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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는 생각보다 일찍 사무실을 빠져나오며 커피 생각이 간절했지만 참고 전화를 걸었다. 연우가 커피를 같이 마시고 싶은 단 한 사람, 바쁘다는 핑계 아닌 현실 때문에 벌써 이 주일 동안이나 만나지 못한 연인, 은효에게. 연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통화연결음은 한 번의 시도만으로 은효의 목소릴 들려주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을 따라 급히 움직였던 걸음의 속도를 조금 늦추며 연우는 - 왜 전화를 안 받지, 오늘은 꼭 보고 싶은데 - 잠시 혼잣말을 웅얼거리며 다시 통화 버튼을 가볍게 누른다.


오늘은 만날 수 있을까. 기다리는 게 연우보다는 늘 익숙했던 은효는 도서관에서 혹시나 연우가 일찍 마치게 되진 않을까, 내심 기대를 품고 휴대전화를 한 번 또 한 번 들여다보며 - 벌써 이 주나 됐는데, 오늘은 꼭 보고 싶은데 - 좀처럼 책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어둑해진 풍경은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퇴근 시간은 훌쩍 지났음을 말해주고 있었고, 그럴수록 은효의 기대는 서서히 미련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진동이 울린다.

"어, 지용아."

"어디야?"

"도서관."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할 얘기도 있고."

"그럴까, 그럼 30분 뒤에 도서관 앞에서 보자."

책을 주섬주섬 가방에 집어넣는 은효의 마음은 어쩐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지용이를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하지.’


횡단보도 앞. 이곳에서 버스를 타면 은효에게로 곧장 갈 수 있고 길을 건너면 연우의 집으로 가는 방향이다. 세 번째, 통화를 시도하는 연우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만 또 연결이 되지 않을까 봐 조금은 조바심에 그을린 듯하다. 하지만 다행히 통화연결음은 은효의 목소리로 바뀌고 연우의 표정도 맑게 개며 입에서는 아주 밝은 목소리가 던져진다.

"어디야?"

"어, 연우아. 나 지금 지용이랑 같이 있어. 미안한데 내가 조금 있다 전화하면 안 될까?"

은효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연우는 아주 가벼운 바람에도 몸살이 걸린 아이처럼 그동안의 조바심과 원했던 커피와 간절했던 만남에 대한 욕망이 으스러짐을 느끼고는 힘이 빠진 걸음으로 녹색 신호로 바뀐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차도로 들어섰다.


지용이를 뿌리치기에 이미 대화의 강은 깊디깊어졌고 이를 확인할 때마다 술잔은 부딪쳐지고 술병은 늘어만 갔다. 그렇지만 아까 연우의 전화를 받고도 제대로 통화하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던지 화장실을 다녀온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빠져나온 은효는 연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게, 통화연결음이 이어지고 연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코와 눈 주위가 심하게 부어오른 연우는, S병원 응급실에서 좀 더 정밀한 검사를 받기 위해 누워있다. 연우가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할 때, 급하게 배달을 하던 오토바이가 신호를 무시하고 미처 보지 못한 연우를 들이받았던 것이다. 앰뷸런스 안에서 은효에게 전화가 왔지만 부러 받지 않은 연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터져나온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은효를 생각한다. 뜻하지 않게 병원 신세를 지게 된 연우는 지금의 상황이 왠지 서럽기만 하다.


지용과 헤어져 집으로 걸어가며, 은효는 거듭 연우에게 전화를 걸어 보지만 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전화를 받지 않지..' 집에 도착해 다시 한 번 시도한 통화가 가까스로 연우의 목소리로 이어지고 전화를 받은 연우는 뜬금없이 얘길 한다.

"넌, 나보다 지용이가 더 중요하잖아."

"..."

그 말은 들은 은효가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주저하고 있는 사이 전화는 끊겨 버리고, 다시 전화를 걸어 보지만 연우는 답하지 않는다. 연우와의 통화가 실패를 거듭하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은효는 연우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고 그제서야 연우의 상황을 알게 된다.


"좀 조심하지.. 뭐야, 이게."

응급실에 누워있는 연우를 보자 은효는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겨우 참으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연우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은효를 외면하고, 그런 연우의 모습에 은효는 가슴이 찢어질 듯하다.


다행히 뼈에 살짝 금이 갔을 뿐 큰 이상은 없다는 의사의 말에 우선 집에 돌아가 안정을 취하기로 한 연우는 어느새 병원에 죄다 모인 가족과 함께 응급실을 나서며 끝까지 은효를 외면하고, 그런 연우의 모습에 힘없이 돌아서 택시를 잡는 은효의 얼굴은 그동안 참았던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말할 수 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201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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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떨어진 지 한참이다.'


