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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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짬이 나서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고 있다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하루키를 좋아했다. 그의 소설 중에 처음으로 접했던 것이 상실의 시대였고, 그때 받았던 충격은 상당했던 듯하다. 당시 새내기였던 나는 나보다 4살 위였던 동아리  선배누나를 좋아했는데, 그가 내게 권해주었던 소설이 바로 ‘상실의 시대’였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이 책을 권했던 그도 다소간 감정의 과잉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 같은데, 그만큼 하루키소설의 문체와 분위기는 젊은 층에게 강렬하게 다가올 이유가 충분했다. 그 후로 하루키의 소설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의 소설은 여름날 밤 원샷으로 읽는 게 제 맛인 까닭에, 대학교 1학년의 여름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밤에는 그의 책을 읽었고, 낮에는 커튼을 치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은 하루키의 소설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태엽감는 새, 댄스댄스댄스, 하루키 단편선 등등

그의 소설에는 항상 허무함이라는 냄새가 깊게 배어있다. 그의 소설 한켠에서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찾아냈던 기억이 있을만큼 그의 소설에서는 항상 죽음과 허무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인간은 그가 겪었던 시공간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기 마련인지라, 6-70년대 일본의 전공투는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전공투는 미일안보조약문제가 발단이 되어 6-70년대 일본열도를 뜨겁게 달구었으나, 너무나 어이없는 한편의 드라마로 끝나버린 극단적인 방식의 일본 학생운동으로 68년 세계혁명의 일부이기도 했다. 당시 감수성이 예민한 대학생이었던 하루키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이 때문에 늦깍이로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내 전공투세대의 위치다. 유럽의 68혁명세대가 정치, 교육, 문화계에 대거 진출하여 극단적인 냉전대립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개량하는, 체제내의 새로운 목소리이자 활력으로 작용한데 반해, 일본의 전공투세대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를 추종하던 戰前세대와 풍요로운 물질적 성장을 기반으로 한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들인 신인류세대 사이에 끼여 제도권에 발을 붙일 수 없이 떠도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2차대전과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의 부재, 인간성을 말살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맹종은 결과적으로 80년대의 일본을 극단적인 우경화의 길로 들어서게끔 만들었다. 하루키의 경험은 이러한 일본의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젊은 시절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이상과는 정반대의 길로 들어선 일본의 모습 앞에 그는 한없는 상실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는 그의 문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지만, 나는 위와 같은 이유에서 우리나라에 번역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기묘하지만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고등학생시절 친구인 기즈키의 죽음 이후, 세상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포기한 채 살아간다. 혼자서 수업을 듣고, 혼자서 식사를 하고, 어디서건 혼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등 그는 무인도에 떨어뜨려 놓아도 혼자서 능히 살아갈 수 있을 법한 自足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와타나베가 그리 재미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는 미도리에게 “봄날의 곰만큼 네가 좋아”라는 기상천외한 고백을 할 줄 알며, 주변의 매혹적인 사람들(레이코여사, 하쓰미, 나가사와 등)을 자신에게 끌어당길 수 있을만큼의 매력을 지녔다. 그가 혼자인 이유는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사람들로부터 “일정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인간은 생명체이고, 생명체에게 죽음이란 어떤 위대한 사상이나 신념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을만큼 절대적인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無인 죽음과 죽음 사이에서 정해진 만큼의 시간을 허가받은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다. 젊은 시절, 신념의 좌절과 허무함을 맛보았던 그였기에, 인간의 본질에 대해 천착했고, 결국 그는 “죽음앞에 선 인간”이라는 무오류의 명제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허무함에 빠진 주인공의 생존의 증거는 욕망이다. 정확히 말하면 섹스(!)에 대한 욕망. 중간중간에 섹스장면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서술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하루키의 다른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주인공의 페니스를 가리키며 당신의 레종 데트르-raison d'etre-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의 결말부분, 레이코 여사와의 포만감이 깃든 몇 번의 섹스 이후, 와타나베는 빗속의 공중전화에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미도리는 어디냐고 계속해서 묻지만, 와타나베는 대답하지 못한 채 흐느낄 뿐이다. 난 이 장면에서 마치 내 일인 것처럼 너무나 기뻤다. 사랑과 애정이 깃든 섹스를 통해, 와타나베는 비로소 자신이 궁극적인 無가 아니라, 욕망을 지닌 주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고, 자신의 둘레에 쳐둔 벽을 허물고 능동적인 소통을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하루키를 좋아한다. 그러나 예전만큼은 아니다. 내 건방진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난 하루키가 동시대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주제의식)는, 상실의 시대 이후 더 나아간 게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저 소설의 플롯과 등장인물들을 약간 변형시키고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시킨 것 밖에는 없지 않나 싶다. 오히려 과장된 그의 기교가 독자들로 하여금 주제를 읽어내는데 더 난해함을 던져주고 있지 않은지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씨는 어느 글에서 “이성이 사라지면 소녀 취향만 남는다”라는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고 썼다. 나는 위의 경구와 하루키를 동시에 떠올리며 무릎을 쳤다. 어제 친구가 “해변의 카프카”를 빌려주기로 했다. 그 책 속에서 하루키의 더 나은 생각의 단편들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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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8-14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들려 주셨었지요? 님이 읽으신 책들이 다들 제가 감당못할 어려운 책들이라, 만만하한 상실의 시대 리뷰를 클릭했습니다. 와, 님 리뷰 너무 잘쓰시네요. 추천 3개가 너무 박하다고 생각될만큼요(방금 제가 하나 추가했죠). 또 뵐께요. 여러가지로 감사드립니다.

