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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설이 녹다
4343.2.17
근육을 꼬아 만든 하루
표류하던 민주주의도 두 동강난 채 떠내려가고
모든 종교도 세속의 놀음처럼 보이는 날
소멸이 모두 가치 있고 존엄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소멸에 가치를 부여하기 어려운 봄날
어떤 소멸은 피기도 전에 날벼락처럼 떨어져서 천국에 가기도 한다
천국은 죽은 자들이 소멸하는 가상의 장소를 지칭할 뿐
잠시 후면 만개할 꽃들의 천국인 지상이 천국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천국은 살아있는 자들의 천국이지 죽은 자를 위한 천국은 아니다
속초에 살면서 알게 되어 함께 바다에서 째복(민들조개)를 캐기도 하고
그의 소개로 용역 일당 일도 함께 다니던
후배가
함께 일 나간 현장 5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와 함께 동거 동락하던 식구(속초의 선후배 친구)들이 먼저 달려가고
식구들의 연락을 받은 그의 먼 가족들은 나중에 도착했다
점령군 같은 그들은 회사와의 협상을 주도했고 산재를 얻어내고 숙식과 장례를 회사에 맡긴 채
빈소를 차지했다
빈소에서 쫓겨난 식구들(그가 힘들 때 함께 했던 모든 것을 회상하는 친구 선배)은
식당에 앉아 처음 보는 가족(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는)들과 등돌리고 앉아 있어야 했다
그의 가족들은 잘산다고 했다. 모 대기업 중역인 큰형과 형수집안 빵빵하고 아버지는 완고하지만
들고 갈수 없는 재산도 있다 하고 여동생도 작은 형도 살만 하다고 했다
연로하고 몸이 아픈 어머니는 오시지 못했다고 했다
6년이란 세월이 아내와 딸을 많이 괴롭게 했는지 그들은 잠깐의 눈물만 흘렸을 뿐
그가 월세로 살던 여관의 유품을 정리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식구들이 가족들에게 말했을 때
가족들은 식구들에게 자신들은 그가 살던 곳을 잘 모르니 대신 잘 처리해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그의 화법에서 대기업의 중역다운 무게 감이 흘렀다
그래서 식구들이 여관으로 몰려갔을 때 어지러운 그의 방엔 지나간 로또 몇 장들과 그가
딸에게 매달 용돈을 빠지지 않고 부치느라, 뼈빠지게 주어 팔려고 모아놓은 동 파이프 조각과 벗겨놓은 전선들이 흩어져 있었다
식구들은 여관에 앉아서 그가 남겨놓은 소주 한 병 반을 마시며 누구나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렸다.
빈소로 돌아왔을 때 그의 가족들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험악한 협상은 아직도 진행 중이었고
사고 회사 간부들과 현장 사무실 소장은 경찰서와 영안실을 열심히 오가고 있었고
밤에 되어서 가족들은 불침번만을 남겨둔 채 사고회사 간부들이 마련한 콘도로 잠자러 갔다.
다음날 오전 11시에 한다던 입관식은, 염하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몇 번 연기되었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려고 아침부터 입관을 기다리던 식구(친구 선후배)들에게는 기별도 없이 가족(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는)들 끼리 오후 5시에 치러버렸다.
-그의 관에 파스 한 묶음 넣어주려던 나의 마지막 합장물은 삼우제에서 태울 수 밖에-
서서히 식구들은 분노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말리는 사이
술병은 쌓여만 가고 드디어 식당 도우미 아주머니도 지쳤는지 한번에 술병을 가져다 놓고 밤이 깊어가는 사이
가족들은 불침번 몇 명 만을 남기고 또 잠자러 가고 식구들만 남아서 늦은 밤까지 표류하고 있었다
그 이후는 쓰기도 싫다. 지겹다
그렇게 서두르고 서둘러 절에 봉안한다던 화장 유골도 마산 앞바다에 뿌리는 것으로 결정이 나고
그의 딸은 상속인으로, 그의 골치 아픈 돈 안 되는 상속은 모두 포기하는 도장을 가족들의 친절한 권유로 찍고, 아침 일찍부터 서두르고 서둘러 그의 가족들은 가고 식구들만 남았다.
남긴 유품은 어떻게 할거냐고 하니까 차에 실을 구석이 없다고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의 트럭은 자연폐차를 시키기로 결의 조차 하지 않은 채 덩그러니 병원마당에 있고
식구들은 허탈했지만 그래도 삼우제를 그가 조개를 캐던 해수욕장 옆에서
그가 남긴 몇 가지 유품들을 태우는 것으로 끝내자고 결의했다
산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살아가는 것
그래서 오늘 아침 용역 일을 나가다가
갑작스런 전화에 되돌아서 왔다
아직 전화 번호부에서 삭제하지 않은 그에게서 전화가 왔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랐다.
그의 이름이 며칠 사이에 갑작스런 이름이 되다니
“’재휘’ 전화에 ‘털보형’이라는 이름으로 전화번호가 많이 찍혀있어서 전화했어요.
평소 우리 재휘와 가까우셨나 봐요. 우리 불쌍한 재휘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며칠 있다가 속초에 가서 재휘 죽은 곳에서 제를 지내려고 해요. 그때 뵈었으면 해요”
연신 고맙다는 말 사이사이에 간헐적으로 섞은 말들을 정리한, 그의 어머니의 전화 말씀이다.
신용불량이어서 전화기를 가질 수 없는 아들에게 자기 명의로 사준 전화기로
전화번호에 등재된 모든 이에게 전화를 하고 계셨다
그와 지내면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고맙다는 전화가 왔단다
-고맙다고-
영원한 가족이자 식구인
어머니의 이름으로
그렇게 화해와 용서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오고
오늘에서야 비로써 눈물이 뜨거웠고
길가, 그늘진 곳에 쌓여있는 마음의 잔설들이 녹고 있는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