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읽기 - 텍스트 해석의 한계를 에코에게 묻다
강유원 지음 / 미토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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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년전에 사 놓고 책장에 박아둔채 오랫동안 읽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한 후 매일 2시간의 지하철 여행(?)을 하게 되면서 우연히 책장에서 빼서 읽게 되었다. 아마도 얇고 깔끔한 책 외양때문일 것이다. 저자 강유원씨는 헛으로 분량을 늘려서 글을 쓰는 사람(이 부문에서는 김용옥씨가 일가견이 있다고 할 것이다)이 아니다. 이 책처럼 항상 컴팩트하게 할 말만을 쓴다.

나는 '장미의 이름'을 읽지도 못했다. 그저 '숀 코넬리'가 등장하는 동명의 영화만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영화는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영화를 끌고 간다. 중세의 수도원이나 당시의 상황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살인사건의 동기와 범인을 쉽게 추리할 수 있도록 힌트를 너무나 많이, 그것도 너무나 자주 준다는데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중세의 분위기를 잘 살린 셋트와 살인현장의 재현부분만 빼면 너무나 싱겁게 끝나고 만다.

그러나 강유원씨의 이 책을 읽다보면, 영화가 놓친 수많은 부분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윌리엄과 우베르티노, 호르헤, 수도원장, 베르나르 기와의 논쟁을 통해 신정정치의 부활을 꿈꾸던 로마교황과 정-교 분리를 통해 정치적 권력을 공고히 하기를 원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와의 다툼이 어떻게 프란체스코회의 청빈논쟁으로 이어졌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홍수와 기근, 산업계급과 대학의 성장으로 인해 교회중심의 중세가 그 에너지를 잃어가며 완연해가던 '중세의 가을'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소설 '장미의 이름'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텍스트를 컨텍스트와 함께 읽어갈수록 그 묘미도 더해간다는 깨달음도 얻게 되었다. 또한 나만이, 우리들만이 진리를 담보할 수 있다는 오만한 믿음도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깨달음까지도 말이다. 수도원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장서관'은 그 자체만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텍스트도 컨텍스트와의 관계속에서 그 가치를 더욱 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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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불평등 - 21세기문화총서 9
허버트 실러 지음, 김동춘 옮김 / 민음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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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정보불평등에 관한 책이다. 특히, 21세기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무장경찰인 미국의 갖가지 사례를 통해 미디어와 독점자본의 결합, 정보의 사유화를 통해 야기되는 정보의 불평등 문제를 하나하나 고찰해 나간다. 저자인 허버트 쉴러는 촘스키와 같은 미국 비주류지식인의 하나로 원래는 경제학을 전공했으나, 방향을 전환하여 일생동안 미디어와 권력, 정보의 사유화 현상을 정치경제학적 시각에서 분석하다 2000년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주장한다. (보수신문에서 많이 쓰는 표현을 빌면)‘세계의 석학’이 말하는 정보화 시대의 미래라는 청사진은 장밋빛 환상에 불과하다. 오늘날 정보에 대한 접근기회는 불평등하며, 그 내용조차 거대기업의 선택과 검열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 이러한 정보불평등 현상이 지속된다면 공공을 위한 결정이 불가능해질 뿐 아니라, 우리의 민주주의 체제를 훼손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이다.


저자는 정보불평등 현상을 현대 미국의 갖가지 사례와 역사를 통해 흥미롭게 설명한다. 오늘날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자신이 풍요롭고 자유로운 나라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말은 인간이 아닌 기업에 대해서만 진실이다. 미국인들이 공짜로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정보는 이미 상당한 선택 및 왜곡과정을 거친 정보이다. 즉, 기업들의 이윤추구를 위해 조작된 정보라는 것이다.


미국의 미디어 산업은 대부분 민영화되어 있으며, 80년대말부터 급격한 구조조정을 거쳐 거대 미디어 공룡이 탄생함으로써, 신문,방송,연예,광고,출판 등 미디어가 융합되고 있다. 이는 당연히 더욱 자극적이고 소비를 촉진시키는 방향이다.


구체적으로 1940년이래 50년간 미국의 인구는 대략 2배정도 증가했는데, 개인 소비지출 정도는 약 5배가 상승했다. 이 간극을 메운 것은 급속히 성장한 신용사업과 광고업이다. 오늘날까지 광고산업은 무계획적이지만, 고도로 집중되어 있던 미국 경제가 기업의 재고를 처리하기 위한 수단이며, 특수효과와 같은 테크놀로지에 의해 인간의 감각을 더욱 효과적으로 자극한다. 그리고 현재 미국 언론 수입의 3/4은 이들 비대해진 광고업계에 의존하고 있다.