자일리톨 2004-08-17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만철 -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고바야시 히데오 지음, 임성모 옮김 / 산처럼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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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1906년 러일전쟁 이후부터 45년 일본의 패전에 이르는 기간동안의 “남만주철도회사(이하 만철)”의 역사를 다룬다. 저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주제는 만철은 일본제국(식민지역을 포함하여)을 경영하기 위한 두뇌집단이었으며, 그 영향은 패전이후 관료주도형 통제경제(이른바 1940년체제)를 통한 일본의 경제적 부흥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러일전쟁의 전리품이었던 만철을 식민지배를 위한 거대기구로서 위치지은 인물은, 고다마 겐타로와 고토 심페이였다. 이들은 만주나 조선보다 일찍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던 대만에 확고한 식민지배의 기반을 다져 놓았던 인물이었다.

만주의 주재배작물인 대두와, 그 탄맥이 너무나 거대한 나머지 획득초반 채굴방법을 결정하는데만도 엄청난 시간을 끌었던 푸순탄광, 그리고 유럽을 향해 열린 문이라는 지정학적 위치, 이 셋만 놓고 보아도 만주는 일본으로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요충지였던 셈이며, 이의 효율적인 관리체제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식민지배를 위한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만철은 그 내부에 자원탐사, 경제, 산업개발, 치안, 안보 등의 총체적인 문제를 해결할 역량을 지닌 두뇌집단을 필요로 하였고, 이는 결국 만철조사부의 창설로 이어지게 되며, 만주사변이후 관동군, 만주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 속에 일본의 식민지배를 위한 전문연구기구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저자는 좁은 지면에서도 만철 속의 인맥관계에 지나치리만큼 많은 공간을 할애하고 있는데, 전후 일본 국철총재로 신칸센의 건설을 추진했던 소고 신지, 수상을 역임하게 되는 기시 노부스케, 고토 심페이의 조카이며 한일회담당시 외상을 지냈던 시이나 에쓰사부로 등 만주그룹이 전후 추진했던 정책들이 만주에서의 전시(戰時) 경제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논증하고 있다.(박정희, 서영훈, 정일권 등 남한내 만주인맥들에 관해서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보라)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두가지 점이 흥미롭고 놀라웠다. 첫째는, 당시 오가미 스에히로 등 맑시즘에 경도된 일군의 이단적 경제학파들이 일본본토를 떠나 만철조사부에서 이른바 ‘만철 마르크스주의’를 꽃피워 나름의 경제정책으로 입안시켰으며, 이것이 전후 일본의 관료주도형 통제경제체제(1940년체제)를 확립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맑스는 공산주의 이후의 생산양식이나 사회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경제연구는 자본주의를 분석하여 그 붕괴의 필연성을 밝히는 것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현실사회주의국가들에서 취했던 경제정책들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에 가깝다라는 주장이 더욱 타당성을 얻는다. 차문석의 “반노동의 유토피아-20세기 산업주의에 굴복한 사회주의”에서 소련의 경제정책은 다름아닌 1차대전시기 독일군부에 의한 통제경제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후발 현실사회주의국가들도 동일한 경로를 밟았다. 결국 지금까지 존재하며 서로 죽일 듯 체제경쟁을 해왔던 현실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그 본류는 동일하다는 것이고, 완전경쟁에 의한 laissez-faire는 미시경제학교과서에나 존재하는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일본인들의 치밀한 기록의 문화다. 만주국 시절 일본이 남긴 만주관련 자료들은 그 양의 방대함이나 질의 치밀함을 놓고 보더라도 그것을 능가하는 사료를 찾을 수는 없다는 말을 예전 근대 동아시아관련 수업을 수강하며 들은 적이 있다. 이 책에서도 그 실례를 찾을 수 있는데, 만철 경제조사회가 개편되어 산업부가 되기 전 4년 반 동안에 1,882건의 조사 업적을 정리해 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산술적으로 계산하더라도 연간 400권 이상, 한달에 30권 이상, 즉 하루에 한권 이상의 출판물들이 인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의 피땀 위에 그들만의 백년왕국을 일구기 위한 몸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들의 열정과 노력이 너무나 가상하게 생각되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이 책은 분량이 적어 읽는데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지만, 저자의 의도대로 당시 만철이라는 방대한 조직을 여러 시점을 통해 바라보려 했기 때문에 언뜻 책내용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며, 당시 만주 및 일본본토에 대한 역사적 배경지식이 없이는 쉬 흥미를 잃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또한, 저자가 나름대로 당시 갖은 착취와 핍박을 받았던 재만 중국인, 한국인들에 대한 유감을 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제국주의와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이 간간이 엿보여 일본인 저자의 한계가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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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세트 - 전10권 - 양장본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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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의 한강을 읽었다. 그의 소설 중에 처음 읽은 소설이었다. 평소 그의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그리 탐탁지 않은 눈길로 봐온 나였기에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고, 그 분량에 있어서도 부담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한강을 읽게 되었던 이유는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이루어진 6-70년대를 어떻게 조망할 것인가라는 내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 이문열의 변경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문열을 싫어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채 먼지에 싸여 중대본부에 나란히 꽂혀있던 그 12권의 책들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고, 그때는 시간을 어떻게든 흘러가게 만들어야 했던 군대의 말년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문열의 변경은 6-70년대를 조망하는 나름의 시각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기 보다는 작가가 왜 수구반동세력의 돌격대가 되는 길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지리한 변명을 풀어서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게끔 만들었다. 또한, 그 시절을 살아갔던 인물 군상들을 바라보는 이문열의 시각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내 마음 한구석에 찜찜하게 남은 감정수준에서 끝났을 뿐, 그에 대해 객관적인 비판을 날카롭게 가할만큼 정리된 생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정래의 한강을 읽게 되었던 것이다.

