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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ㅣ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2
박해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왠지 심오한 제목답게 책의 시작은 프로이트니 뭐니 너무 난해해서 괴로웠지만 고비를 넘기고 나니 상당히 흥미로웠던 책이다. 한줄로 요약하자면 '아파트를 통해 표출되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 정도. 1부 '픽션'은 말 그대로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를, 2부 '팩트'는 우리나라의 아파트에 관한 역사를 살짝 삐딱한듯한 관찰자의 자세로 서술하고 있다.
책에서 작가의 통찰력이 가장 돋보이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1부 픽션의 '어느 강남 1세대의 회고담'이다. 1940년대에 태어난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기와 학창 시절을 보내고 "출세할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된 상태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뼈빠지게 일하면서 아이가 깨어 있는 모습은 보지도 못하는 오랜 생활 끝에 마침내 마흔 즈음에 강남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입성한다.
그후로 주욱 "중산층다운 평탄한 삶이 지속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아닌 금전적 이득은 외면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고 재테크에 무관심한, 아니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소심한 청교도처럼" 살아간다. 그랬던 그가 IMF 외환위기를 거치며 완화된 부동산 규제 정책 덕에 짭잘한 돈맛을 본뒤 "한 줌의 도덕만 포기할 수 있다면 어렵지 않게 안락한 삶의 표면을 유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결국 세상과 타협하고 만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두명의 1940년생이 떠올랐다. 노무현과 이명박. 둘은 모두 가난한 집안의 두 형을 둔 막내로 태어나지만 한명은 부산의 잘나가는 조세전문 변호사로 한명은 승승장구하는 사업가로서 성공한 사회인이라는 비슷한 길을 걷는다. 특히 노무현은 많은 사람들이 인권변호사로만 알고 있지만 판사를 그만두고 처음 변호사로 개업했을때만 해도 그는 "시골에 별장도 하나 갖고 모양나게" 살자고 아내에게 약속하고 "주위가 빈약하니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누나에게 얘기하던 '보통'의 욕망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렇게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듯 하던 두사람은 이 책의 강남 1세대가 세상과 타협한 고민의 지점에서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여전히 내게 물음표이다. 본성? 주변환경? 아님 우연히?) 공교롭게도 둘 모두 차례로 정치인이 되지만 정치를 통해 추구하는 바는 너무나도 달랐다. 노무현이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며 "민주화를 위한 저항"의 길을 택했다면, 이명박은 (아마 별다른 고민 없이 자기합리화를 통해^^;) 더 철저하게 "산업화에 대한 순응"의 길을 택한다. 그 결과는 씁쓸하게도 자식한테 아파트 한채 구해주지 못하는 자신 몰래 아내가 주변에 돈을 구하게 만들어 결국 비극에 이른 무능력한 가장 노무현과 "내 자식과 손자들에게만큼은 외부의 어떤 힘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제적으로 견고한 요새를 증여해줄"수 있는 유능한 가장 이명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저 두사람 사이 가운데 어딘가 쯤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물질주의에 매몰된 대중을 손가락질하며 고고하게 살아가는 좌파 지식인도 있고, 왠지 모를 막연한 불안감으로 오로지 '삶의 질'의 향상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두 간극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다가 나이를 먹으면서 대체로 후자에 조금씩 가까워지는건 아닐까. 2002년에 노무현을 찍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2007년엔 이명박을 2012년엔 박근혜를 찍었던 것처럼 말이다.
1950년대 생이신 우리 아버지는 사람들이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언젠가부터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즉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살아갈수 있는 자세를 잃어버렸다며 그렇게된 근본적인 계기를 궁금해 하곤 하셨다. 이 책은 그런 아버지에게도,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녔"던 우리 세대에게도, 미친듯한 속도로 변화한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아파트'라는 특별한 매개체를 통해 좀 더 실감나고 실질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실 나는 지방에 살아서 그런지 여기 나오는 내용들이 대체로 새로웠지 그렇게 실감나지는 않았는데 수도권에 사는 친구들이라면 자신이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더욱 쉽게 공감할 수 있을듯 싶다. 만약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을 다룬다면 끝없이 터져 나오는 자신만의 아파트 경험담으로 흥미진진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더 알아가고 이해해가며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벗어나 '사람사는 유토피아'로 한걸음 다가설 수 있길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