평화’를 가져온다는 발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반전운동, 평화운동만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샌가 비전쟁 효과가 나오는 식의, 일종의 ‘동양의학적’인 평화운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는 윤리·경제적 운동입니다.

정리 권희철 기자 khc@kyosu.net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1941년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연구했다. 1969년부터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문학평론이라는 장르에 머물지 않았다. 하나의 영역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철학, 역사, 건축, 맑스주의 등 다양한 세계 속으로 스스로를 열어 젖히고자 했다. 일찍이 그의 사유는 일본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도 주목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래 들어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고진 읽기가 유행인 것은 무슨 까닭일까. 문학과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자유롭게 넘나드는 모습, 서구 사유에 정통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사유체계를 정립해 온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국내에 소개된 주요 저작으로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김경원 옮김, 이산 刊),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옮김, 민음사 刊), ‘은유로서의 건축’(김재희 옮김, 한나래 刊), ‘탐구 1, 2’(송태욱 外 옮김, 새물결 刊), ‘윤리 21’(사회평론 刊) 등이 있다. 최근에는 공동저작인 ‘근대 일본의 비평’과 ‘현대 일본의 비평’(송태욱 옮김, 소명출판 刊)이 간행되기도 했다. 현재 일본 긴키대 문예학부와 미국 컬럼비아대 동아시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비평공간’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일문학)는

1957년생으로 일본 게이오대와 와세다대학원에서 일본 근현대문학을 연구했다. 학위논문은 나쓰메 소세키 연구. 1995년부터 세종대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소세키와 야나기 무네요시 등에 밝다. 주요 저서로는 세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사회평론 刊) 등이 있다. 박 교수는 이 책을 통해 민족주의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있다. 민족주의 비판이 박 교수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한편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민음사 刊)을 번역하기도 했다. 최근에 간행된 2002년 당대비평 특별호 ‘기억과 역사의 투쟁’에는 ‘상상된 미 의식과 민족적 정체성: 야나기 무네요시와 근대 한국의 자기 구성’이라는 논문을 싣기도 했다. 내용을 잠시 엿보자. “아이덴티티란 단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것이라는 것은 스튜어트 홀의 지적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이미 명백하다. 그 다양한 아이덴티티 중 그것을 필요로 하는 주체의 스스로의 권력화와 타자의 배제를 지향하는 정치적 이기주의가 하나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러한 ‘이기적’ 아이덴티티에의 상상과 기억이 오늘까지도 민족 담론과 ‘역사’ 서술의 근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말·말·말

“맑스가 말하는 ‘진리는 이론에 의해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실천에 의해서다’라는 테제로 말하자면, ‘실천’이라는 것은 자포자기하는 것이고 엉망진창이며 방향이 없는 것으로서, 아무튼 그런 선을 그어보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의 생각도 그런 것이겠지요. 흔히 사람들은 ‘실천’을 주체적·목적적 행동으로 보고, 이론가는 책상에서 하고 있지만, 우리는 ‘실천’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천은 둘러싸인 선의 내부에서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 아사다 아키라의 ‘도주론’(민음사 刊)에서 대담

“외국인이나 아이들과 의사소통한다는 것은 곧 공통의 어떤 규칙들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공통의 약호를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 타자에게도 똑같이 의미 있는 것이다. 즉, 타자―어떤 공통의 규칙들을 공유하지 않는―와의 의사소통은 항상 가르침·배움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의사소통에 관한 지금까지의 이론들은 모두 공유되는 어떤 공통의 규칙을 예외 없이 가정하지만 외국인, 아이들, 정신병자들과의 대화에선 어떠한 공통 규칙도, 적어도 처음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은유로서의 건축’(한나래 刊)

“우리는 죽은 자와 교섭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와 죽은 자 사이의 관계가 변한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변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애도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변하겠는가. 단지 그로써 산 자의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뿐이고,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관계가 변하는 것이다.”
- ‘윤리 21’(사회평론 刊)

“저에게 비평은 칸트적 의미에서의 비판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칸트의 비판이라는 것은 기준이라든가 입장이라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의, 이른바 자기 언급적 음미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모든 입장을 해치운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회의는 아닙니다. 기준이나 입장이 없다는 것에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시작하죠. 저에게 1975년 이후의 비평이라고 할 때, 그 직접적인 상대는 문학이 아니게 됐습니다. 오히려 철학 혹은 문화·과학, 경제학, 심리학, 인류학이 되어갔던 겁니다.”
- ‘현대 일본의 비평’(소명출판 刊)

“자본제경제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곧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또 그것이 스스로 종말을 고할 리도 없다. 그러나 이론적인 무지를 바탕으로 한 실천은 결코 변혁이 될 수 없다. 도리어 우리는 자본제경제를 지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명확히 하는 것만으로는 변혁의 가능성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산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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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0일부터 회고전 열리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세계
2006.12.22