반면, 공공을 위한 정보는 날이 갈수록 그 양과 질이 저하되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의료개혁팀이 작업에 착수했을 때 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가장 기본적인 주별 복지예산 통계조차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레이건 행정부시절 정부의 비효율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의무기록 리스트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1982년 이래로 16만종에 달했던 정부출판물 가운데 25%가 사라졌다. 이 때문에 정부의 비효율을 제거한다는 이유로 민간기업에게 위탁되었던 많은 업무들이 진정 국민들을 위해 사용되었는지를 확인할 방법조차 없다.


이렇듯 민영화된 기업이 미디어를 소유하면서 사람들이 공짜로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상업화되고 왜곡된 수준에 머무는 반면, 지불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업에 의해  더욱 세분화되고 정리된 수준높은 정보가 제공된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정보화 사회의 장밋빛 환상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민간기업 경영자, 정책입안자, 그리고 역대 미국의 대통령들)은 민간 기업들의 미디어와 정보산업으로의 참여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급기야 정보고속도로라 불리우는 기간통신망 프로젝트까지 민간이 주도하게끔 하고, 주파수라는 천연의 공공재까지(!) 판매함으로써 산업 경쟁력을 높이고 미국의 세계질서에 대한 주도권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으며 현재 그대로 실행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비관적인 현실속에도 희망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희망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단지 저자는 억압적 상황이 심화된다면 1870년 파리와 1917년의 러시아와 같은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점잖게 예언하고 있을 뿐이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구체적인 수치와 사례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친 점은 좋았으나, 그 주장이 너무나 산만하게 나열되어 있다는 점은 옥의 티로 생각된다. 그리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의 실상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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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
박홍규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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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 대한 나의 시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산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분량에 눌려 지금껏 먼지만 쌓여 있다.-_-;; 그러던 중 우연히 알라딘에서 이 책을 발견해서 읽게 됐다.

 이 책은 2003년 세상을 떠난 에드워드 사이드를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박홍규 교수("오리엔탈리즘"의 역자)가 쓴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개론서다. 머릿말에서 그가 밝혔듯이 에드워드 사이드가 죽었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무엇이라도 해야겠기에, 급하게 그에 대해 써놓았던 이전의 글들과 평상시의 자신의 생각의 편린들을 모아 펴냈고 그것이 하나의 책이 되어 나온 것이다.  


박홍규 교수의 말빨(?)탓에 쉽게 읽힐 수 있는 재미있는 개론서 하나가 태어나기는 했지만, 책이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구성된 것은 아닌듯 싶고, 앞부분은 내게 조금 어려웠다. 사이드에게 영향을 주었던 이탈리아의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에 관한 장이었는데, 철학적인 깊이가 없는 나로서는 읽던 책을 던져버리고 싶었다.(난 추상적인 개념을 별로 안 좋아하거덩-_-;) 


이 책에는 사이드가 입에 거품을 물고 말했던 "서구에 의한 동양개념의 날조", "문화적 제국주의",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식인론"에 더해 남한에서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이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를 "남한의 번역의 문제와 영어교육, 서구의 기준에 매몰되어 우리 자신을 잃어버린 인문학강단 "에서의 사례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나서 내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나도 지금껏 영어의 문제나 서구의 여러 이론에 대해서 일종의 컴플렉스를 느껴왔다는 뜻인데,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이분법 자체가 사라짐으로써 내가 느끼던 컴플렉스 또한 사라졌던 것 같다. 


사족) 이 책속에서 사이드가 자신의 지식인론(지식인의 고향은 세계)을 말하며 인용했다는 빅토르 위고의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자신의 고향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부드러운 초보자이다. 모든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보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전세계를 하나의 타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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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영웅전설 -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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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동료가 읽고서 권해주길래 지하철에서 읽었다. 장편이라기 보다는 중편에 가깝다. 그만큼 분량에서 부담이 안되는 박민규씨의 재치가 느껴지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미국중심의 제국주의적 세계질서를 슈퍼맨, 배트맨, 로빈, 아쿠아맨 등 만화속의 영웅들을 통해 그려냈다. 그의 첫번째 장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의 대표작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비해 그리 재미있지는 않다. 겉은 황인종이지만 머릿속의 관념은 순종백인임을 자처하는 주인공 "바나나맨"의 독백을 통해 소설이 서술되는데, 그의 독백은 의미심장할지는 몰라도 독자를 웃기지는 못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분위기와 주인공의 독백이 연상됐다. 그만큼 이 소설의 서술은 담담하다. 하지만 그것만큼 가볍지는 않으며, 소설안에서 자신이 쓰고자 하는 바를 위한 준비도 철저한 것 같고, 일단 하루키보다 재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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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퍼슨웹 기획 / 이가서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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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서 올해 5월부터 "대화"라는 기획연재가 시작되었다. 그 첫번째 코너로 이 책의 저자인 조주은씨와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의 저자 전순옥씨와의 대담이 "우리는 왜 그렇게 혁명을 갈구했나"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그때 너무나 재미있게 기사를 읽은 나머지 두권 모두 구매를 했었는데 아직 읽어보지도 못하고 쳐박혀(말 그대로다. 포장박스째 방구석에 나뒹굴고 있었다)있던 걸 몇일 전에야 읽게 되었다.