오후 내내 머릿속을 지배했던 문장을 퇴근을 하며 글자 하나 하나 - 초성, 중성, 종성까지 완전히 분해하여 주머니에 넣고 버스에 올라 좌석에 앉으며 K는 생각한다. 


'성북동에 반드시 들르자.'


K가 커피를 좋아하게 된 역사는 그가 성북동 카페를 알아온 역사와 거의 일치한다. 커피에 대한 생각을 다듬으며 그는 어릴 적 커피에 대한 기억에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K가 어릴 적, 동네 이장을 맡아 하시던 아버지 때문에 그의 집엔 동네 어르신들의 출입이 잦았다. 어르신들이 오시면 K의 엄마는 프리마를 탄 인스턴트 커피를 내오면서 설탕은 각자 원하는 만큼 넣을 수 있도록 따로 옆에 두곤 했다. 그러면 어르신들은 어린 그가 얼핏 보기에도 많은 양의 설탕을 듬뿍 수저에 담아 한 스푼 또 한 스푼 거듭 커피에 쏟아부었고 그것을 들이켰으며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그가 대체 커피는 무슨 맛일까 상상하며 냄새라도 맡을 요량으로 어르신들이 떠나고 남은 빈 커피 잔 가까이에 가서 보면 거듭 쏟아부운 설탕이 여전히 한가득 움츠린 채 커피 잔 바닥에 고여있곤 했다. 


'커피는 설탕 맛으로 먹는 거구나.'


된장찌개보다 비싼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된장이라 부르던 유행의 시대가 지나고 바야흐로 진정한 커피의 전성시대가 된 지금보다는 몇 년 전, K는 우연히 알게 된 성북동 카페에서 처음 커피를 마시게 된다. 스케치북에 빗금을 그리듯 눈이 나리고 몹시 추웠던 겨울의 늦은 오후였다. 그곳은 우선 크지 않은 공간에 나무로 된 인테리어와 손 닿는 곳에 꽂혀 있는 건축을 비롯한 각종 책들이 K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작은 공간에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과 클래식 음악, 다양하게 진열된 우아한 커피 잔들. 잠시 그곳의 공기에 빠져 있으면 어느새 우아한 잔에 담긴 커피가 나오는데 그 맛에는 한치의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깨끗하고 향기로웠으며 맛에도 우아하다는 표현을 붙이고 싶을 만큼 부드러웠다. 완벽하단 말을 언제 써야 할지 잘 모르는 K에게 그곳은 무엇보다 완전한 곳이었다. 부족한 것도 넘칠 것도 없었던 것이다. 


퇴근길은 언제나 피로로 가득한 통로를 힘겹게 지나는 과정이다. 출근길이 마냥 싫기만 하다면 퇴근길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힘이 빠지고 그렇기에 아무것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하는 일종의 무기력함의 말 없는 시위와 같다. 


'아, 언제부턴가 광역버스에 설치된 광고용 디스플레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K는 이미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며 중얼거린다. 매일 보는 평일 저녁의 풍경이 낯설지는 않지만 여전한 퇴근길의 무기력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자신이 외계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밖으로 빠르게 스치며 보이는 풍경을 조금이라도 붙잡아 보기 위해 양손을 사용해 프레임을 만들고 그 안에 갖히는 동시에 빠져나가는 풍경들을 이제는 믿어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금세 K는 손을 풀고 김광석의 음악을 랜덤으로 재생하고 눈을 감는다. 그제서야 습관적으로 부풀어올랐던 그의 마음은 안심이 된 듯 누그러든다. 


'라이브 음반들은 아무리 좋아도 오래 듣다 보면 스튜디오 앨범을 더 찾게 돼 쉬 멀어지게 마련인데, 김광석은 늘 라이브를 먼저 찾게 되니 참 이상하단 말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집이다. 


"어."

"어디로, 퇴근하나?"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가 김광석의 목소리 못지않게 편안하다.

"어, 버스, 엄마는?"

"집이야. 아빠는 나가고 테레비 본다."

"티비 좀 그만 보고 그 책 읽어 보라니까?"

"안 돼. 눈 아파. 책 읽으믄 뭐하노. 니 아빠 봐라. 맨날 책 보니까 자세도 꾸부정해서 목 아프다, 허리 아프다를 입에 달고 산다. 나는 책 안 읽는다."