초현실주의의 정수를 본다

<신뢰>, 1964~65

서울시립미술관은 어느새 이른바 서양 미술사 거장들의 국내 출입구가 되었다. 샤갈, 마티스, 피카소에 이어, 3년여 각고의 준비 끝에 르네 마그리트의 전시를 성사시켰다. 12월20일부터 2007년 4월1일까지 열릴 <초현실주의의 거장 - 르네 마그리트전>은 무려 100일이 넘도록 서울 한복판에서 성대하게 치러질 국내 최초 회고전을 표방했건만, 르네 마그리트는 이 대형 이벤트 이전부터 일찌감치 간접적 경로를 거쳐 우리의 시각 경험 속에 상주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인적 드문 을씨년스런 벌판을 배경으로 상체를 꼿꼿이 세운 중절모 신사의 강직한 뒷모습은 외압에 굴하지 않는 언론사의 이미지를 굳힐 목적으로 <조선일보>가 ‘할 말은 하는 신문’이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한짝으로 사용했던 도상이었다. 여기서 할 말을 한다는, 그 중절모 신사의 친숙한 뒷모습은 마그리트의 전작들을 통해 발견되는 단골 아이콘이기도 하다. 한편 불과 몇달 전까지 신세계백화점 명동 본점이 보수공사 기간 중 가림막으로 사용한 외피 위로 마그리트의 <골콘다>가 크게 확대 인쇄되어 건물 전체를 포장하고 있었으니, 그곳을 지나던 보행자와 승객은 매우 일과적으로 특정 작품을 뇌리에 각인시킨 꼴이 되었다. 더욱이 <골콘다>는 마그리트 자신이 거주하기도 했던 브뤼셀 지역의 구식 아파트를 연상시키는 복층 건물을 배경으로 마그리트가 생전에 즐겨 입었던 두툼한 오버코트와 중절모 차림의 신사가 동일한 패턴으로 무한 복제되어 허공 위로 헬륨가스 풍선마냥 부유하는 모습을 담는다. 이처럼 현실에서 결코 가능할 법하지 않은 낭만적 설정을 차창 너머로 구경한 승객은 일시적으로 해방감을 맛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밖에 이미 국내 인문·교양 분야의 스테디셀러로 자리를 굳힌 미학자 진중권씨의 <미학 오디세이> 총 세권 중 둘째 책은 겉표지부터 목차 구성에 이르기까지 마그리트의 연대기적 실험작들을 디딤돌 삼아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렇듯 두 세기 전 태어난 어느 벨기에 화가(1898년생이다)의 인기는 세기를 초월한다. 그 때문에 그가 ‘초현실’주의자로 불리는 걸까? 멀리서 찾을 필요 없이 마그리트의 흔적은 주변에서 다양한 용도로 인용되는 실정이니 말이다. 광고 효과를 노려 프로파간다를 목적으로 원화를 변용 및 전용시키거나, 그림이 갖고 있는 일러스트 한 느낌만 부각시켜 벽면 장식에 활용하거나, 양껏 퍼가도 마를 줄 모르는 인문적 상상력의 급수원 노릇을 하거나인 것이다.

정통 초현실주의자들과 차별화 된 논리적 사고

현재 그의 위상은 서양 미술사에서 엄연히 초현실주의라 일컬어지는 특정 사조의 대표 거물로 분류되는 실정이지만 그의 출발은 조촐했고 또한 현실적이었다. 제도 미술 교육을 받았으되,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 <초현실주의 선언문>이 채택 발표된 1924년보다 2년이나 더 지난 1926년까지도 그는 벽지 제조 공장에서 포스터와 광고물을 디자인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비상업적 조형작업을 남겼지만 당시 남긴 작업들은 어디까지나 인상주의, 미래주의, 입체주의에 경도된 것이었다. 상업 예술가로 출발한 그의 이력은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이런 예가 일단 결코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팝아트와 동격으로 대우받는 앤디 워홀은 본래 잡지 일러스트와 광고 디자인으로 해당 분야에서 이름을 얻지 않았던가?

<회귀>, 1940

국내 개최 예정인 마그리트 회고전 제목이 ‘초현실주의의 거장’으로 뽑혔다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가 구사하는 초현실적 구도와 판타지로 가득한 내용물은 선언문까지 채택한 정통 초현실주의자의 것과는 출발부터 상이한 것이었다. 초현실주의 운동이란 1차대전 참상의 책임을 산업혁명과 이성중심주의가 지배한 서구 근대주의에서 찾으려 든 다다(Dada)의 반체제적 움직임에서 영향을 받아 발생했다. 때문에 합리주의에 정반대되는 비이성을 전폭 지지했고, 1900년 출간되어 인간 주체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깊은 공감을 표했으며, 나아가 꿈같은 상태를 표현의 장으로 연장시키고자 자동기술법을 개발했다. 창작자의 내면에 갇혀 있는 욕망을 해방시키자는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드러내는 한 방편으로 지지한 자유연상법에서 가져온 것이다. 초현실주의 운동의 출발은 브르통, 아라공, 엘뤼아르 같은 당대 문인들이 중심이 된 문학 운동이었으나, 무의식과 꿈, 그리고 상징성은 조형언어를 다루는 미술인에게도 큰 매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역설적인 사실과 직면한다. 정작 초현실주의 운동의 이론적 지주로 추앙받던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걸로 전해진다. 초현실주의자들에 대해 그가 느낀 유일한 관심사는 그들의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었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그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무의식에 대한 개념적 오해와 그들 주장의 허구성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이트 이론에 따르면 의식 상태에서 무의식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채택한 자동기술법에 대해서도 에고(ego)의 개입으로 체계화된 것으로 이해했다.

