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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 재욱, 재훈 ㅣ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5
정세랑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예전에 어떤 초능력을 갖고 싶냐는 질문에, '지치고 싶지 않다'는 답을 했던 기억이 난다. 쉽게 피곤해질 때마다 지겹기도 하고, 다른 초능력들은 너무 '쎄서' 사는게 무의미해질 것만 같으니까. "쇼미더머니"면 몰라도 "파워오버웰밍" 쓰고 하는 스타는 정말이지 재미 없으니까.
정세랑 작가의 <재인, 재욱, 재훈>에도 '귀여운' 초능력을 가진 삼남매가 등장한다. 서로를 따스하게 보듬어 주는 것도, 그렇다고 사이가 딱히 나쁜 것도 아닌, 흔하디 흔한 삼남매가 어느날 바지락 칼국수를 먹고 생긴 초능력으로 각자의 주변을 구하는 이야기다.
레토 슈나이더의 <매드 사이언스 북>을 보면 '나쁜 사마리아인' 실험 이야기가 나온다. 프린스턴 대학 신학생들을 세미나 발표자로 참석케 하고, 건물 A에서 건물 B로 가는 길에 아픈 연기자를 배치해 놓은 것이다. 어떤 요인이 그들을 착한, 혹은 나쁜 사마리아인으로 만들었을까?
인성? 신앙심? 학교 성적? 세미나 내용? 신학교 재학 기간? 아니다. 시간이 많은 학생, 발표 시간 전에 여유 있게 출발한 학생일수록 도움을 줬다. 너무 당연하면서도 당연하지 않은 결과에 '띵' 했던 기억이 난다. 양보라곤 없는 내 출근길 운전도 생각났다.
작가는 말한다. "아무것도 아닌 우연, 아주 조그만 초능력, 평범하고 작은 친절, 자주 마주치는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헬조선이라는 거북한 단어가 유행하는 요즘, 우리에게 필요한 건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바쁨에 지지 않는 '미미한' 서로가 아닐런지.
밝고 가벼워 몸에 좋은 간식 같은 이 책 추천해 드립니다.
ps1. 정세랑 작가. 편집자 출신이다. 많이 읽다 보니 쓰게 되었다고 한다. 방송에 나와 긴장한 탓인지 조심스러운 듯 어수룩한 말투가 기억에 남는다. 타고난 '밝음'을 감출 수 없는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다. "저는 농담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동년배라 더욱 반갑고 응원하고 싶은 84년생 작가.
ps2. 노벨라. 정의를 찾아보니 A short novel or long short story라고 나온다. 짧은 소설 혹은 긴 단편이라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정의. 이 노벨라 시리즈를 기획한 은행나무 출판사는 "단편의 짜릿함, 장편의 여운"으로 소개한다. 작은 판형에 150 페이지 정도의 부담없는 분량도 좋지만, 표지가 하나같이 예뻐서 소장 욕심이 없는 나도 전부 구입해서 집에 두고 싶을 정도이다.
이 책 표지 역시 귀염귀염이 잔뜩 묻어 있는데, 각 삼남매의 초능력과 관련된 손톱깎이, 열쇠, 레이저 포인터가 앙증맞게 그려져 있고 "재인, 재욱, 재훈" 글씨 안에 파란 큐빅 같은 게 촘촘히 박혀 있다. 이 세상 안에서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덧없고 하찮지만 아주 가끔씩 빛나기도 하는 우리들을 그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