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가 떨어진 지 한참이다.'
오후 내내 머릿속을 지배했던 문장을 퇴근을 하며 글자 하나 하나 - 초성, 중성, 종성까지 완전히 분해하여 주머니에 넣고 버스에 올라 좌석에 앉으며 K는 생각한다.
'성북동에 반드시 들르자.'
K가 커피를 좋아하게 된 역사는 그가 성북동 카페를 알아온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 커피에 대한 생각을 다듬으며 그는 어릴 적 커피에 대한 기억에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K가 어릴 적, 동네 이장을 맡아 하시던 아버지 때문에 그의 집엔 동네 어르신들의 출입이 잦았다. 어르신들이 오시면 K의 엄마는 프리마를 탄 인스턴트 커피를 내오면서 설탕은 각자 원하는 만큼 넣을 수 있도록 따로 옆에 두곤 했다. 그러면 어르신들은 어린 그가 얼핏 보기에도 많은 양의 설탕을 듬뿍 수저에 담아 한 스푼 또 한 스푼 거듭 커피에 쏟아부었고 그것을 들이켰으며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그가 대체 커피는 무슨 맛일까 상상하며 냄새라도 맡을 요량으로 어르신들이 떠나고 남은 빈 커피 잔 가까이에 가서 보면 거듭 쏟아부운 설탕이 여전히 한가득 움츠린 채 커피 잔 바닥에 고여있곤 했다.
'커피는 설탕 맛으로 먹는 거구나.'
된장찌개보다 비싼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된장이라 부르던 유행의 시대가 지나고 바야흐로 진정한 커피의 전성시대가 된 지금보다는 몇 년 전, K는 우연히 알게 된 성북동 카페에서 처음 커피를 마시게 된다. 스케치북에 빗금을 그리듯 눈이 나리고 몹시 추웠던 겨울의 늦은 오후였다. 그곳은 우선 크지 않은 공간에 나무로 된 인테리어와 손 닿는 곳에 꽂혀 있는 건축을 비롯한 각종 책들이 K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작은 공간에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과 클래식 음악, 다양하게 진열된 우아한 커피 잔들. 잠시 그곳의 공기에 빠져 있으면 어느새 우아한 잔에 담긴 커피가 나오는데 그 맛에는 한치의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깨끗하고 향기로웠으며 맛에도 우아하다는 표현을 붙이고 싶을 만큼 부드러웠다. 완벽하단 말을 언제 써야 할지 잘 모르는 K에게 그곳은 무엇보다 완전한 곳이었다. 부족한 것도 넘칠 것도 없었던 것이다.
퇴근길은 언제나 피로로 가득한 통로를 힘겹게 지나는 과정이다. 출근길이 마냥 싫기만 하다면 퇴근길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힘이 빠지고 그렇기에 아무것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하는 일종의 무기력함의 말 없는 시위와 같다.
'아, 언제부턴가 광역버스에 설치된 광고용 디스플레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K는 이미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며 중얼거린다. 매일 보는 평일 저녁의 풍경이 낯설지는 않지만 여전한 퇴근길의 무기력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자신이 외계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밖으로 빠르게 스치며 보이는 풍경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보기 위해 양손을 사용해 프레임을 만들고 그 안에 갖히는 동시에 빠져나가는 풍경들을 이제는 믿어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금세 K는 손을 풀고 김광석의 음악을 랜덤으로 재생하고 눈을 감는다. 그제서야 습관적으로 부풀어올랐던 그의 마음은 안심이 된 듯 누그러든다.
'라이브 음반들은 아무리 좋아도 오래 듣다 보면 스튜디오 앨범을 더 찾게 돼 쉬 멀어지게 마련인데, 김광석은 늘 라이브를 먼저 찾게 되니 참 이상하단 말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집이다.
"어."
"어디로, 퇴근하나?"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가 김광석의 목소리 못지않게 편안하다.
"어, 버스, 엄마는?"
"집이야. 아빠는 나가고 테레비 본다."