이에 반해 마그리트는 정통 초현실주의자들이 천착했던 비성주의나 꿈에 대한 몰입과는 선을 긋고 있었다. 작업에서 묘사된 대상들은 명료했고, 논리적 틀거리 안에서 이야기의 얼개가 완성되었다. 생전에 자신의 작업을 상징적으로 풀이하려는 외부의 시도에 대해 깊은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가 작품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꿈이라는 용어 역시 철저히 ‘스스로 통제 가능한 꿈’을 의미했고, “잠재우는 것이 아닌, 일깨워주는 것이 꿈”이라고 역설했을 정도로 논리적 사고를 중시했다. 정통 초현실주의의 이론적 세례에서 자유로웠던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그렇다면 무얼까? 흔히 그의 초현실적 화면 구성은 그가 1920년대 초 처음 접한 이탈리아 화가, 드 키리코로부터 비롯된다고 전해진다. 광각렌즈로 바라본 것처럼 굴곡있는 원근법적 구성과 신고전주의 대리석 두상과 원통 그리고 고무장갑처럼 별 상관없는 오브제들이 널찍한 광장 한복판에서 결합되곤 하는 드 키리코식 조형문법은 마그리트는 물론 후대 초현실주의 일반에게 지대한 영향을 줬다.

한편 내용의 측면에서 그는 추리단편소설 <검은 고양이>의 저자이기도 한, 미국 낭만주의 문필가 에드가 앨런 포의 영향을 받았다. 이미 국제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1965년, 즉 그가 타계하기 두해 전 그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회고전의 초대작가가 된다. 처음이자 마지막 뉴욕 여행길에서 그는 포가 머물던 장소들을 순례할 만큼 그에 대한 존경심이 각별했다. 마그리트는 포의 <Tales of Mystery and Imagination>에 깊이 감화되어 소설이 포섭하고 있는 판타지적 무대, 기이한 상황 설정, 비이성적 행동과 변태, 광기, 도박과 알코올 중독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 더욱이 죽음이 짙게 드리운 등장인물과 생사가 교차하는 서사구조야말로 그가 어릴 적 받은 어떤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다. 마그리트의 생모는 그의 유년 시절 숱하게 자살을 기도했고, 결국 그의 나이 14살 되던 1912년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는데, 며칠이 지나 강물에서 건져 올린 여인의 얼굴은 잠옷으로 덮어 씌워 있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어린 마그리트는 익사체의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에서 곧잘 불러오곤 했는데 어릴 적 체험을 투영한 대표작이 1928년 완성한 <연인들>이다. 백색 두건으로 얼굴을 몽땅 뒤집어 쓴 두 남녀가 서로 뺨을 맞대고 있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이후 더 큰 사이즈로 두건을 쓴 채 키스를 나누는 남녀로 변형되어 발전한다.

현대 언어철학에 필적할만한 통찰력

<심금>, 1960

정통 초현실주의와 마그리트를 가르는 또 다른 참고 자료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여러 연작이다. 1966년 <말과 사물>을 펴내면서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에 관한 화론을 첫장에 전진 배치한 바 있는 철학자 미셀 푸코는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관한 에세이 한편을 1968년 내놓는다. 이 글은 이후 수정 보완되어 1973년 재간되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하단에 그것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 기이한 그림에 대해 프랑스의 문제적 철학자는 공감하는 바가 컸던 모양이다. 말과 사물의 관계 혹은 사물과 그것의 이름 사이의 연관성에 깊은 회의를 표해왔던 마그리트는 직관에 있어서 전문 언어학자의 그것에 필적할 만한 통찰력을 가졌다. <마그리트>를 지은 저자, 수지 개블릭은 마그리트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사이의 연관성을 설파하기 위해 한장 이상을 할애한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그것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기술한 마그리트의 일견 비상식적 언어관은 단어와 사물 사이의 관계가 논리적 개연성이 아닌 하나의 관습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현대 언어철학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름이란 사물의 본질을 재현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 짓기라는 관례에서 탈피할 때 비로소 사물은 그 본질을 회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언어학을 위한 제도교육을 이수하지 않은 마그리트로선 대단한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남다른 사고방식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군중으로부터 고립된 중절모 신사는 마그리트의 전매특허다. 그는 타인의 시선은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어느 미술사가는 마그리트의 작품을 통틀어 중절모 사내가 최소한 스물다섯점 이상의 작품에서 드러난다고 기록한 바 있다. 앞서 언급한 <골콘다> 속 인물들이 단지 중력에 저항하는 비현실적 인간군상을 장식용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등을 보인 중절모 신사 또한 특정 아이콘의 반복이기보다는 정형적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현실의 이면을 묵묵히 지켜보는 이의 태도를 재현한다. 현실의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 비상식적 관점을 고집했다는 점에서 마그리트는 초현실적이다.

글 : 반이정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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