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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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지 2주가 다 지났다. 리뷰를 하려면 아예 다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제 기억이 희미해졌다. 그래도 난 이 책을 읽을 때 참 좋았다. 그 느낌은 기억한다. 보라색 책, 보라색 책갈피줄, 아담한 사이즈.. 읽으려고 책을 펴면 보라색의 그 줄이 책갈피 사이에 단정하게 놓여있었다. 혹시 이것도 은교의 이미지를 본따느라 나름 신경쓴 부분일까, 생각한 적도 있다.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말은 꽤 늦게 들었다. 내 생활이, 그런 소식을 접할 수 있을만큼 한가롭지가 못하다. 9시 뉴스를, 소파에 푹 파묻혀 처음부터 끝까지(날씨까지) 보는 게 소원 중의 하나다. 심야에 tv를 켰더니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에서 영화 은교를 말해줬다. 궁금증이 확 일었다.

 

소설 은교를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영화 은교가 제작되고 있었다. 은교, 이적요시인, 서지우. 셋의 이미지가 점점 견고해져서 난 내가 영화를 한 편 보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내가 만든 상상속의 영화와 현실의 영화는 얼마나 다를까 궁금했다.

 

박해일, 깜짝 놀랬다. 박해일이 이적요 시인 역을 맡았다. 사실 화면 속의 그 노인이 박해일이라는 걸 알기 전에, 저 할아버지 배우는 누구일까 유심히 봤다. (박해일은 다른 역인 줄 알았다.) 영화 속의 이적요 시인은, 연극 인물 같았다. 할아버지 인줄은 알겠으나 분장한 티가 역력한, 전형적인 연극 무대에서 볼 수 있는 배우의 얼굴. 그래서 뭐랄까, 피시식, 하고 김이 새는 기분..?

 

난 영화를 안 봤다. 사실은 못 봤다. 시간이 없어서.

그래도 그냥 내 상상속의 은교에 만족하기로 했다. 영화 은교가 개봉할 때쯤에 검색창에 은교를 치면 노출 수위를 묻는 질문들이 줄줄이 딸려나왔다. 난 그게 몹시 불쾌했다. 책도, 그 질문을 올린 여러분들이 바라시는 만큼, 야하다. 하지만 분명 그 이상의 뭔가가 있고 그래서 난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소설가 박범신씨를 아주,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야하다, 라는 표면 밑 깊숙이 숨겨진 그 뭔가를, 과연 영화에선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아니 표현이 가능하기나 한걸까?

 

난 은교에게 반해버렸다. 주인공 은교가 아니라 이 책, '은교'라는 책 자체를 아끼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몇주째 내 책상 위에서 치우지 못하고 있다. 책장 윗부분을 삼각형으로 접어놓은 몇 페이지들...을 계속 읽고 또 읽고, 책장에 꽂지 못하고 다시 책상에 올려놓는다.

 

"감수성이란 번개가 번쩍하는 찰나, 확 들어오는 그 세계를 단숨에 이해하는 섬광 같은 것일진대,.."

(감수성을 이렇게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나는, 제 육체의 뜰 안에 비밀의 방을 품고 있는 어떤 '처녀'를 오직 그리워하면서,..."

(마치 시같은 문장들.. 이게 그런 문장이다. 야하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그렇다고 대답해줄수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이 그런 1차원적인 수식어로 그칠만큼 단순한가.)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

 

욕망, 이라는 관점에서보면 불편할 수도 있겠으나, 인간성, 인간다움, 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고 용서가 되는, 그런 것들이 있다. 나는 소설의 역할중 하나가, 그런 관점의 스펙트럼을 넓혀줌으로써 자신과 타인과 세상을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편견이 없어지고 선입관이 없어지는 이해와 소통의 과정을 이끌어내는 것.. 그래서 난 책 안 읽는 사람을 싫어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책을 안 읽어서 편협한 사람을 싫어한다. 소설 은교를 통해서 나는 마음의 지평을 조금 더 넓혔다고 느낀다.

 

 

 

"은교. 아, 한은교. 불멸의 내 '젊은 신부'이고 내 영원한 '처녀'이며, 생애의 마지막에 홀연히 나타나 애처롭게 발밑을 밝혀주었던, 나의 등롱같은 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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