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대근무를 하면 밤과 낮 구분이 없어진다. 
해가 중천인 시간에 이부자리에 누워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빛을 어떻게 막을까 고민을 하고,
잠들고, 깨어나면 다시 고민하고 그리고 잠들고.
남들 일하는 시간에 흐느적 일어나 배꼽시계가 원하는 대로 너무 늦은 아침겸 늦은 점심겸 빠른 저녁을 먹는다.

1. 도대체 내 방만 해가 그렇게 들어오는 건가? (남향이니 이건 좀 당연한 이야기) 
2. 오늘은 정말 인터넷을 뒤져서 꼭 두꺼운 커튼을 주문해야겠어 (1년째 계속 되는 다짐)
3. 엄마는 왜 반찬을 안 만들어둬서 늘 김치만 먹게 하는거지? (햄이며 계란이 있으니 조금만 수고해도 될텐데...)
4. 방금까지 세개째의 택배를 받았다. (졸지에 되버린 택배순이)
5. 은행 다녀오자. 맛사지 받고. 카페 들러 커피도 마시고. 쌓아둔 책도 읽고. (....................) 
6. "뭐해?" 카카오톡 문자에 "책 읽어" (이불 속에서 기름낀 얼굴로 하품)  
7. 이게 커피우유야? 우유커피야? (커피에 우유를 너무 부었다)  

일어났다.
이부자리를 치우고, 청소기로 쌓인 먼지를 쓸었다.
아이팟으로 오아시스 "don't look back in anger" 를 무한 재생 시켜 음을 흥얼거리면서...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왜 그런지 이유도 모르게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하게 어떤 생각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다.
책의 한 부분이고, 처음 읽었을 때 작가의 글 센스가 마음에 들어서 시간날 때 끄적이던 내 글에도 모방했던 부분.
의도하지 않은 갑작스런 기억이다.
짜증이 밀려왔다.
분명히 책 제목은 생각 나는데 원하는 부분이 머릿 속에 또렷하게 저장되지 않아 장면을 그리는데 애를 먹는다.

아 정말. 이럴거면 생각이 나질 말던지.
밥 먹고 양치를 안해서 뒤끝이 개운칠 못한 찜찜함은 정말 참기 힘들다.
청소기를 던져버리고 책장으로 갔다.

책 제목은 당연히 기억을 하는데 문제는 어느부분이더라?

  다이엘 페낙의 말로센 시리즈의 첫번째 <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

말로센이 여동생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대단치도 않은 일에 자신을 찾은것에 대한.... 맞나?
아무튼 그 분노로 여동생의 어깨를 흔들어대는 장면. 이게 어느 부분이더라? 반복되는 질문이었고, 거기에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여동생. 말로센이 정말 사랑하는 이복 여동생이지만 근친이기에 손을 대지 못하고 여러명의 쥘리아 아줌마를 만나게 만드는 (말로센의 여자친구는 동생들에게 모두 쥘리아 아줌마로 통한다. 직장에서 잡아내는 도벽이 있는 한명이 아닌 여러명의 쥘리아 아줌마!) 클라라. 기억에 분명히 클라라다. 점쟁이 여동생 테레즈가 아니라 라이카로 사진을 찍는 천재 사진작가 클라라. 여동생과 말로센의 대화장면은 책에 등장하는 말로센 가족의 모든 성격을 볼 수 있는 부분이었는데 어디지? 어디였지?
 
한쪽에 말려진 이부자리와 반대쪽의 청소기가 대치중인 방. 그 한 가운데서 난 다니엘 페낙의 소설을 훝는다.
처음에는 촤르르 다음에는 한 뭉큼 그리고 두 세장
한숨이 나온다. 이게 찾아지질 않는다. 
결국엔 텀블러에 커피를 가득 받아와선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첫장을 넘긴다. 
분명히 읽었음에도 오랜 기간이 흐른터라 생소하게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그렇게 단정치 못한 자세로 아직 먼지가 이는 방에 앉아 조금씩 커피를 줄여갔다. 그리고 찾았다.
말로센이 일하는 백화점에 연속으로 폭탄이 터지는 데 폭탄이 터지고 난 뒤 여동생에게 받은 전화가 안부 전화가 아니라 기르는 개 쥘리우스가 병에 걸렸다가 나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다.

P. 186

얼마 후, 외부로부터 전화가 걸려와 나는 해당 부스로 들어간다. 요즘처럼 뒤숭숭할 때 무슨 부스에 들어가는 게 과연 신중한 처사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며 나는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오빠?"

