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과 그 속에 담긴 작가의 세계를 다룬 책이다. 수많은 회화와 사진 작품을 남긴 리히터는 한 가지 기법에 매몰되지 않은 다채롭고 비전형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실재와 환영을 넘나드는 독창적인 세계를 형성했다. 리히터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불확실성이 드리워져 있었다. 자신의 창작물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의견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그는 사람들이 작품을 감상할 때 작가의 의도보다는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해석한다는 사실을 일찍이 알아차렸다. 작품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매개체가 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과 그럼에도 어떠한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닿기를 바랐던 리히터의 열망은 모호함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드러났다. 이는 작품 속에서 의도를 제거하거나 숨김으로써 믿고 싶은 대로 보는 사람들의 태도를 의도적으로 확인하려는 시도이자 자신의 진심을 발견해 주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마음의 표출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치 정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전쟁과 폭력을 경험했던 리히터는 이데올로기에 영향받지 않는 예술가로서, 더 나아가 오직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기를 원했다. 평생을 정치적 상황과 거리를 두며 객관적인 태도를 고수했던 그였지만, 동시에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비극성을 담고자 하는 마음이 공존했다.이러한 심리는 그가 그린 풍경화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리히터는 목가적인 풍경화를 통해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사실은 그림으로 구현한 허구적 공간일 뿐임을 표현했다. 이는 좀 더 본원적인 차원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그들의 시선이 상상 속이 아닌 지금의 현실을 마주하도록 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유령의 형체처럼 불분명하고 희미한 세계를 추구하던 예술가였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언제나 진실한 자세로 작품에 임했다. 불확실성을 통해 다양한 변화를 거듭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끊임없이 발전해 나간 인물이었다. 그에게 불확실성이란 곧 다양성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는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모든 것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 동시에 희망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 따라서 그림이 더 아름답고 더 영리하고 더 비정상적일수록 불가해한 현실을 더 생생하고 불가해하게 묘사하며, 더 나은 작품이 탄생하게 됩니다.”(558쪽)*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