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발굴
웬디 C. 오티즈 지음, 조재경 옮김 / 카라칼 / 2019년 9월
평점 :
절판


여성들이 숨겨뒀던 이야기들을 전부 다 풀어놓는다면 지구는 터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더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려야 한다고, 그녀들의 이야기가 쓰여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이 땅이 전부 불태워진다고 해도. 여성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하고 침묵한다. 필요 이상으로.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진짜 자기자신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 힘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계속해서 살았으면 좋겠다.



<기억의 발굴>은 웬디 C.오티즈가 자신이 겪었던 그루밍 성범죄에 대해 쓴 회고록이다. 열 세살 중학생이었던 웬디는 또래보다 성숙했고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소녀였다. 영어 교사 제프 아이버스는 그녀에게 특별하다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웬디는 어딘가 잘못됐다는 희미한 경고등에도 그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간다. 사실 이 관계는 제프가 권력상의 위계를 이용하여 미성년자를 상대로 성폭력을 벌인 명백한 범죄다. 그러나 취약한 상태에 놓인 웬디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Excavation. 성인이 된 웬디가 과거의 일기들을 바탕으로 기억을 캐내어 꾹꾹 눌러쓴 회고록. 놀랍도록 솔직하고 대담하다. 고통스럽고 혼란스럽다. 쓰는 이도, 문장 속 웬디도, 읽는 이도 전부. 그러나 과거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제대로 알고자 했던 웬디는 꿋꿋하게 제프와의 기억들을 발굴해낸다. <기억의 발굴>은 그녀가 ‘어딘가 잘못됐다‘는 과거의 흐릿한 경고등을 다시 꺼내어 작동시켜보는 지난한 과정이다.



내가 웬디였다면, 알콜 중독자 엄마와 단 둘이 살면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자아를 가진 -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중학생 소녀였다면 과연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선생님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그 사람을?



나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정면으로 마주보게 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극악한 자기 혐오가 스며들지 않을 수가 없는 작업이다. 과거를 미화하지 않고 제대로 똑바로 서술하고자 하는 저자의 태도가 페이지마다 드러난다. 대단하다. 진실의 힘.



덧. 자연스럽게 린이한의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떠올랐다. 출판사 블로그에서 읽은, <팡쓰치>가 전지적 시점으로 쓰였기 때문에 더 분석적이고 노골적이며 직접적이라는 문장에 공감한다. 나 또한 책 출간 이후 목숨을 끊은 린이한과 아이를 낳고 삶을 계속하고 있는 웬디의 경우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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