(클라라! 너로구나, 클라라. 나의 클라리넷! 나는 왜 이다지도 네 목소리를 사랑할까. 작고 평화롭고 흠집 하는 없는, 단어 알들이 정확히 굴러가는 매끄러운 당구대의 융단 같은 네 목소리 안에 똬리를 트는 것이 왜 이렇게 좋을까...... 그만 됐어, 말로센. 근친상간은 참아라! 게다가 당구대 안에 똬리를 틀다니......)

"염려할 것 없어, 누이야. 난 아무 이상 없다. 이번 것은 아주 소규모 폭발인데다 난 갑옷을 입고 있었거든. 그것 없이는 절대 돌아다니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난 집에 돌아가 널 껴안을 때만 그걸 벗는다고. 별볼일 없는 작은 폭발이었어. 정말이야!"
"무슨 폭발?"

침묵. (폭발 때문에 전화한 게 아니야? 아! 그렇군.) 

"오빠한테 알려줄 좋은 소식이 있어."
"엄마가 전화했니?"
"아니. 엄마는 이미 폭탄에 적응했을 거야."
"쥘리아 아줌마의 기사를 끝낸 거냐?" 
"오! 천만에. 그건 좀 시간이 거릴거야."
"제레미가 이번주에는 낙제하지 않기라도 한 거냐?"
"했어. 토요일에 네 시간 보충을 받아야 돼. 음악에서 죽을 쒔대."
"그럼 테레즈가 합리주의로 귀의했니?"
"언니는 방금 전에도 내 카드점을 봤는걸."
"그 카드점이 네가 국문학 수학능력 시험에서 중간 점수는 딸거라고 말해줬구나?"
"아니. 내가 큰오빠를 사랑하는데 라이벌을 경계해야 한다고, 그녀는 [악튀엘] 잡지의 기자라고 했어."
"프티가 이제 식인귀 꿈을 꾸지 않는 건가?"
"그애는 로베르 백과사전에서 고야의[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누스]복사화를 보고 굉장히 맘에 든데."
"루나가 상상 임신을 했니?"
"언니는 방금 초음파 사진을 찍고 왔어." 
"남자애야, 여자애야?"
"쌍둥이." 

침묵. 

"클라라, 그거냐? 네가 말하려는 좋은 소식이 쌍둥이야?"
"오빠도 참. 쥘리우스가 다 나았어."

그런데 이상하다.
책의 3분의 1을 넘겨 찾아 낸 장면이 내 기억과 차이가 있다.
이렇게 대화를 하다가 정신차리라고 여동생을 흔들어야 하는데
여동생을 흔들지도 않고 (하긴 말로센이 자신이 끔찍히도 사랑하는 클라라를 흔들리가 없지)
절대로 그럴 수도 없는 게 대화가 전화로 이루어졌다.
뭐지? 내가 다른 책을 보고 혼동을 했나?
아닌데 아닌데 아닌데 다시 책장을 넘겼다.

아~ 이제 알았다.
내가 기억을 혼동한 게 아니라 두 장면을 혼합한 거였다. 

위의 클라라의 전화 대화와 폭발 사건의 남자가 영국 흑마법사 알레이스터 크롤리와 관계가 있다는 테레즈의 주장에 말로센이 그녀가 가지고 있던 크롤리 관계 서적을 모두 버리는 장면. 두 장면을 한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P.221 

"그는 죽지 않았어, 오빠. 죽지 않았다고. 그는 환생했어!"

아무렴. 또 발동이 걸렸다. 

"진정해라, 귀여운 누이야. 그보다 더 확실히 죽기도 힘들거다. 포토마톤에 증거까지 남겼잖니."
"아니야. 그는 한 번 더 죽음의 외견 뒤로 사라진 것뿐이야. 다른 어느 곳에서 더 번듯하게 태어나 작업을 계속하려고 말이야."

(죽은 몸이 플래시를 받아 섬광을 뿜는 사진이 내 머릿속을 스쳐간다. '작업이라!' 나는 성질이 뻗칠 것만 같다.)

"오빠, 이걸 봐. 그 남자 이름이 레오나르였어!" 

테레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목소리는 창백한 공포에 눌려 사그라진다. 영화 속에서처럼 신문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테레즈가 중얼거리듯 되뇐다.  

"레오나르......"

쥘리우스는 길게 혀를 뺀다.

"그래. 그 인간 이름이 레오나르였어. 그래서?"

아무렴. 나는 성질을 낸다.

"그러니까 그게 사바트의 밤에 악마를 부르던 이름이라는 거지. 악마라고. 오빠! 맘몬! 루시퍼!"

