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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와 선비 - 오늘의 동양과 서양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백승종 지음 / 사우 / 2018년 7월
평점 :
환상, 환영 그리고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
기사도라고 하면 예와 충절, 약자에 대한 연민이 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의 근저는 만들어진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사는 일종의 폭력집단이었다고 한다. 무기와 갑옷을 독점적으로 소유했기에 편민들을 약탈하고 잔학행위를 일삼았던 부랑배나 다름 없던 기사들. 기사들은 전쟁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기사들은 중앙정부의 도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기술이 발달한 16세기가 되면서 기사는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졌다. 총과 대포의 위력 앞에서 칼과 방패는 무력했기 때문이다.
중세는 기사의 시대였다. 기사의 시대 기사문학이 빠질 수 없다. 기사문학은 서정시와 서사시로 나눴는데, 서정시는 프랑스 남부비장에서 발전했고 주제는 연애였다. 연애시 작가를 트루바두르(troubadour : 음유시인)이라 불렀다. 프랑스 북부에서는 서사시가 유행했다고 무공을 서술한 작품이 많았다. 프랑스 북부 기사문학의 작가들을 트루베르(trouvere : 음유시인)이라 불렀다.
독일 기사문학을 대표하는 서사시는 니벨룽의 노래이다. 영국은 아서왕의 전설, 스페인은 로드리고 다아스 데 비바르의 일대기다. 또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빼놓을 수 없다.
기사도 사회의 한 구성원이다.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산업혁명에서 기사, 즉 젠트리의 역할은 지대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일까? 작가는 젠트리를 이유로 꼽는다. 젠트리는 지주였다. 따라서 경제적 자유주의를 추구했다. 영지 규모에 따라 젠트리는 네 가지 계층으로 구분했다. 준남작(baronet), 기사(knight), 향사(esquire), 신사(gentleman)이다. 젠트리는 지주이기에 자본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종교개혁을 지지했고, 인클로저 운동을 주도했다.
기사는 평민에게 폭력을 가했다. 세월이 지나고 자본주의를 추구한 젠트리(기사). 그럼 기사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기사도는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일까? 이는 사회의 변화와 연관이 된다. 책에서는 기사도라고 하지 않고 신사도라고 하기에 신사도라고 하겠다.
신사도는 18세기에 다시 떠오른다. 봉건질서가 무너지도 새 질서가 확립되지 않은 시기이다. 시민의 교양을 강조하는데 스포츠를 이용했다. 스포츠맨십의 핵심은 세가지다. 첫째, 경기자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줄 알아야 한다. 둘째, 상대방을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대한다. 셋째, 승부에 관계없이 페어플레이를 펼친다.
요즘에도 이런 스포츠맨십을 강조한다. 페어플레이상도 이런 맥락이다. 영국의 퍼블릭스쿨은 스포츠맨십을 강조한다. 퍼블릭스쿨은 젠트리 자녀들이 나니는 학교였다. 영국의 미래를 짊어질 지도자를 양성하는 학교에서 기사도를 구현하라고 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럼 우리나라 선비는 어땠을까? 선비라고 하면 당쟁이 떠오른다. 치고 박고 너죽고 나 살자며 당쟁을 펼치는 사람들. 허나, 선비가 꼭 그런 사람들만을 지칭하는 건 아니다.
선비는 성현의 글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성현은 성인 공자와 현인 맹자를 말한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이 선비가 나아가야 할 바를 말한다. 선비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회복하는 것에 가장 관심을 가졌다. 허나 선비도 세상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모든 인간이 가르침에 만족할까?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이 어떻게 저럴수가 있지?", "이런 행동을 하다니, 사람도 아냐!!!"
사람이기에 가장 잔악하고 악랄하다. 우리나라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육식동물을 결코 다른 동물을 재미삼아 죽이지 않는다. 자신이 먹고 살려는 생명 연장으로 먹이를 죽인다. 하지만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살인을 한다. 인간종은 그렇다. 그러니 "사람이 어떻게 저럴수가 있지?"라는 말은 모순이다.
조선에선 서얼 차별이 있었다. 차별을 하려면 씨를 퍼트린 놈을 차별해야지 외 서얼을 차별했을까 싶다. 여튼 양반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위해 서얼 차별을 공고히 했다. 공자, 맹자의 윤리 도덕을 내새웠지만, 공자 맹자는 서얼차별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선비가 언급했던 공자는 서얼 출신이었다.
조선의 선비는 마을을 주 활동무대로 했다. 서당이 많았던 것도 선비가 마을에서 역할을 했던 걸 증명한다. 이후 항일 운동에서도 선비의 역할이 있었다. 1927년 청주에는 총 202개의 서당이 운영됐다. 마을 계몽에도 선비의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
기사도, 부시도, 선비. 세상을 살았던 문화적, 시대적 배경이 조금 다르기도 했고, 같기도 했다. 나라를 나누기 보다 사상적 기반과 시대상을 살았던 여러 사람들의 시대정신이라고 보면 옳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