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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 인간의 아름다운 소멸을 말하다 ㅣ 플라톤 아카데미 총서
강영안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여름 이대에서 플라톤 아카데미 ‘Beautiful Life - 아름다운 삶과 죽음’이란 강의가 있었다. 거의 모든 강의를 직접들었다. 책으로 읽으니 정리가 잘되어 있어 그 당시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도 이해할 수 있었다.
‘Beautiful Life - 아름다운 삶과 죽음’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다. 죽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삶, 생명과 탄생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탄생과 삶을 살아가지 않고 죽음을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죽음에 대해 잊고 살아간다. 매일 매일의 삶이 너무 바쁘고 버겁기에 죽음을 잊는다. 하지만 잊고 있는 어느 순간 죽음은 우리 앞에 와 있다.
누구나 죽는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멀리 내보내기만 할까? 그것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세계 곳곳의 이야기를 전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결국 지식과 상식, 통념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고 인정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경험하지 않았기에 죽음을 말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겠지.
심정지 혹은 뇌사 상태에서 깨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죽음을 경험한 것일까? 죽음은 생명의 영원한 단절이다. 이들이 심정지 후 80년을 살았다 치자. 한 평생에 5분이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인데 이것이 죽음일까? 정지가 아닌 지속이기에 이를 죽음으로 봐야 할까? 현대의학이 심정지를 죽음으로 본다면, 이들이 경험한 죽음을 왜 믿지 않을까? 이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현대의학의 죽음의 기준도 바뀌어야 하지 않나?
우리는 죽음을 모르고 말하기에 무성한 추측만 남는다. 하지만 생명을 가진 누구나 경험해야 하기에 죽음의 준비는 해야 하지 싶다.
‘아름다운 삶을 비추는 영혼, 친구’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김애령 교수는 친구란, ‘너는 누구인가?’를 묻는 사람이라고 했다. 너에 대해서 알고 싶고 너가 누구인지를 지속적으로 묻는 사람. 그가 친구라고 했다.
삶을 살아가는 중간 우리는 많은 일들을 겪는다. 나에 대해서 묻고 나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완벽한 축복일 수 있을 것이다.
친구가 중요한 이유는 절망에서 찾을 수 있다. 정재현 교수는 ‘왜 사는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잘 살고 있는 경우에는 던지지 않는다고 했다. “질병, 가난, 이별, 실패, 좌절, 고통 등을 겪을 때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이며,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한다고 했다.
맞다. 일상이 평온할 때, 삶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은 잠시 접어둔다.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나의 삶을 고민하고 방향성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이 과정을 통해서 삶은 성숙된다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 이마 이 과정을 여러번 거치면, 심적으로 힘들지는 몰라도 삶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은 더 공고히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이데거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간은 죽을 힘을 갖고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죽을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죽는다(sterben)는 것은 죽음에 대해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상 오로지 인간만이 죽는다. 다른 생물들은 단지 분해된다. 그들은 멸망(verenden)으로 인해 그 의미를 캐지 않는다.”
길거리에 피어 있는 꽃에게 왜 사냐고 물어보라. 그들은 왜 사는지 말하지 않는다. 생명이 주어졌기에 충실히 오늘을 사는 생물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왜 사는지를 묻는다. 참 이상한 종이다.
지구의 전체 수명을 놓고 보면, 한 인간이 사는 시간은 점보다 작을 수 있다. RNA와 DNA가 우리를 복제하면서 실험(?)을 진행 중일 수도 있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한 개인의 삶은 어떤 의미도 지닐 수 없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이야기들이 오늘을 사는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냐는 것이다. 철학적, 생물학적 질문이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면 이런 질문은 질문의 힘을 갖지 못한다.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을 뛰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현실에선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누워있겠지만.
오늘 살아있는 모든 이들은 어느 순간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삶과 죽음, 이런 질문들이 나에게 주는 의미는 단 하나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나 참 잘 살았다. 행복했다.’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오늘, 어제와 같은 오늘. 삶을 살아가면서 죽음을 잠시 잊게 해준, 평온한 오늘. 오늘 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