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 전21권 세트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토지 5부 21권의 마지막 장에는 작가의 손때가 묻어나는 듯 보이는 원고지의 맨 끝장이 사진으로 찍혀있다. 세로 원고지의 왼쪽 하단에 <끝>이라는 단어, 그리고 내가 21권에서 마지막으로 읽은 단어 <끝>은 그 단어 하나로 무한한 감동과 아쉬움과 허탈함을 안겨주었다.

거의 석 달동안 토지를 붙잡고 살았다. 그 동안 다른 책을 사기도 하고 선물받기도 했지만 모두 다 ‘토지를 다 읽은 다음’으로 미뤄버렸었다. 한권 한권을 마치 한땀 한땀 수를 놓듯 아까워하면서 되새겨가면서 읽었던 것 같다. 스트레스를 받는 출근 때는 지하철에서 토지를 읽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혔고, 잠들기 전엔 어떤 의식을 행하듯 다만 30분이라도 꼭 읽고 잠들었다. 그러다보니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있는 듯한 착각에 임이네를 미워하고 김두수를 증오하고 용이와 월선이가 안타깝고 서희의 강한 심지가 부럽고 존경스러웠다.

그런 애정과 착각 때문인지 작품의 끝이 가까워지는 순간을 자꾸만 미루고 싶었다. 해방이 되고 끝나버리는 게 아니라 그 이후에 길상은 풀려났을까, 윤국은 학병에서 돌아왔을까, 해방 후의 혼란기는 어떻게 거쳤을까, 한국전쟁까지 서희는 살아있을까, 양현과 영광의 사랑은 이루어졌을까... 궁금한 게 너무 많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삶은 그저 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해야하기에 답답하다. 작가가 말해주면 좋겠다. 차분하고 다정하게, 그 이후에 그 사람들은 이렇게 되었단다..라고.

예전에 하동에 놀러갔을 때의 사진을 들춰본다. 평사리에 가면 최참판댁이 있다. 작가도 우연히 작품의 무대를 물색하다가 하동의 너른 들녘을 보고, 또 때마침 그 들녘과 섬진강을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실제 조참판댁을 보고 여기다!!라며 점찍었단다. 토지의 배경이 되는 그 최참판댁에 놀러갔을 때 난 별당의 연못을 보고 이 곳에서 서희가 엄마 별당아씨를 데려오라고 울고불고 하다 까무러쳤던 걸까..하는, 마치 그 곳에서 실제 사건이 있었던 것 같은 착각에 빠졌었다.

작가가 삶과 싸워가면서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다. 25년이라던가... 최참판댁의 마지막 여인 최서희가 어릴 때부터 시작해서 할머니가 될 때까지, 소설 속에서는 여러 사람이 태어나고 또 죽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느 하나 주인공 아닌 인물이 없다. 모두 그네들 각자의 기가 막힌 이야기들이 있고 그것들이 얽혀 들어가고 시대적인 배경이 합쳐지면서 꼭 실제인 것만 같은 하나의 거대한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다. 문학작품의 ‘개연성’이라고들 하는, 이 이야기가 마치 조선 말기에서 일본 강점기, 그리고 해방까지의 기간 동안 하동 평사리와 진주, 부산, 통영, 그리고 만주에서 정말로 있었던 이야기를 옮겨놓은 듯한 느낌과 믿음... 그것에서 놓여나기가 정말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뭐 굳이 놓여날 필요가 있을까?   

아무튼 내겐, 토지를 다 읽었다는 사실이 내 삶에서 2007년을 결산할 때 한 항목을 차지할 듯 싶다. 그저 읽기만 했던 내가 마지막 한 권을 탁 덮었을 때 이렇게나 할 말이 많다면, 원고지에 <끝>을 적었을 때 작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토지를 읽은 내 느낌의 키워드를 하나만 찍어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애증’이다. 인간에 대한, 내 나라와 내 산천에 대한,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돌아보게 되는 나 자신에 대한..무작정 사랑할 수만도 없고 무작정 미워할 수만도 없는, 증오와 애정이 함께 섞여들어간 애증이라는 감정.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서 그걸 배웠다. 또한 미워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긴 하지만 그건 기본적으로 따뜻한 감정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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