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결혼 시키기
앤 패디먼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고,

짐이 된다는 이유로

잠시나마 내 책들을 헌책방에 팔아넘기려고 했던 사실,

그리고 이 책을 꽤 오랜시간 고민하다 구입하게 된 사실에 대해 심한 죄책감을 느끼게 됐다.

 

책에 대한, 심지어는 활자로 찍혀 나온 것들에 대한

걱정스러울 정도로 심각한 내 집착이

이 책을 읽고나서 정당화되는 기분이다.

그리고 날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

악수를 나누고 껴안은 듯한 느낌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듯이

 책을 사랑하는 방법도 하나가 아님을 깨달았다. " p.64

 

물론이다. 그리고 자기 방식을 남에게 강요해서도 안된다.

예전에 나는 책을 아주 깨끗하게 봤다.

그리고 아직은 책에 대한 그런 태도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듯도 하다.

그러다가 내 친구 m양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준

책 몇 권을 읽게 됐다.

그 책들에는 누군가의 헌사 뿐만 아니라 밑줄, 자기 생각,

어떤 때는 책하고 아무 관련없는 메모도 적혀 있었다.

그걸 보고 난 그 책의 정체성을 발견했다.

그건 'm양의' 책이었다.

이제 내 책장에 꽂기 위해

난 그 밑줄에다 덧칠을 하고 새 메모를 덧붙여 내 것으로 만들었다.

두 사람의 손때가 묻고 책 가운데가 쩍 갈라진 그 책이

이제는 내 소유라는 사실이 뿌듯하다. 

책을 그렇게 '내 것'이 된다.

그리고 당연히,

내 흔적이 남은 책들은 아무에게도 빌려주지 않는다.

 

" 전자제품에 비유하자면, 책갈피를 끼우고 책을 덮는 것은 '멈춤'

단추를 누르는 것이고, 책을 펼친 채로 엎어놓는 곳은 '일시정지'

 단추를 누르는 것이지. " p.66

 

저 글이 적혀 있는 책장의 여백에 스마일을 그려 넣었다.

내 주변의 사려깊은 누군가가 날 위한답시고

나 대신 펼쳐놓은 책으르 덮어주는 건 너무너무 싫다.

읽고 있던 책과 나 사이에 그렇게 불쑥 끼어드는 짓은

아무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것은 당신의 책이기도 해.

내 삶 역시 당신 것이듯이. " p.93

 

작가가 최고로 꼽는 헌사이다.

이 책의 작가 만큼 그녀의 남편도 책벌레인데,

저 문장을 읽는 순간 내 남편도 저렇길 빌었다.

하지만, 책에 대한 과도한 내 집착을 너그러이 이해해주고

먼 미래에 사다리까지 갖춘 서재를 갖겠다는 내 꿈을

격려해주는 것만으로도 난 내 남편에게 감사한다.

참, 책을 팔지 말라고 끝까지 말린 것도 남편이었다.

 

" 나처럼 책을 사랑하여 죽은 사람들과 대화하며 비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 p.96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너무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든 누군가 이미 다 한 이야기다. " p.148

 

가끔 글을 쓰고 싶다고 느끼다가도

슬며시 손을 놓아버리는 내가

가장 잘 하는 변명이다.

쓸 이야기가 없어. 누군가가 다 써버렸기 때문에. ㅋㅋㅋ

 

"장서를 흩어놓는 것이 꼭 시신을 화장해 바람에 뿌리는 것과 같았다고나 할까...  

책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소유한 다른 책들과 공

존할 때에만 가치를 얻게 된다는 것, 그 맥락을 잃어버리면 의미도

잃어버린다는 것을 깨달았지. " p.208

 

내 아이들이 먼 미래에 엄마의 서재를 보면서

엄마가 무슨 생각을 했고, 뭘 좋아하고 사랑했는지

내 책들을 통해 알게 되길 바란다.

그 책 속에는 스무 살의 엄마, 서른 살의 엄마, 엄마가 된 후의 엄마가 있을 것이며,  

가족을 떼어놓은 상태의 온전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거다. 그래서 난 서재를 갖고 싶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아버지를 빼놓을 수가 없다.

늦게 퇴근하시는 날이면, 자는 내 머리맡에 책을 사 놓으셨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야기 명심보감', '어린이 삼강오륜'

이런 책들이 베개 위에 단정히 앉아있었고,

지금 생각하면 다소 지루한 책일지 몰라도

그때의 백지같은 내 상태에서는 그 내용들을 쏙쏙 빨아들였다.

 

초등학생 때의 어느 해 생일에

아버지는 우리를 서점에 데려가서

갖고 싶은 만큼 책을 고르게 해주셨다.

당시 책이 2500원쯤 할 때, 나는 10만원 넘게 책들을 골랐고,

서점주인 아저씨가 덤으로 '몽실언니'를 준 기억이 난다.

(그 때 산 책들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몽실언니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지금은 늙으신 아버지를 위해 내가 책 선물을 드린다.

아버지는 책을 받으시면 속지에다

날짜와 누가 준 선물인지를 꼭 기록하시고,

책 중간중간에 메모도 하신다.

피는 못 속이나 보다. ^^

 

책을 팔지 않기로 했다.

죄책감 없이 책에 낙서를 해댈 것이고, 헌책도 마다하지 않는다.

미래의 내 서재는 요새 유행하는 거실 서재처럼

다양한 기능을 갖춘 서재가 아닐 것이다.

오로지 책과 책읽는 사람만을 위한

편안한 공간으로 꾸밀 생각이다.

일회용 책이라는 건 없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이란 것도 없다. 적어도 내게는.

 

남편이 활자중독자라고 부르는 나는

정 읽을 게 없으면 내가 활자를 만들어내서 읽고야 만다.

살아있는 동안 적어도 책 만큼은 내 맘대로 사랑하며 살고 싶다.

 

한 가지 바램이 있다면,

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노쇠하더라도

책을 읽을 수 있는 눈과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손가락 하나쯤은

무사하게 남겨주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