 

한강에서 작가 조정래는 4.19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인물 군상들이 세상과 맞부딪치며 살아가는 과정을 담담히 그려나가고 있다. 그 중에는 권력과 가진자들에 빌붙어 서서히 정신적으로 몰락해가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고, 어떻게 해서든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발악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팔도와 그것도 모자라 세계 각지에서 스러져갔던 더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도 있다. 이들을 통해, 근대화, 산업화, 공업화라고 일컬어지는 6-70년대의 경제개발의 주역은 저 수구꼴통들이 들먹이는 다까끼 마사오(박정희)가 아니라 농토에서 내몰리며 서울의 공장에서 부족해 베트남의 밀림, 독일의 광산, 사우디의 사막에까지 보내져 저임금과 고단한 노동에 혹사당해야 했던 이름없는 민초들이었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천두만, 천칠성, 나삼득, 나복남, 나복녀, 박보금, 김광자, 문태복, 전묘숙, 그리고 항상 우리에게 아름다운 청년으로 기억되고 있는 전태일...

 

대학교 1학년 때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1945년부터 1991년까지의 남한의 역사를 다룬 개설서인데, 그때는 각 학회나 동아리에서 갓 입학한 새내기들에게 이 책을 읽히고는 했었다. 그 책의 표지에는 구와바라 시세이라는 일본인 사진작가가 찍은 4.19혁명 5주년 기념시위 사진이 실려 있었다. 빗속에서 대학생처럼 보이는 일군의 남루한 사람들이 연출하는 우울하고도 경건한 침묵시위장면이 흑백의 스틸사진에 담겨있고, 그 뒷면을 넘기면 “지금 50대에 이르는 이들은 재벌 기업의 간부나 고위 공무원이 되는 등,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다.”라고 씌여 있었다. 그 책을 읽을 당시에는 몰랐지만, 한강을 읽은 뒤 바라보는 그 사진은 의미심장하다. 유일민, 유일표, 이규백, 허진, 이상재, 원병균, 박준서 등이 바로 그들이 아닌가. 현실과 부딪치게 되면서 날개를 하나씩 꺾여 버린 채 삶의 무게와 개인적, 사회적 욕망 속에 하나씩 허물어져가던 나의 아버지 세대들. 그들에게 품게 되는 나의 감정은 매우 복합적이다. 동정심, 측은함, 배신감, 허무함 그리고 경이로움. 이들에 대한 평가는 두고두고 우리 그리고 후세의 몫이 될 것이다.

