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창비시선 161
정호승 지음 / 창비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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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시집을 읽었다. 아니 한국인이 좋아하는 시 100이라던가 누군가가 편집해놓은 시집이 아닌 한 시인의 이야기가 담긴 시집으로 따지자면 처음이다. 대학 입시를 위해 하나의 시를 뜯어 파헤치던 읽기와 달리 최대한 보이는 그대로 따라 읽으며 온전히 감정으로서 받아들이는 읽기를 하였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던 윤동주 시인의 마음을 굳이 '억압받는 모든 대상 혹은 일제 강점하의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해석하지 않아도 그 순수한 마음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듯이 시는 어쩌면 머리보다는 마음으로 다가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다.

 이 시집을 읽기 전에 접했던 정호승 시인의 시로는 <수선화에게>가 가장 크게 자리하고 있다. '울지마라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란 유명한 구절로 시작되는 이 시는 정말 마음에 들어서 작은 메모장에 적어 두고 한 켠에 '가슴 검은 도요새'라고 나름대로 생각한 작은 새 그림도 그려두고 위로가 필요할 때면 펼쳐보곤 했었다. 외로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태연한 목소리가 힘을 주었다. <수선화에게>는 나의 사춘기를, 입시 경쟁의 스트레스와 외로움을 달래주던, 나의 학창시절을 함께한 너무도 소중한 시다.

 미안하다 / 나도 내 인생이 박살이 날 줄은 몰랐다. (P. ? <겨울밤> 中)

 어쩜 처음 한 시인의 시집을 고르면서 정호승 시인이 눈에 들어온 건 다시금 그때와 같은 힘을 받고 싶어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 담긴 정호승 시인의 목소리는 내 기억 속 <수선화에게>로 남아 있는 느낌과 사뭇 달랐다. 시에서 '이혼'이라거나 '이별'로 표현된 어떤 큰 아픔을 겪었는지 화자는 굉장한 절망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굉장히 무거운 느낌이었다.

 내가 얼마나 모래를 먹어야 / 바다가 될 수 있을까 / 내가 얼마나 모래를 먹어야 / 소금이 될 수 있을까 (P. 44 <배가 고프다> 中)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책 한 권을 채우고도 모자를 아픔을 하나의 시로, 한 문장으로, 하나의 단어로 담아내는 일은 얼마나 힘든 작업이었을까! 두 번째 시집이 나온 후 7년의 시간이 걸린 만큼 그 과정은 힘겨웠으리라 추측된다. 하지만 (1997년에 나온 시집에 뒷북치는 격이긴 하지만) 알알이 맺어낸 아픔의 덩어리들을 이 시집에 토해냈으니 그 고통도 함께 뱉어낸 것이지 않을까? 그가 노래한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이 되는 사람'처럼 그 역시 길 끝에서 새 길을 열었으리라 믿는다.

 기대와는 다른 느낌이긴 했지만 아픔을 오롯이 담아낸 이 시집도 정말 감명 깊었다. 하지만 역시 단호하리만큼 꼿꼿했던 그의 목소리를 찾아 그 이전이나 이후의 작품들 또한 읽어봐야 겠다.

( 100113 - 100120) 


> 마음에 남은 시

   
       봄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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