일상적인 대화가 끝나고 전화를 끊자 기다렸다는 듯 피로가 덮치며 스르륵, K는 잠에 빠진다. 자신이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는 사이, 소설이나 희망 따위를 떠올리기도 했던 것 같다. 


'소설을 쓴다는 건.... 그리고 희망이란 무엇일까?'


기계적으로 내릴 곳에서 잠이 깬 K의 귀에선 여전히 김광석이 울리고 있었고, 약간은 울렁거리는 기분으로 버스에서 내리자 바람이 찬물 끼얹듯 쏟아진다. 번뜩 정신을 차리며 전철역으로 들어서자 이번엔 스크린도어에 설치된 거대한 광고들이 그의 시선을 어지럽힌다. 출퇴근 무렵만 아니면 고즈넉함을 넘어 스산함마저 자아내기도 했던 전철역이 이제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할 정도로 화려하고 어지러울 정도의 빛을 쏟아낸다. 


'만성 적자라는 지하철 운영이 이것들로 조금은 개선이 됐을까. 사고 방지에는 어느 정도나 기여하고 있는 걸까.'


스크린도어가 전철이 역에 들어설 때 쌩하고 몰아치던 바람을 막아주고 철로에 뛰어드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며 소음을 줄여준다는 장점은 있지만 무엇보다 이제는 시선을 물론 몸둘 바를 모르게 한다는 점에서 K는 매일 접하는 그 모습에 무덤덤해지기보다 절망에 빠지곤 한다. 그런 생각에 잠이 깨자마자 밀려온 불편한 마음으로 전철에 올라 문 쪽에 기대 선다. 두 정거장을 지나자 전철이 지하를 벗어나 한강을 건너기 위해 철교로 올라서고 창밖으로 드러나는 말 없는 해질 무렵 도시의 풍경이 시리게 아름답다. 멀리 원효대교와 아직 채 어둠에 휩싸이지 않은 여의도 그리고 가득한 구름 사이로 멀어져 가는 석양이 차창에 코를 박게 한다. 순간 K는 풍경을 붙잡고 싶어 손을 내밀어 보지만 전철이 어느새 다시 지하로 기어들어가 버리자 금세 내민 손을 걷는다. 하지만 그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섣불리 전철에서 뛰쳐 내릴 의지가 지금의 K에겐 없었고 그런 주저를 이제는 오히려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이제 곧 풍경의 주인이 뒤바뀔 것이다. 


전철에서 내려 성북동으로 향하는 K의 발걸음은 그제서야 가볍다. 주말이면 K가 산책 삼아 나서곤 하는 그 길이, 어느샌가 상점이 하나둘 늘어가는 그곳의 변화가 그리 반갑진 않지만 아직은 좋다. 거대한 옹벽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동사무소, 성북동의 옛 모습을 그려놓은 벽화, 대사관저들이 많은 동네답게 가로등을 따라 걸린 수많은 국기들, 새로 생긴 초밥집, 재개발에 반대하는 플래카드... 성북천이 복개되어 만들어진 그 길을 걸으며 K는 자신이 살아보지도 않은 과거를 상상해 보려 애써 보지만 이내 길 건너편에 우뚝 선 성곽에 가로막히고 만다. 

어느새 눈앞에는 조명이 아련한 성북동 카페가 따스한 얼굴로 반기고, 그제서야 K는 퇴근 내내 우울했던 기분을 밀쳐내듯 '오늘의 커피, 탄자니아'라고 적힌 누런 종이가 붙은 카페의 유리문을 바라보며 자신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가볍게 안도의 숨을 한 번 내쉬고는 문을 밀어 카페로 들어선다. 



2014/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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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뒷좌석에 그들을 태우고 길고 넓게 펼쳐진 길을 달려 공항으로 향했다. 내부순환로에서 자유로, 자유로에서 방화대교에 올라서면 공항 외 다른 곳으로는 갈 수가 없다. 그게 그 길의 목적이자 生이다. 

K는 시디를 나지막한 볼륨으로 재생하고 흐르는 노래를 따라 무릎을 조금씩 들썩이며 룸미러로 그들의 모습을 슬쩍 살핀다. 공항을 향해 출발한 이후 둘 사이에는 침묵의 강이, 어느새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의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었고, 그들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스치는 시간을 그들 사이에 놓인 침묵의 강에 무심히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게 어쩌면 그들이 남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최선이자 마지막 행위일지도 모른다. 

