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낚였다.
원제는 좀 더 책 내용에 가까운 뉘앙스인 것 같은데.
죽어가는 과정, 죽은 후의 절차를 생리적으로 문화적으로 법적으로 상세히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지만 문화와 법률이 독일과 다르니 뒷부분은 좀 추상적으로 들린다.
아마 제목에 낚였다는 말을 출판업자는 좋아하겠지. ˝낚여서 사주었다니 감사합니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적절한 제목은 ˝죽음의 과정˝ 정도가 될 것 같다. ˝죽음의 체험˝도 좋겠는데 뉘앙스가 신비주의적으로 들리니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고 ˝죽음의 간접체험˝이라고 쓰자니 책이 안 팔릴 것 같다. ˝죽음의 안내서˝라고 하자니 자살방법을 안내하는 책인 것 같은 느낌이라 심의(그런것이 있다면)에 통과하지 못할 것 같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미래는 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죽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될 지, 죽은 후에 남은 사람들은 어떤 일을 처리할 지 미리 안내가 있었다면 삶을 좀 더 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좋은 안내서이고 좋은 책인데 제목에서 기대한 내용이 아니다보니 실망하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제목에서 뭘 기대했느냐 하면 또 딱히 할 말이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현대의 삶은, 도시의 삶은 죽음과 매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계적으로 전 지구상에서 매 초마다 2명씩 죽어간다는데, 우리는 평소에 죽음을 장례식장에 갈 때나 인지한다. 그런데 그 때 조차도 죽음을 제대로 인지하게 되어 있지 않다. 특히나 우리 장례문화는 죽은 자에 대한 애도보다는 유가족들에 대한 위로에 더 초점이 맞춰져있다. 내가 알고 지내던 이의 장례식장에 간 횟수와 얼굴도 이름도 몰랐던 이의 장례식장에 간 횟수를 비교해 보면 답이 나오지. (이러한 문화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책 내용과 관련이 없다.) 사망과정에서, 장례절차에서 유가족들이 하는 일도 현대 도시의 삶에서는 죽음과 많이 분리되어 있다. 슬퍼할 시기, 슬퍼하는 과정, 슬퍼하는 방법, 슬픔의 절차 조차도 전문가의 안내에 따라 진행된다. 방법을 미리 알지 못하기에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런 과정을 상세하게 안내한 이 책은 의의가 있다. 다만 독일의 문화, 법률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 아쉽다. 문화적인 부분은 어쩔 수 없다 쳐도 번역하는 과정에서 법률적인 부분에서만이라도 한국의 경우를 주석으로 달아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예 한국화한 책이 나오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건 책의 절반 부분을 아예 새로 조사하고 새로 써야하는 작업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