 

조정래의 한강을 통해 정말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인물들을 만났고, 그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역사책에 나오는 딱딱함과 건조함으로 내게 다가오지 않았고, 나름의 삶의 무게를 지닌 향기가 나기도 하며, 때론 악취가 나는 주체로 다가왔다. 그것만 하더라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의 혹자는 조정래의 한강이 태백산맥이나 아리랑에 비해 너무 도식적이고 짜임새가 없는 것 같다고 비판을 하는가 하면, 지면상의 한계로 유신 이후의 소설의 결말부분이 너무 설익게 끝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포항제철의 박태준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일견 국가주의적인 시각인 엿보인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20여년간의 삶을 이토록 짧은 분량에 리얼하게 그려낸 작품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조정래는 실로 큰 일을 해 낸 것이고, 우리는 나름의 시각을 통해 독해해볼만한, 우리시대를 조망해 볼 기회를 주는 중요한 텍스트를 손에 넣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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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8-14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런 리뷰를 쓰고 싶습니다. 하지만 쓸 능력이 안되니 님 리뷰에 추천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92학번 정도 되시는 것 같아요. 그 시절엔 민족주의가 촌스러운 것으로 돌변하는 시기지요. 저희 때는 민족주의가 살길이었던 기억이 나는데... 제 생각엔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주의가 조금 더 팽배해도 된다는 겁니다. 하여간 또 뵐께요.
 
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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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고독과 소통의 단절을 날카롭게 표현해 낸 소설이다. 밤새 읽으면서 너무 재미있었다. 소설의 초반에는 은퇴한 노년의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일상적인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소설의 1/3이 넘어서면서 스릴러로 바뀌고, 종국에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되짚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살아가야할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할 경우 그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현대인들 대다수가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아볼 생각도 없이 그저 생에 대한 집착만을 가지며 살고 있다는 데 있다. 이유는 없고 집착만이 남은 삶. 그럼에도 생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에게 살아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건 폭력일 듯 하다.

이 책의 팔라메드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병원에서 만난 베르나데트와 결혼한 걸로 봐서 나는 그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세상의 편견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생의 의미를 상실한 채,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희망을, 공격적인 태도로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팔라메드 베르나르댕. 주인공이 마지막에 취했던 극단적인 행동은 팔라메드에 대한 전적인 공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소설의 중간, 에밀과 쥘리에트의 어릴 적 침실에서의 추억이 참 마음에 들었다. 뿌옇게 처리된 과거회상용 화면의 따뜻함이 내 뺨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만약 누군가의 추억에서 빌려온 장면이라면 난 그 사람이 너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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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 자유, 자연, 반권력의 정신
박홍규 지음 / 이학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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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탄생 100주년 기념'이라는 다소 과장된 문구로 광고된 이 책은 박홍규 교수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인간 오웰'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오웰을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투사의 모습으로도, 그리고 탁월한 반공주의자(?)의 모습으로도 그리고 있지 않다. 다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만 하는 인간의 권리를 위해 담담하게 자신의 생을 살았던 인간 오웰의 모습을 그린다.

조지 오웰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상당히 왜곡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60년대부터 시작된 군부독재정권이 반공과 냉전이데올로기를 조장하는데 이용함으로써 오웰하면 반공주의자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기는 하지만, 그는 스페인 내전에 지원병으로 참전하기도 했던 좌파적인 아나키스트였고, 산업주의에 반대하며 전원생활로 회귀하기를 원했던 공상적인 자연주의자이기도 했다.

또한, 이 책은 오웰의 성장기부터 그의 삶을 추적해 들어간다. 인도식민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그 역시 버마식민경찰로서 식민주의자의 길을 걷다가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되돌리는 과정. 작가로서의 활동과 전체주의에 대한 그의 일관된 반대노선 등.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며 인간을 위해 살아가고자 했던 오웰의 모습을, 휘청대는 그의 삶의 궤적을 통해 보다 인간적인 방향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이 책은 외국어 번역본이 아닌 탓에 문장의 호흡과 어휘 등 모든 면에서 쉽게 읽힌다. 이 책이 많이 읽혀 오웰에 대한 편견을 깨는데 일조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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