마침내 내 성질이 머리끝까지 치민다. 
나는 크롤리의 책을 손에 들고 조용히 일어난다. 금색 글자가 박이고 녹갈색 모로코 가죽에 싸인 이 물건. 뭔지 모를 내면 세계의 장서. 이게 문제다 (테레즈가 이 따위 책들을 산더미처럼 끌어모아 책장을 칸칸이 채우는 것을 나는 보고만 잇었다. 교육자라고? 퍽도 그렇군!). 나는 말없이 책을 반으로 찢어 아파트 저쪽 구석으로 날려버린다. 그런 다음 내 가냘픈 누이 테레즈의 어깨를 잡고 흔든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그러다 점점 더 격렬하게. 그러면서 나는 그애가 알아듣게 얘기한다. 처음에는 냉정히, 그러다 점점 더 히스테릭하게. 별점이니 예견이니 하는 너의 그 헛소리는 이미 들을 만큼 들었고 악마 어쩌고 하는 그 잡소리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는 결단코 네 입에서 그 따위 얘기는 듣고 싶지 않다. 프티에게 그게 얼마나 통탄스러운 본보기인 줄 아느냐 (통탄스럽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다시 한번,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얘길 또 입에 올렸다가는 내 손에 평생 잊지 못할 만큼 얻어맞을줄 알아라. 알아들었냐, 이 푼수 같은 누이야! 

커피를 비웠다. 동시에 <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 마지막 장을 넘겨 책을 덮었다.

다니엘 페낙의 말로센 시리즈는 큰 오빠 말로센을 중심으로 아이들을 놔두고 여전히 핑크빛 연애질로 또 다른 이복 동생을 만드는 무한 반복 연애주의자 엄마와 각자 아버지가 다른 5명의 동생들의 이야기인데 (곧 여섯이된다) 총 다섯권으로 

[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 1985
[기병총 요정] 1987
[산문 파는 소녀] 1989 
[말로센 말로센] 1995
[정열의 열매들] 1999  


쉽고 재미있게 읽혀 지인들에게 추천하는 소설이지만 반전이 있는 추리 소설로 생각하고 읽으면 곤란하다.
예리한 눈썰미가 있거나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나든가 하는 주인공이 아닌데다 심지어 싸움도 못한다! 
(하지만 내가 이십대 후반에 만난 욕 먹는 일은 과히 천재적이다 할 수 있는 28살의 말로센은 나에게 엄청나게 매력적인 남자였다. 애인을 삼고 싶을 정도로)
과학수사물과 반전에 반전을 더하는 추리에 노출 된 현대인이라면 다소 맥빠지는 사건내용이니
분명히 범죄가 등장하지만 그런 어두운 부분은 말로센과 동생들의 익살로 덮어버리는 경쾌한 추리소설? 아니면 가족소설? 
개인적으로 코믹 소설로 분류하고 싶지만... 그거슨 진리!  

(다니엘 페낙의 다른 소설 "독재자와 해먹"은 말로센 시리즈를 상상하고 구입했지만 그닥 재미를 보진 못했다.)

 문학동네에서 현재까지 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와 기병총 요정까지 나온 상태다.
 처음 [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가 나왔을 때 접하고는 다른 시리즈가 너무 읽어보고 싶어 구판
 으로 나머지 소설이 있는 것은 확인 했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쉽게 구판에 결제 버튼이
 눌러지질 않는다. 그러다가 기병총 요정이 나오고,
 아싸~ 구입. 하지만 다른 시리즈는 묵묵부답.
  

 

구판을 구입하느냐 좀 더 기다리느냐. (블랙베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미 "얼음과 불의 노래" 5부를 기다리며 빠질대로 빠진 목은 더 이상 늘어나지도 않을테지만
게다가 지금 읽지 않고 쌓아둔 책들이 책장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시위중이다! 

  하지만 그럼 뭘하나? 어릴때 빠져 들었던 셜록 홈즈 50권짜리 문고판의 추억을 간직하며
  새로이 홈즈 시리즈를 구입해버렸는데... 
  그것도 페이퍼를 쓰고 있는 바로 오늘에 절대! 드라마 셜록 때문이 아니다. (제길~) 
  실은 맞다. ㅠㅠ  
  드라마와 원작과 얼마나 비슷한 지 포스팅 해둔 다른 블로거님들 글을 읽고
  나 또한 그 비교를 느껴보고 싶어서가 그 이유인데... 너무 비싼 이유이다.    

참. 방금 <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를 찾으면서 옆에 있는 이사카 코타로의 <중력 삐에로>도 빼냈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산 몇 안되는 소설 중 하나.
난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책 표지의 뒷 부분의 추천보단 첫 문장에 반해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먼저 페이퍼에 올린 온다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 그랬고, <중력 삐에로>도 그랬다.

  하루(봄)가 이층에서 떨어져 내렸다.  

청소기를 마저 돌리자.
다시 커피를 타와서 이번에는 오랫만에 <중력삐에로>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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