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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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생 결혼식날 아침. 그래도 동생 결혼식이라고 목욕탕까지 가서 때빼고 광내다 보니 준비가 늦어졌다. 친척들을 태운 아부지 차가 앞장 서고, 여동생을 태운 나는 그 뒤를 바짝 쫓아간다. 마음은 급한데 집 앞 사거리 신호는 왜 이리 안떨어지는지.. 빨간 불만 한없이 쳐다보고 있다. 그 와중에 갑자기 전진하는 아부지 차량. 의아해 할 새도 없이 '쾅' 하고 가만히 서 있는 택시를 들이받고 만다.

 

'아... 하필 오늘.'

 

아무리 가벼운 접촉 사고라도 사고는 사고. 조급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진다. 곧 차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가시는 아부지. 기사님이 창문을 내리지 않는지 밖에서 직접 문을 여신다. 그러곤 급한 우리 사정을 얘기하신듯 곧 아부지 차로 돌아와 명함을 찾으신다. 그사이 택시에서 내려 아부지 차로 걸어오는 기사님. 잔뜩 찡그린 표정이다. 하필이면 받은게 택시라니..

 

아부지께서 서둘러 명함을 건네고 출발하려는데 기사님이 차문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결국 차문은 억지로 닫혔지만 이젠 아예 차 앞을 가로막는 기사님. 아부지는 아부지대로 차를 슬슬 밀고가는 바람에 본네트에 살짝 걸쳐진채 속수무책으로 떠밀린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오지만 그땐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결국 갓길에 차를 세운뒤 기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출발한다. 나중에 어찌될지 찜찜하지만 일단은 결혼식장에 가야했다.

 

2.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연을 만들어간다. 그 중 나와 호연으로 맺어진 사람은 호인, 악연으로 엮인 사람은 악인이 된다. 우리의 마음은 잉여 활동을 하지 않는다. 힘들고 위급한 상황일수록. 굳이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내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는다. 내가 익숙해져 있는 사고 방식으로 상대방을 재단한다. 그렇게 '악연'을 '악인'으로 만들고, 어떻게 그럴수 있냐고 토로하는게 훨씬 간편하다. 

 

문제는, 어떻게 그럴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어떻게 그럴수 있냐고 할만한 것들이 그리 많지 않다. 무슨 일이든지 다 벌어진다. 시간에 쫓겨서, 일에 치이고 잠을 못자서, 피곤하고 배고파서, 스트레스 때문에. 일상에 지친 몸과 두려운 마음이 다른 누군가의 지친 몸과 두려운 마음을 만나면 무슨 일이든지 다 벌어진다. 힘들때 약해지고, 악해진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서로 상처주고 상처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다. 믿기 위해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주고 받는 것이라면 먼저 주고자 한다. 섣부른 재단이 아닌 질문을 하고자 한다. 몰상식해 보이는 누군가의 행동이, 그의 인생을 죽 펼쳐놓고 보면 그럴만 해진다. 대화와 토론도 결국 상대방이 살아온 과정을 묻는 것이다. 그것이 때론 답답하고 더 오랜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할지라도,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고는 나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꼭 그래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다. 그러한 노력이 궁극적으로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더 깊이 알아가는 즐거움과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다. 악연을 악인으로 만들지 않고, 악연마저 호연으로 뒤집을 수 있는 호인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3.

"절대적인 호인과 악인은 없다. 

찰나의 호연과 악연이 있을 뿐이다."

 자주 곱씹게 되는 '꽃보다' 김현철 선생의 말이다. 평소 어렴풋이 느껴오던 것을, 아니 그렇게 믿고 싶던 것을 명쾌하게 정리해주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아부지께 여쭤봤다. 사고난거 어떻게 되셨냐고. 경찰서에 다녀오셨단다. (헉). 사고 처리하고 기사님 전화번호를 물으셨단다. 만나서 좋게 풀고 싶다고.

 

경찰이 말리더랜다. 그럴 필요 없다고, 꽉 막힌 사람이라고. 괜히 전화해서 속만 상한다고. 그래도 전화하셨단다. 죄송하게 됐다고. 하루 종일 운전하면서 마음 상하셨을텐데 푸셨으면 좋겠다고. 나중에 직접 뵙고 미안한 말씀 드리겠다고 양해를 구하셨단다.

 

처음에는 툭툭 전화 받으시더니 금방 풀리더랜다. 오히려 아닙니다, 아닙니다 하고 송구스러워하며, 하필 새 택시 뽑은지 일주일 밖에 안되서 자기가 심했다고. 보험에서 다 처리해 주는데... 전화주셔서 고맙다고 하시더랜다.

 

그날 결혼식장 저만치서 보이던 아부지의 편한 미소가 생각났다. 무대 위의 아부지를 보면서 '저 사람은 그동안 참 수많은 호연을 만들어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일을 아마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사족. A Small, Good Thing.

 

원래 단편집 '대성당'에 실린 <별것 아닌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감상문을 쓰려다 스포일러 없이 전달하기가 힘들어 빼버렸다. 아들 생일을 맞아 케익을 주문한 엄마, 날짜에 맞춰 케익을 준비해 놓은 제빵사, 하지만 생일날 아침 차에 치여버린 아들, 그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아빠, 그리고 그 아들을 진료한 의사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

 

레이먼드 카버가 쓰고,

소설가 김연수가 번역하고,

빨간책방 이동진이 읽어주는 뭉클함.


직접 느껴보시길 :)

http://www.podbbang.com/ch/3709?e=2139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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