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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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은 떨어져 지낸다.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집을 떠난 뒤로 점점 뿔뿔히 흩어져 여동생과 나는 미국에, 남동생과 엄마는 한국에, 아부지는 홀로 방글라데시에 계신다. 이제 동생마저도 곧 장가를 가는 통에 더 찢어질 참이다. 그래서인지 카톡방에선 다들 참 애틋하다. 보고싶다. 사랑한다. 아이고ㅋ

우리 가족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돌이켜본다. 몇년전 집 앞 호프집에 모여 다같이 한잔 할 때가 떠오른다. 우리집 대표 이빨 아부지와 남동생이 열나게 침 튀겨가며 토론을 벌이고, 나와 엄마는 그 반주에 맞춰 이쪽편 들었다 저쪽편 들었다 추임새 한번씩 넣어주고, 여동생은 아마 심판을 보았던가..?

그보다 더 오래전 일을 기억하려 애써본다. 남자의 기억력은 왜 이모양인지 도대체 왜 아름다운 추억은 떠오르지 않고, 중학교 때 새벽에 몰래 거실에서 x급생 게임을 하다가 아부지가 나오셔서 컴퓨터 전원을 사정없이 뽑아버렸던 일부터 떠오를까. 남동생이 아마 옆에 같이 있었던가..?

암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뭐하고 있었나며 다시 켜보라는 아부지. 어차피 못보셨을테니 다른 게임을 시작하면 될일을 왜 굳이 그 게임을 다시 켰는지는 나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알사람은 알다시피 주인공이 방에만 머물러 있으면 얼굴 붉힐(?)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슨 직장 구하는 게임이라고 에둘러 댔던가..?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 집을 떠난 나로서는 같은 밥을 먹는 '식구'라기보다 관찰자에 가깝다. 바다 건너서도 방학 때마다 휴가 때마다 꼬박꼬박 집에 나오긴 했으나, 남는게 시간인 무중력 상태의 나는 원래의 내가 아니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만만한 가족에게 푸는 못난 아들, 형, 큰오빠는 온데간데 없으니.

대신 작년부터 나와 함께 지내는 여동생이 고생이다. 내 머리 속엔 항상 유치원생으로 정지되어 있던 동생이 다 커버린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인지. 알아서 학교에 잘 다니는 것만으로도 기특할 일인데,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차갑게' 혼을 낸다. 그게 동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것임을 직시할 때마다 당황스럽다..

그런게 가족일까? 험한 세상과 싸우다 지친 인간들이 언제고 돌아갈 수 있는 진지. 그렇게 약해진, 아니 악해진 이들이 서로에게 쉬이 상처주는 말을 내뱉고 별것 아닌 말에도 크게 상처를 입는 곳. 그런 그들에게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상적인 가족 구성원의 모습을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일지도 모른다. 흔히 '가족' 하면 떠올리게되는 "형제간의 따듯한 우애와 건강하고 깨끗한 아이들, 서로에 대한 걱정과 배려, 유순하고 성실한 가족구성원들, 사랑이 넘치는 넉넉한 저녁식사"와 같은 것들은 사실 전혀 평범하지 않은, 우리에게 주입된 환상일지도..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은 바로 그런, 하하호호 아름답고 화목하지 않은 가족에 관한 소설이다. 칠순이 넘은 엄마 집으로 하나 둘 모여드는 전과 5범 큰아들, 영화 말아먹고 폐인이 된 둘째 아들, 바람 피우다 두번 이혼당하고 돌아온 막내딸까지, 평균 나이 사십구세의 세련되지도 쿨하지도 않은 콩가루 가족의 이야기. '평범'하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푹 빠져든다.

요즘 하루종일 틈만 나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계시는 우리 엄마. 눈 나빠진다고 몇번을 말씀드려도 능숙히 한귀로 흘리신다. 결국 폰을 뺐고 옆에 앉아 '고령화 가족'을 읽어드린다. 책하고는 담을 쌓은 우리 엄마지만 그래도 아들이 읽어주니 좋단다.

"엄마, 우리도 이렇게 다 중늙은이 되서 돌아오믄 어찌까?"
"나야 좋제. 허허."

몇장을 채 읽기도 전에 금새 잠에 빠져든 엄마. 진작 한 번 읽어드릴걸. 기분이 묘하다.

이제 며칠 있으면 남동생이 새로운 가족을 꾸리러 우리 둥지를 떠난다. 나 대신 평생 우리집을 지키더니 '시원'하게 간다. 십년 뒤에 큰아들 식구, 작은 아들 식구, 막내딸 식구 온가족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꽉차 있을 우리집을 그려본다. 할머니도 계셨으면 더욱 좋았을텐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우아래 없는 작은 강아지를 아조 혼꾸녕을 내주셨을텐데 :)

할머니, 오늘따라 보고싶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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