이미 이륙 시각은 빠듯했기에 K는 더욱더 가속페달을 밟아야 했고, 그럴수록 그들은 침묵의 강의 깊이와는 무관하게 점점 초조해 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그들에겐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앞으로의 시간에 대한 일종의 담보 같은, 모종의 약속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건 신뢰나 진부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K 역시 몰랐던 건 아니지만 지긋지긋한 도시의 교통 체증은 언제나 그렇듯 예측 불가능했고 그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음악만이 홀로 울리고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구라도 먼저 포문을 열면, 열기라도 하면 P는 눈물을 쏟으며 울음을 터트릴 태세였다. 늦가을, 겨울의 문턱에 선 잔뜩 흐린 날씨가 곧 P의 표정이자 심경이었다. 

멀리 영종대교가 눈에 들어오자 차 안을 지배하는 무언의 법칙과는 무관하게 K는 습관적으로 대교를 아래위로 훑으며 운전대에 힘을 가한다. 그리고 이때, 드디어 J가 입을 열었다. 

"우리.."

"아이씨, 저게!" 

하필 순간 옆차로를 질주하던 하얀 중형 세단이 앞서 가는 자동차를 추월하기 위해 급히 차선을 바꾸며 K의 자동차 앞으로 치고 들어오더니 순식간에 눈앞에서 멀어진다. J가 방금 입에서 뗀 단어는 문장을 채 이루기도 전에 하얀 세단의 소음에 묻혀 세단과 함께 달아나 버렸다. J는 짐짓 P의 표정을 살폈으나 P는 세단의 무례와 K의 외침에도 무심한 듯 여전히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 꿈쩍도 않고 있었다. 다시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왔고 공항까지는 이제 20분이 채 남지 않았다. K의 자동차는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고 그만큼의 속도로 앞으로의 남은 시간과 거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또 다른 길을 가야겠지만 슬퍼하지는 않기를, 새로운 하늘 아래 서 있을 너 웃을 수 있도록' 

어느새 시디는 한 바퀴를 다 돌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있었다. 습관적으로 K는 옅은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입을 열었다. 

"J, 도착하면 커피 한 잔 마시자. 그 정도 시간은 될 거야. P도 좋지?" 

커피라는 단어가 귀를 건드리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J가 먼저 대답한다. 

"나는 카라멜 마끼야또!"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P의 입을 쳐다보지만 P는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말이 없다. 

J는 그런 녀석이었다. 복잡한 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몸과 머리가 자동적으로 거부한다. 즉흥적이되 집중력이 강하고 덜렁덜렁한 듯 보이지만 뭐든 대충 넘기지를 않는다. 한 번에 두 가지를 못 하는 건 물론이요 때로 취해야 할 단호함에 있어서도 양보가 없다. 자기 머리에 입력된, 일종의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나 욕심도 대단하다. 커피도 그 중 하나여서, 카페인 중독이든 뭐든 상관하지 않고 커피라는 단어만 들으면 온 신경이 반응을 해 입으로 대답을 하도록 주문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만큼 J를 확실히 보여주는 것도 없다. 이런 J를 P 못지않게 잘 아는 K이기에 짐짓 미소를 지으며 룸미러를 통해 시야에 잡힌 대답 없는 P에게 한 번 더 묻는다. 

"이봐 P, 바닷가에 사는 녀석이 뭘 그렇게 넋을 잃고 쳐다봐? 커피 괜찮지?" 

"어."

대답의 주인이 마치 자신이 아닌 것처럼 P의 모습은 변동이 없지만 대답을 하기 위해 살짝 벌린 입 사이로 습도 높은 바닷바람이 스민다. 어느새 창문을 열었는지 가벼운 소음이 바람 소리와 함께 자동차 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소음과는 무관하게 J도 답답했던지 창문을 조금 열어 양쪽으로 바람을 맞는다. 소음은 표정에서 드러나는 심경의 변화를 더욱 뚜렷하게 하고 바람은 이를 애써 감추려 한다. 

이제 공항고속도로가 끝나고 K는 제한속도에 맞춰 속력을 줄이며 공항으로 접근한다. 멀리 제 모습을 드러낸 공항이 K의 눈에 들어온다. 동시에 룸미러에 비친 P의 시선도 소리 없이 공항으로 향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P의 시선의 끝엔 수평선을 드러내는 그윽한 바다가 말 없이 P가 쏟아내는 단어들을 하나 하나 배를 띄우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P가 마음으로 쏟아낸 수많은 단어의 배는, P의 엄중한 시선이라는 닻에 고정되어 단지 넘실거릴 뿐 결코 P의 입 밖으로 나가 J에게 닿지 못한다. 



201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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