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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사 시간에 배운, 유럽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대를 떠올려 보자. 물론, 이 책에는 르네상스 시대가 어쩌니저쩌니 하는 시대적 배경을 대놓고 말해주지는 않지만(그래서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유럽의 인본주의적 예술 기법이 이슬람 문화권에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혼란이 이 소설의 배경이랄 수 있다.
르네상스..라면. 긴긴 유럽예술의 암흑기를 거쳐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 눈을 돌려 보자는...
그런 시각이 이슬람 문화권에 도입되기 직전에 이슬람 국가들의 예술은, 아니 구체적으로 말해서 미술은, 세밀화라는 것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 세밀화라는 것에서, 그림이라는 것은 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 평평하고 납작하게 표현되었고, 술탄을 압도하는 사물은 표현할 수 없었나보다.
그러다가 차츰 유럽과 아시아의 접점이라는 아랍권 문화의 특성상 몽골, 중국, 유럽의 미술기법들이 도입되기 시작한다.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되고 있는 원근법과 초상화라는 것이 이들에게는 무척이나 충격이고, 이단이었다. 원근법이라는 것이 도입되면 가까이 있는 개 한마리가 멀리 서 있는 술탄보다 크게 표현된다. 술탄이 아닌 개인이 자신의 특성을 살린, 그래서 누가 그 그림을 보더라도 그게 누군지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감히' 그리고 소장한다는 것은 술탄과 신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 장황한 배경이 소설의 바탕이 된다.
책을 읽으면서 저런 사정을 파악하는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건 순전히 내 속도가 느려서였지, 책이 어렵게 쓰였다거나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어서는 아니었다.
아무튼, 새로운 기법이 도입된 가운데 세밀화가들 사이에서 어떤 것이 이단이고 정통인지에 관해 혼란이 빚어지고 있을 무렵 한 세밀화가가 살해당한다. 그게 이 소설의 시작이다.
소설 속에서는 그림이 이야기하기도 하고, 살인자를 포함한 등장인물들이 제각기 한 장씩 차지하고 이야기를 끌어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빨간 색이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내 이름은 빨강'이다.
빨강이 상징하는 바는, 우리가 너무 당연히 알고 있는 피, 정열, 사랑, .... 많겠지만, 그걸 다 아우르는 이 책에서의 상징은 '변화'와 그 변화에 따르는 혼란이 아닐까 싶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겪게 되는 문화적 정체성의 혼란... 특히 터키라는 나라는 아시아인듯, 유럽인듯.. 그 중간에서 그런 혼란을 더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지금의 독특한 유산들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