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라, 폰카와 놀다(후배재희)

타율의 체험
                                        4342. 설 사흘 전
                                               속초에 폭설
                                                 결국 북한에 변동이 생기면 중국으로 넘어 갈 거고
                                                 숭례문은 목수의 사업 일정대로 짖는 거고
                                                 세종시는 세 번째 종치는 이의 손에 넘어갈 것이고
                                                 오늘은 항상 내일의 앞이다 
                                                 나는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지 않는다
                                                 오늘을 오늘로 살고 내일은 오늘로써 내일이다
                                                 내일 아침 도로가 빙판이면 나를 비롯해서 모두가 설설 길 것이다
                                                 자연의 조화에 설설 기어야 하는 것들이 자연 앞에 몽니를 부린다
                                                 설, 설, 설날이 코앞인데
                                                 코앞이 보이지 않는 날들이다

노동의 시간 열 시간이면
몸이 회복하는 열 시간에 곱이며
진보의 열 시간후면 보수의 열 시간이 진보를 지울 시간이고
일제 피압이 삼사십 년이니 회복이 칠 팔십 년쯤은 지나야 기억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러니 아직은 때가 멀다
남대문 준비하고 짖는데 사 년이면 족하지만
우리는 이런 일에 준비가 없었다
준비 없는 일을 할 때
회복 또한 준비의 곱이다
그런데 때로는 준비 없이 맞이해야 하는 운명이 있다
운명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연의 일부로 살 경우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회복의 시간을 가졌는지 생각해 본다면
노동은 매우 신성한 가치를 갖는다
움직임, 즉 동물로써 인간의 가치는 노동이다
때로는 정신적인 노동을 이야기하지만 사고(思考)가 노동이라면
유명한 시인이나 철학가나 소설가는 피곤해서 단명했으리라
그리고 정신적인 노동은 자율의 노동이다.
마감에 쫓긴다든지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스스로 얽매이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그들만의 속성이지만 사실 사는 영역이 아닌 느끼는 영역에 속하는 회복의 시간일 뿐
자율은 놀이나 오락의 영역
따라서 나는 자율이 아닌 타율로써 노동을 노동이라 한다
순간 순간이 고되어서 다른 생각이 없고 누군가 거들어도 짐이 되는 시간의 신성함
오늘도 시간은 나를 회복의 시간으로 데려다 놓았다
오늘의 노동을 감히 백지화하거나 되돌이킬 수 없는 근육이 포근한 솜 같은 시간
관념이 적은 시인은 체험을 쓰고
체험이 적은 시인은 관념을 쓴다
오래 전에 써둔 이 글이 오늘에야 유효하다
나는 나를 잊지 않았는데
나는 나를 잊는다

노동은 몸을 회복하고 몸은 노동의 타율로써 정신을 회복한다
난 이 촉촉한 몸과 뻐근한 시간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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