"티비 좀 그만 보고 그 책 읽어 보라니까?"
"안 돼. 눈 아파. 책 읽으믄 뭐하노. 니 아빠 봐라. 맨날 책 보니까 자세도 꾸부정해서 목 아프다, 허리 아프다를 입에 달고 산다. 나는 책 안 읽는다."
일상적인 대화가 끝나고 전화를 끊자 기다렸다는 듯 피로가 덮치며 스르륵, K는 잠에 빠진다. 자신이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는 사이, 소설이나 희망 따위를 떠올리기도 했던 것 같다.
'소설을 쓴다는 건.... 그리고 희망이란 무엇일까?'
기계적으로 내릴 곳에서 잠이 깬 K의 귀에선 여전히 김광석이 울리고 있었고, 약간은 울렁거리는 기분으로 버스에서 내리자 바람이 찬물 끼얹듯 쏟아진다. 번뜩 정신을 차리며 전철역으로 들어서자 이번엔 스크린도어에 설치된 거대한 광고들이 그의 시선을 어지럽힌다. 출퇴근 무렵만 아니면 고즈넉함을 넘어 스산함마저 자아내기도 했던 전철역이 이제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할 정도로 화려하고 어지러울 정도의 빛을 쏟아낸다.
'만성 적자라는 지하철 운영이 이것들로 조금은 개선이 됐을까. 사고 방지에는 어느 정도나 기여하고 있는 걸까.'
스크린도어가 전철이 역에 들어설 때 쌩하고 몰아치던 바람을 막아주고 철로에 뛰어드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며 소음을 줄여준다는 장점은 있지만 무엇보다 이제는 시선을 물론 몸둘 바를 모르게 한다는 점에서 K는 매일 접하는 그 모습에 무덤덤해지기보다 절망에 빠지곤 한다. 그런 생각에 잠이 깨자마자 밀려온 불편한 마음으로 전철에 올라 문 쪽에 기대 선다. 두 정거장을 지나자 전철이 지하를 벗어나 한강을 건너기 위해 철교로 올라서고 창밖으로 드러나는 말 없는 해질 무렵 도시의 풍경이 시리게 아름답다. 멀리 원효대교와 아직 채 어둠에 휩싸이지 않은 여의도 그리고 가득한 구름 사이로 멀어져 가는 석양이 차창에 코를 박게 한다. 순간 K는 풍경을 붙잡고 싶어 손을 내밀어 보지만 전철이 어느새 다시 지하로 기어들어가 버리자 금세 내민 손을 걷는다. 하지만 그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섣불리 전철에서 뛰쳐 내릴 의지가 지금의 K에겐 없었고 그런 주저를 이제는 오히려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이제 곧 풍경의 주인이 뒤바뀔 것이다.
전철에서 내려 성북동으로 향하는 K의 발걸음은 그제서야 가볍다. 주말이면 K가 산책 삼아 나서곤 하는 그 길이, 어느샌가 상점이 하나둘 늘어가는 그곳의 변화가 그리 반갑진 않지만 아직은 좋다. 거대한 옹벽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동사무소, 성북동의 옛 모습을 그려놓은 벽화, 대사관저들이 많은 동네답게 가로등을 따라 걸린 수많은 국기들, 새로 생긴 초밥집, 재개발에 반대하는 플래카드... 성북천이 복개되어 만들어진 그 길을 걸으며 K는 자신이 살아보지도 않은 과거를 상상해 보려 애써 보지만 이내 길 건너편에 우뚝 선 성곽에 가로막히고 만다.
어느새 눈앞에는 조명이 아련한 성북동 카페가 따스한 얼굴로 반기고, 그제서야 K는 퇴근 내내 우울했던 기분을 밀쳐내듯 '오늘의 커피, 탄자니아'라고 적힌 누런 종이가 붙은 카페의 유리문을 바라보며 자신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가볍게 안도의 숨을 한 번 내쉬고는 문을 밀어 카페로 들어선다.
2014/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