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민의 한양읽기 : 궁궐 하 홍순민의 한양읽기
홍순민 지음 / 눌와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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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하

상권에서는 전체적인 역사와 궁궐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봤다면, 하권에서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다. 목차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이 경복궁과 창덕궁에 대한 이야기다.

조선시대의 궁궐이 온전히 남아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태조 초년에 세워져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기까지 줄곧 그랬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 만나는 경복궁은 그 경복궁이 아니다. 임진왜란 이후 270여 년이나 지난 고종 초년에 중건한 경복궁, 또 그것마저도 이리저리 헐리고 왜곡된 끝에 남은 경복궁이다. 복원한다고 하면서 다시 지은 부분도 적지 않지만, 여전히 옛 분위기는 느끼기 어려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p 32~33)”

32에서 33페이지에 나오는 경복궁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는 다르다. 궁궐 내 건물이 빼곡히 들어찬 모습이다. 지금의 경복궁은 텅 빈 공간이 많다. 현대적으로 지어진 깔끔한 궁궐을 보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다. 조선시대가 아닌 2017년의 경복궁의 모습을 세월을 온전히 담고 있기 보단, 세월을 빗겨간 경복궁의 모습이다.

경복궁을 들어가다 보면 금천이 있고, 다리를 놓아 금천교가 있었다고 한다. 경복궁의 금천교 이름은 영제교. 옛날에는 서입동출이라고 해서 서쪽에서 들어와 동쪽으로 물이 흘러가는 것이 좋았다고 여겼다고 한다. 허나, 지금의 경복궁에서는 볼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나라 문화재 관리가 얼마나 엉망인가를 절실히 느낄 수 있다.

경복궁 근정전 천장에는 쌍룡이 있다고 한다. 들어갈 수 없으니 직접 보긴 힘들 것이다. 용은 발톱을 봐야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용의 발가락이 대개 다섯개라고 한다. 이를 오조룡이라고 한다. 7개는 황제를 말하고 격이 높을 것을 상징한다. 근데 근정전 용의 발톱은 7개다.

고종 초년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계조당을 지었다고 한다. 왕세자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허나, 일제에 의해 왕비가 살해 된 후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간 후 경복궁에 임어하지 않았다. 왕세자 역시 임금을 따라 가야 했기에 경복궁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주인을 잃은 계조당은 사라졌다. 안타까운 부분이다.

책의 많은 부분이 경복궁을 담고 있다. 법궁이기 때문이겠지만, 경복궁 이야기만 할 수 없으니 창덕궁으로 넘어가보자.

창덕궁 하면 떠오르는 게 비원이다. 허나, 비원으로 부르면 안된다. 이 역시 일제 남긴 역사 왜곡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창덕궁의 후원은 익히 들었을 것이다. 산자락을 가꾸어 만든 숲을 원유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후원, 북원 금원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창덕궁 후원을 관리하는 부서의 명칭이 비원이었다. 일제가 창덕궁과 창경궁 후원을 비원이라고 불렀고,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게 개방했다고 한다. 벤또 먹고 사쿠라 구경하고 동물원 식물원을 구경하게 되어 버리면서 비원이란 말이 됐다고 한다. 해방이후 지금까지 비원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나 역시 비원이라고 불렀다. 일제 식민지 기간에 우리의 문화와 정신은 말살에 가까운 유린을 당했다. 지금도 그렇다. 아직도 비원이라고 부르는 이가 많기 때문이다.. 용어 하나 하나가 문화고 역사인데.

창덕궁에 갔을 때, 금천교와 진선문이 삐뚤어져서 이상했었다. 책을 보니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 이 역시 일제시대때 위치와 방향, 모양이 바뀐 것이라고 한다. 해방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니 한심하다.

창덕궁에 갔을 때 인정전을 자세히 보지 않았다. 그런데 책에서 보니 인정전에 샹들리에가 달려 있고, 전돌마루, 커튼이 달려 있다. 일제가 조정을 연회장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대한제국을 부정하고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제의 의도였던 것이다.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의미에서 그대로 남겨둔 것이겠지.

창덕궁 후원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는데, 후원은 직접 가보는 것이 좋다. 고궁 통합관람권이 1만원이다. 후원관람비용도 포함된다. 1달 내 궁궐과 종묘까지 관람이 가능하니 직접 가보는 것도 좋겠다.

청경궁은 그리 자세히 관람한 적이 없다. 창덕궁에 갔을 때, ~익 돌아본 정도다. 창경궁은 창경원이라고 불렸다. 나 역시 어렸을 적 창경원이라고 불렀다.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 궁궐이 동물원이 됐었다.

창경궁 후원에는 온실이 있다. 창덕궁 후원을 관람하고 창경궁에 갔을 때, 셀카를 찍는 이들을 많이 봤다. 창덕궁 온실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온실이다. 참 아이러니하게 일제가 지은 건물이 창경궁의 명소가 되다니. 허나, 잘 모르는 이들도 많다. 조선시대가 아닌 현대에 지어진 온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이 보았다.

창경궁 내 춘당지도 그렇다. 임금이 농사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기 위해 논을 만들었는데, 일제가 논을 파서 춘당지로 만들어 버렸다. 작은 호수여서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왜곡된 모습이 아름다운 모습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이다. 청덕궁 후원에도 벼를 심은 곳이 있다. 조선은 농업국가였다. 당연히 논농사가 어떤지 궁금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 아닌 것이다.

서울역사박물관 뒤에 있는 경희궁. 난 경희궁에 한 번도 가본적이 없다. 책의 내용만 봐서는 경희궁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조만간 다녀온 후에 책을 다시 봐야겠다.

다음으로 경운궁이다. 경운궁은 지금 덕수궁으로 불린다. “덕수궁은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난 후 전 황제로서 살게 된 곳의 이름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덕수궁은 궁궐의 이름이 아니다. 이곳을 덕수궁으로 부르면 그 이전 대한제국 광무 연간의 궁궐이라는 뜻이 실종될 우려가 있다.(p 481)”

저자는 덕수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불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궁궐이름을 우리가 불러야지, 일제 시대 때 붙여진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것이 말이 되는가?

경운궁 주변에는 미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 영사관이 있었다. 지금도 있다. 경운궁이 궁궐의 모양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것은 당시 이 영사관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동야행에서 처음으로 중명전을 관람했었다.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 그렇게 정동을 다니면서도 중면전이 있는 줄 몰랐다. 중명전은 한동안 민간 사무실로 사용됐었다고 한다. 이 무슨 말도 안되는 행정이란 말인가?

홍순민의 한양읽기 궁궐 상, 하권을 읽다 보면 참으로 답답한 부분이 많다. 나 또한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 많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말을 참 많이 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도 제대로 모르고, 궁궐의 명칭도 일제 시대의 명칭을 사용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어느 정도 이해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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