70년대 여성노동운동사를 학술적 방법으로 다룬 전순옥씨의 책은 다소 읽기에 힘들 것 같아 조주은씨의 책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마치 우리가족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아 책장을 넘길수록 흥미가 더해왔다. 왜냐하면 내 고향은 울산으로 나는 그곳에서 태어나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20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조주은씨가 현대자동차가족의 일상을 지적할 때마다 나는 "맞아. 맞아"라는 말을 연발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보아온 것들이라 너무나 당연스럽게 생각하거나 으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부분을 조주은씨는 날카로운 시각으로 집어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읽어낸 이 책의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저학력 저임금의 노동과 넉넉지 못한 가정환경의 미혼여성들에게 결혼이란 일종의 탈출구 내지는 환상으로 작용한다는 것
  2. 대기업에서 일하는 남편의 상대적 고임금수준과 기혼여성을 퇴출시키는 노동시장의 상황이 기혼여성들에게 전업주부의 길을 강요한다는 것
  3. 노동자계급내에서 상대적인 고임금이 자녀들에 대한 계층상승욕구를 충동한다는 것
  4. 인간의 노동력을 극도로 착취하는 노동환경(2교대 혹은 3교대 컨베이어작업)에서 남성노동자들을 견뎌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업에서는 교묘한 좋은아내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
  5. 이러한 기제를 통해 가정중심성이 강화되고 있으며 여성은 자본과 가부장제에 대해 이중으로 착취를 받고 있다는 것
  6. 노동자간의 집단거주방식이 올바른 형태의 여성공동체형성을 위한 기반 혹은 여성자신을 억압하는 기제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등등...

나는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무슨 일을 했었고 학교 다닐 때의 추억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거의 들은 바가 없다. 아마도 어머니가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에 가정형편은 힘들었을테고 아버지와의 결혼이 단조롭고도 고난한 일상에서의 탈출을 의미하였을수도 있다. 또한 세명의 아이들에 대한 양육과 울산이라는 기혼여성노동자가 일자리를 구할 길이 막막한 환경 속에서 전업주부로 생활이 강요되었을테고 남성중심의 지역문화와 좋은 아내를 강조하는 기업들의 전략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아이와 가정에서 찾으려고 했을 것도 같다. 그렇게 보면 어머니가 자식들에 대해 그토록 큰 집착을 품고 계신 이유와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는 이웃들과 거의 경쟁을 하듯 교육에 관심을 가지셨던 이유도 쉬 납득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퍼뜩 이제는 어머니 자신의 삶을 찾도록 도와 드려야 할 때이고 좀더 어머니와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를 통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말씀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머릿속에 그리고 몸 속에 녹아있는 고정관념을 깨는 일이 급선무라는 것도 알겠고 말이다. 근데 맨날 생각은 이렇게 해도 부모님 앞에 가면 말은 왜 반대로 나오는지... 갑갑하다. 머리 속에 든 것과 실제 행동을 일치시키는 일은 평생을 안고 가야 할 숙제인 듯 싶다.

이런 이유로 책을 읽다가 먼저 눈길을 끈 건 조주은씨의 특이한 인생내력이었다.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가정에서 성장하여, 서슬퍼렀던 공안당국의 탄압과 뜨거운 운동권적 투쟁열기가 뒤덮고 있던 80년대 대학이라는 전장(?)을 현명하게(?) 잘 넘기고 사회로 진출했던 여성이 갑자기 자신의 생활을 통해 늦깎이 운동권이 되다니.. 또 여성학을 공부하기 위해 젖먹이 아이들을 이끌고 상경을 감행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것은 저자가 자신의 삶을 그만큼 진지하게 바라보고 행동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직장에서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직접 목격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꾸기 위해 일어서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육아와 가사의 쳇바퀴 속에서 여성의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고 현 상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때문에 나는 이 책이 저자의 경험을 통해 삶의 문제를 제기했기에 훨씬 흥미롭고 값진 저작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가족임금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서 노동 주체를 상정해야만 남성들을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성들의 사회적 노동이 가시화되는 계기도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남녀 모두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한 노동의 기회를 갖게 되고 가정 내 책임을 공유하는 시작이 될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감명깊은 말이다. 하지만 레니님이 말했듯 당신의 투쟁이 나의 투쟁이 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항상 어려운 문제다.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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