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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뒷좌석에 그들을 태우고 길고 넓게 펼쳐진 길을 달려 공항으로 향했다. 내부순환로에서 자유로, 자유로에서 방화대교에 올라서면 공항 외 다른 곳으로는 갈 수가 없다. 그게 그 길의 목적이자 生이다. 

K는 시디를 나지막한 볼륨으로 재생하고 흐르는 노래를 따라 무릎을 조금씩 들썩이며 룸미러로 그들의 모습을 슬쩍 살핀다. 공항을 향해 출발한 이후 둘 사이에는 침묵의 강이, 어느새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의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었고, 그들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스치는 시간을 그들 사이에 놓인 침묵의 강에 무심히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게 어쩌면 그들이 남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최선이자 마지막 행위일지도 모른다. 

이미 이륙 시각은 빠듯했기에 K는 더욱더 가속페달을 밟아야 했고, 그럴수록 그들은 침묵의 강의 깊이와는 무관하게 점점 초조해 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그들에겐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앞으로의 시간에 대한 일종의 담보 같은, 모종의 약속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건 신뢰나 진부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K 역시 몰랐던 건 아니지만 지긋지긋한 도시의 교통 체증은 언제나 그렇듯 예측 불가능했고 그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음악만이 홀로 울리고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구라도 먼저 포문을 열면, 열기라도 하면 P는 눈물을 쏟으며 울음을 터트릴 태세였다. 늦가을, 겨울의 문턱에 선 잔뜩 흐린 날씨가 곧 P의 표정이자 심경이었다. 

멀리 영종대교가 눈에 들어오자 차 안을 지배하는 무언의 법칙과는 무관하게 K는 습관적으로 대교를 아래위로 훑으며 운전대에 힘을 가한다. 그리고 이때, 드디어 J가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씨, 저게!" 

하필 순간 옆차로를 질주하던 하얀 중형 세단이 앞서 가는 자동차를 추월하기 위해 급히 차선을 바꾸며 K의 자동차 앞으로 치고 들어오더니 순식간에 눈앞에서 멀어진다. J가 방금 입에서 뗀 단어는 문장을 채 이루기도 전에 하얀 세단의 소음에 묻혀 세단과 함께 달아나 버렸다. J는 짐짓 P의 표정을 살폈으나 P는 세단의 무례와 K의 외침에도 무심한 듯 여전히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 꿈쩍도 않고 있었다. 다시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왔고 공항까지는 이제 20분이 채 남지 않았다. K의 자동차는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고 그만큼의 속도로 앞으로의 남은 시간과 거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또 다른 길을 가야겠지만 슬퍼하지는 않기를, 새로운 하늘 아래 서 있을 너 웃을 수 있도록' 

어느새 시디는 한 바퀴를 다 돌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습관적으로 K는 옅은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입을 열었다. 

"J, 도착하면 커피 한 잔 마시자. 그 정도 시간은 될 거야. P도 좋지?" 

커피라는 단어가 귀를 건드리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J가 먼저 대답한다. 

"나는 카라멜 마끼야또!"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P의 입을 쳐다보지만 P는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말이 없다. 

J는 그런 녀석이었다. 복잡한 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몸과 머리가 자동적으로 거부한다. 즉흥적이되 집중력이 강하고 덜렁덜렁한 듯 보이지만 뭐든 대충 넘기지를 않는다. 한 번에 두 가지를 못 하는 건 물론이요 때로 취해야 할 단호함에 있어서도 양보가 없다. 자기 머리에 입력된, 일종의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나 욕심도 대단하다. 커피도 그 중 하나여서, 카페인 중독이든 뭐든 상관하지 않고 커피라는 단어만 들으면 온 신경이 반응을 해 입으로 대답을 하도록 주문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만큼 J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도 없다. 이런 J를 P 못지않게 잘 아는 K이기에 짐짓 미소를 지으며 룸미러를 통해 시야에 잡힌 대답 없는 P에게 한 번 더 묻는다. 

"이봐 P, 바닷가에 사는 녀석이 뭘 그렇게 넋을 잃고 쳐다봐? 커피 괜찮지?" 

"어."

대답의 주인이 마치 자신이 아닌 것처럼 P의 모습은 변동이 없지만 대답을 하기 위해 살짝 벌린 입 사이로 습도 높은 바닷바람이 스민다. 어느새 창문을 열었는지 가벼운 소음이 바람 소리와 함께 자동차 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소음과는 무관하게 J도 답답했던지 창문을 조금 열어 양쪽으로 바람을 맞는다. 소음은 표정에서 드러나는 심경의 변화를 더욱 뚜렷하게 하고 바람은 이를 애써 감추려 한다. 

이제 공항고속도로가 끝나고 K는 제한속도에 맞춰 속력을 줄이며 공항으로 접근한다. 멀리 제 모습을 드러낸 공항이 K의 눈에 들어온다. 동시에 룸미러에 비친 P의 시선도 소리 없이 공항으로 향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P의 시선의 끝엔 수평선을 드러내는 그윽한 바다가 말 없이 P가 쏟아내는 단어들을 하나 하나 배를 띄우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P가 마음으로 쏟아낸 수많은 단어의 배는, P의 엄중한 시선이라는 닻에 고정되어 단지 넘실거릴 뿐 결코 P의 입 밖으로 나가 J에게 닿지 못한다. 



201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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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스크로 가는 기차 (양장)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고, 운명은 곧 그 사람이 원한 것이랍니다. 그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지요.

 

이 문장을 두고 긴 말은 필요없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무수히도 탓하곤 하는 우리 대부분의 삶은 어쨌거나 만들어진 것이지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건 아니다. 루쉰도 말하지 않았던가, 길은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라 걸으며 만들어지는 거라고. 그러면서도, 이 뻔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무의식적으로 토요일이 되면 로또를 사는 것처럼 우리는 '운명'을 마치 이제는 내 차례라도 되는 것마냥 어색한 희망으로 기다린다. '운명'을 말이다. 


로또를 한 번도 사본 적 없는 나 역시 비슷한 희망으로 일상을 영위하고 있고, 일상을 탓하고 있으며 나 자신의 무기력을 이제는 거부할 수 없는 내 것인양 질질 끌고 다니며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운명'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리석었던 것이다. 어리석었던 나는 내 선택의 결과를 끝내 부정하고 있었고, 언젠가 우연히 아주 급진적으로 내 삶이 송두리째 바뀔 것이라고, 그러한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이제는 오래된 상태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는데, 저 문장을 읽자마자 나는 책장을 잠시 덮고 뜨거워진 눈시울을 다독이며 생을 반추하였다. 나는 어리석었던 것이다. 


현재가 내 생의 일부이기를 거부해왔던 나는 이 책을 만난 이후 비로소 보잘것없게만 여겨졌던 지금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를 온전히 의식하며 언젠가의 내 앞에 펼쳐질 순수한 풍경을 고대하며 작은 집을 짓는 마음으로 생을 대하고 있다. 쓸쓸하고 높고 의젓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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